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기회가 찾아오다
“어머님, 어제는 무슨 일이라도 나면 나중에 맹씨 가문의 낯을 어찌 볼까 싶어 저도 모르게 언연이 편을 조금 들었습니다. 하지만 운요가 뺨을 맞은 걸 보고 저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운요가 억울한 걸 알았으면 운요에게 잘 설명은 했느냐?”
“오늘 병문안을 갔습니다. 하지만 운요가 화가 안 풀렸는지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습니다.”
“네가 윗사람이니 사람을 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운요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남지 않도록 다시 가서 잘 말해 보아라. 아직 어린애니 언행에 막힘이 없을 테지. 만약 안 좋은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우리 소씨 가문의 체면만 깎이지 않겠느냐?”
노부인이 담담히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대부인은 곧장 영화원(宁和苑)에서 나왔다. 마치 불 위에 놓여 구워진 것처럼 온몸 구석구석 괴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외손녀가 안타까웠으면 임우함을 시켜 간섭하지 말았어야지. 목운요가 황상을 뵈러 간다고 하니까 그제야 목운요를 좋은 말로 달래려는 것 아닌가? 좋은 일은 노부인이 차지하고 나쁜 일만 내가 도맡게 되었어!’
목운요에게 다시 가서 좋은 말로 알랑거릴 생각을 하니 대부인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시각, 온 마마가 찻잔을 들고 와서 노부인 앞에 두었다.
“노부인, 차 좀 드십시오. 아랫사람들 일로 너무 심력을 소모하지 마시고요.”
노부인은 손에 염주를 굴리며 기도하다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마음속에 흐르는 감정을 감추었다.
“요 몇 년 순풍에 돛 단 것처럼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잘되었는데, 조금만 부주의하니 말썽이 일어나는군. 며칠간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주시하라고 해야겠어.”
“네, 노부인.”
온 마마는 대답한 후 한쪽 옆으로 섰다.
“온 마마, 난 그대의 안목을 믿네. 목운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겠나?”
온 마마가 노부인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얼추 짐작만 한 채 말했다.
“전에 같은 질문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소인은 목 소저가 매우 영민하고 보기 드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영민하다라……. 정말 그렇지…….”
노부인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가에서 맴도는 말을 서둘러 삼켰다. 얼굴빛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조금 이따 약재를 들고 제월각에 가 보게. 내일 황상을 뵈러 입궁할 때 입을 만한 옷은 있는지도 살펴보고. 만약 없다면 우의의 옷을 빌려 입히도록 해. 그리고 궁궐의 규율을 잘 일러 주게나. 궁에서 노여움이라도 사면 안 되니까.”
“네, 노부인.”
* * *
목운요는 침상에 엎드려 다시금 약을 발랐다. 멍은 눈처럼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참혹해 보였다.
소청이 이를 보며 눈물을 떨구었다.
“전 괜찮아요, 어머니.”
“이 어미를 속이려고? 아까 이 공공을 뵐 때 제대로 서지도 못하더니.”
목운요가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지었다.
“큰 억울함을 당했으니 외부 사람 앞에서는 불쌍한 척을 해야죠. 어머니, 아직도 믿지 못하시겠으면 제가 두어 걸음 걸어 볼 테니 한번 보셔요.”
그에 소청이 서둘러 목운요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이 어미는 널 믿는다. 그러니 어서 엎드려 좀 더 쉬어라. 내가 곰탕을 푹 끓여 오마. 그걸 먹으면 좀 더 빨리 나을 거다.”
“뼈를 다친 것도 아닌데 곰탕은 왜요?”
“곰탕을 많이 먹으면 키도 커지고 몸도 튼튼해진단다. 다신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돼.”
목운요는 싱글싱글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어머니. 그럼 많이 만들어 주세요. 저 많이 먹을게요.”
소청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안색을 보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였다.
“알겠다.”
그때, 금란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부인, 소저, 대부인께서 약재를 보내오셨습니다. 몸보신을 위한 귀한 보양식도 같이요.”
