소설리스트

교여독비-169화 (169/442)

169화 원수를 만나다

“뭐, 뭐라고……?”

목운요는 몸을 곧게 세우고 뛰어난 말솜씨를 뽐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소저는 농민들 덕분에 매일 하얗고 맛있는 쌀밥, 채소와 과일을 먹습니다. 그들은 엄동설한에도, 혹서에도 밭을 일굽니다. 만약 그런 이들을 우습게 본다면 앞으론 맛난 것들도 먹지 말아야 할 겁니다. 맞아요, 저는 촌구석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전 그것을 창피하다고 여긴 적이 없어요. 그러니 시시각각 제가 촌구석 출신인 걸 비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맹언연은 말문이 막혔다.

“감히 어디서 억지를……!”

장완은 맹언연을 쳐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상께서도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하시는데, 저렇게 백방으로 목운요의 출신을 조롱하는 것은 스스로 체면을 깎는 일이 아닌가?’

짝짝짝!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정자에 있던 이들은 소리의 근원지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소청오가 한 청년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소청오 옆에 선 이는 새까만 머리칼과 봉황을 닮은 눈,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훤칠한 미남이었다. 곧고 풍채 좋은 체격 또한 누구든 감탄할 만했다.

그를 본 목운요는 놀라서 얼이 빠져 버렸다. 귀 언저리에서 맴돌던 시끄러운 소리들이 점점 사라졌다. 반면 두 눈엔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목운요는 자신의 몸에서 도는 피가 얼어붙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굳어 버렸다.

“운요야, 이번 생에 너를 부인으로 삼지 못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안타까움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네게 온갖 보물이란 보물은 모두 손에 쥐여 줄 거다. 절대로 널 등지지 않을 거다.”

회귀 전, 눈앞에 있는 저 사내는 자신에게 사랑을 맹세하며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자신을 월왕에게 보내 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평소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빈틈이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바라본다면 누구든 깊고 깊은 사랑을 느껴 그의 모습에 빠졌다가 결국 그에게 잠겨 죽어 버릴 것이다.

회귀 전의 목운요는 비참하게 죽어 가며 속으로 수도 없이 소리쳤다.

‘왜 나를 그에게 보냈죠? 왜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나를 욕보이며 죽게 내버려 뒀죠? 평생 나를 등지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고양이나 개를 길러도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정이라는 게 생기는 법인데, 어찌 사람인 나에게 이렇게 냉혹하고 무정할 수 있어요!’

소청오를 본 소우의는 재빨리 치마를 들어 예를 갖췄다.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소청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아, 이분은 진왕 전하시다. 어서 인사를 올려라.”

고개를 든 소우의는 미소 짓는 진왕을 바라봤다. 그의 준수한 외모는 그녀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고, 곧 소우의는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띠었다.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소 소저는 예를 거두시오. 말도 없이 찾아와서 방해하는구려.”

말을 끝낸 진왕의 시선이 목운요에게 닿았다.

“아마 이쪽이 부황께 상을 받은 목 소저겠구려.”

진왕의 두 눈을 마주하자 목운요는 ‘쨍그랑’ 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주변의 소리가 모두 한곳에 모이고, 얼어 버렸던 피도 다시 흐르는 것 같았다. 마음을 가득 채웠던 냉기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짙은 증오가 자리 잡았다.

목운요는 입꼬리를 말아 올려 가을날의 맑은 냇물처럼 두 눈을 바로 떴다. 목운요가 방긋 웃자 그 모습이 더욱 매력적으로 빛났다.

“진왕 전하를 뵙습니다.”

“목 소저, 예를 거두시구려. 경릉성에서 백성에게 보답한다며 십만 냥을 기부했다고 들었소.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크게 감복했소.”

“과찬이십니다. 진왕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신걸요. 황명을 받들어 이재민을 구제하러 가셨다죠. 당시 역병이 돌고 있었는데, 위험을 무릅쓰며 백성들과 함께 난관을 헤쳐 나가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또 작년에는 홍수를 막으러 가셔서, 공사하는 인부들과 함께 먹고 자며 백성 수만 명의 안전을 지키셨지요. 진왕 전하의 담력과 식견, 그리고 심성 또한 다른 이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진왕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목 소저가 그 일들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소. 정말 면구스럽구려.”

“진왕 전하의 명성이 워낙 자자하니, 많은 이가 전하의 미담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요.”

목운요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햇빛에 흩날리는 복숭아꽃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진왕은 잠시 얼이 빠졌다.

“진왕 전하, 정자에서 잠시 쉬다 가시죠.”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한 소우의가 옆에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진왕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늘은 소청 부인과 목 소저를 환영하는 연회니, 방해하지 않겠소. 청오의 상처가 회복되었는지 확인하러 왔던 것인데 우연히 목 소저의 이야기를 들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이곳까지 온 것이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소.”

소우의는 멍하게 있다가 급히 인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진왕 전하.”

진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어 보이자 더욱 빛이 났다.

“오늘은 급히 오느라 목 소저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나중에 다시 가져다주겠소.”

“세운 공도 없는데 선물을 받는 건 마땅치 않습니다. 또한 진왕 전화와 저는 친분이 없는 사이이니 주시는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목운요의 거절에 진왕은 잠시 멈칫하다 미소 지었다.

“역시 부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시원시원한 성격이구려. 참 보기 드문 낭자요.”

“과찬이십니다, 진왕 전하.”

옆에 선 소우의의 얼굴은 점차 굳어 갔다.

그동안 소우의는 오라비의 입에서 진왕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오며 그를 향한 마음이 이미 깊어져 있었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의 눈빛이 줄곧 자신이 아닌 목운요에게 향하다니!

한편 또 한 번 체면을 구긴 맹언연은 미쳐 죽을 지경이었다. 목운요를 붙잡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목운요는 아무리 짓눌러도 눌리지 않았다.

진왕과 소청오가 떠나고, 무료해진 목운요가 자리를 뜰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데, 마침 소우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목운요를 본 소우는 두 눈을 반짝이며 목운요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운요 동생,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어서 와요!”

목운요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우 언니가 절 찾으시네요. 부득이하게 먼저 일어나니 부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자의 싸움으로 피곤했던 장완은 목운요가 자리를 뜬다고 하니 한시름 놓였다.

“그래요. 조심히 가요, 목 소저.”

목운요는 소우를 따라 회랑으로 갔다. 사람들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진왕을 향한 증오도 점차 사라지자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소우는 고개를 돌려 목운요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봐요, 애송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지 않아요?”

그에 목운요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애송이는 그쪽 아닌가요? 누구더러 애송이래요?”

“정말이지 배은망덕하네요. 내가 불러 주지 않았으면 목 소저는 아직도 맹언연을 상대하느라 진을 뺐을걸요? 맹언연은 변소에 빠진 돌덩이 같은 사람이에요. 남들은 못 피해서 안달인데, 목 소저는 왜 싸우려고 드는 거예요? 그렇게 구린내를 묻히고 싶어요?”

“싸우려고 한 건 아니지만, 제가 편안한 걸 보기 고까워하는 사람이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소우와 함께 있으니 목운요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 눈앞의 소녀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끝을 향해 가는 걸 지켜봐야 하다니…….

목운요와 소우는 회랑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엔 국화가 줄지어 피어 있었는데, 꽤 운치 있었다.

목운요의 눈이 국화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본 소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 나는 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원래 공연히 시비 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소우는 맹언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건강한 몸이 있었다면 좋은 배필을 찾아 혼인하고, 짝과 함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돌아다녔을 텐데, 맹언연은 인생에 뭐가 그리 불만일까? 왜 툭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걸까?’

소우가 생각에 잠긴 사이, 목운요는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어 국화 잎을 잡아당겼다. 분홍빛 꽃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자 웃음이 피어올랐다.

미소 짓는 목운요를 보며 소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설마 이런 국화를 처음 보는 건 아니죠? 분욱도(粉旭桃)라고 해요. 꽃잎이 분홍 복숭아꽃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랍니다. 국화면 국화지, 왜 복숭아꽃인 척을 할까요? 그냥 편하게 노란 꽃을 피우면 안 되는 걸까요? 괜히 짜증 난다니까요.”

소우가 성을 내는 모습에 목운요는 웃음이 터졌다.

“인간도 모두 제각각이니, 꽃도 그럴 수밖에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예전에 희귀한 국화를 본 적이 있으시대요. 꽃잎이 피처럼 빨갛고 꽃잎의 끝으로 갈수록 황금빛으로 변해서, 날아오르는 봉황의 모습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더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국화에 봉황진우(凤凰振羽)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더군요.”

소우는 호기심 가득한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 국화가 있대요? 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아마 너무 아름다운 꽃이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싫었던 거 아닐까요?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것들은 인연이 닿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법이죠.”

소우는 목운요가 말한 봉황진우라는 국화를 상상해 보다가, 목운요의 웃는 눈을 마주하고는 얼이 빠져 버렸다.

목운요의 두 눈은 투명하고 맑았다. 고요한 두 눈이 너무 맑아서 마치 바닥까지 보이는 듯했다. 그 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목운요는 그런 소우에게 가까이 갔다.

“왜 그래요? 내가 너무 예뻐서 넋이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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