목운요는 웃는 낯빛을 싹 거두어들였다. 하나 여기까지 보낸 물건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큰외숙모께서 호의로 보내신 것이니 일단은 받아 둬. 다 나으면 그때 직접 찾아가 감사의 뜻을 표하겠다고 일러두고.”
“네, 소저.”
목운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몽롱하게 잠들었다가, 이내 금란이 다시 들어와 아뢰는 소리에 깼다.
“소저, 온 마마가 왔습니다.”
목운요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입만 열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노부인이 벌써 움직일 줄이야.’
온 마마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주변 장식을 살폈다. 제월각의 원래 꾸밈새보다 지금이 훨씬 아름다웠다.
바닥에는 모란이 수놓아진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마치 구름 위에 선 것처럼 몹시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가구는 모두 정교한 강남 양식으로 바뀌어서 제월각과 특히 잘 어울렸다.
온 마마가 감탄하고 있었을 때 목운요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온 마마, 오늘은 제가 거동이 불편하여 일어나 맞이하진 못하겠습니다.”
온 마마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숨을 죽이고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소인, 아가씨를 뵙습니다.”
목운요는 볼을 팔에 대고 침상에 엎드려 있었는데, 뺨에 남은 보랏빛 멍이 백옥처럼 희고 상처 하나 없는 팔과 대조되어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그 모습에 온 마마는 몰래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맹 소저가 목운요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다. 얼마나 세게 때렸기에 얼굴이 저 지경이 되었을까?
“온 마마, 외할머니께서 시키신 일이라도 있나요?”
“노부인께서는 어제 몸이 불편하셔서 일찍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소저의 일을 오늘 아침에야 들으셨어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가 치미셔서 몸져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십니다. 그래서 노부인 대신 제가 소저를 뵈러 온 것입니다.”
순간 목운요의 눈에 한기가 지나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노부인이 자신의 외손녀를 꽤 아끼고 사랑하는 줄 알 것이다.
“저 때문에 외할머니께서 근심이 많으시겠어요.”
온 마마는 목운요의 얼굴에서 무슨 감정이든 찾아내려고 자세히 관찰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잡아내지 못했다.
“사실 맹 소저의 조부는 당대 왕조의 태사이고, 조모는 청녕의 군주입니다. 하여 사소한 일로 맹씨 가문의 눈 밖에 나서 사이가 틀어지면 우리 소씨 가문은 곤욕을 치르게 될 겁니다.”
온 마마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지만, 목운요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노부인께서 소저께 궁중 규율을 알려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궐내의 사람들은 모두 귀인이니 언행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작은 잘못이라도 하면 질책을 당하실 테지요.”
목운요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온 마마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한시름을 놓았다. 목운요가 삐딱하게 굴며 자신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까 봐 내심 걱정했기 때문이다.
온 마마는 반 시진 동안 목운요에게 궁에서 조심해야 할 점들을 알려 주었고, 입조심을 해야 한다고도 은근하게 전했다. 특히 소씨 가문 후원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황상 앞에서 떠벌리면 안 된다고 했다.
목운요는 조용히 온 마마의 말을 듣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 갈 때쯤 입을 열어 금란을 불렀다.
“온 마마, 고생 많으셨어요. 금란, 온 마마가 쉬다 돌아가시게 다과를 준비해 줘.”
온 마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란 낭자, 그러지 않아도 돼요. 소저께서 아직 몸이 성치 않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셨으니 이만 가 보려 합니다. 소저께선 지혜로운 분이시니 별다른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노부인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사실 노부인은 목운요에게 입궁할 때 입을 옷이 있는지도 물어보라고 했지만, 온 마마는 그것에 대해선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목운요가 경릉성에서 화려하고 고운 옷을 큰 상자 여러 개에 가득 담아 온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입궁에 어울리는 옷이 없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온 마마를 배웅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청이 곰탕을 내왔다.
“요아야, 조금 싱겁게 만들어 보았단다. 짠 음식보다는 싱거운 음식이 상처 회복에 좋거든.”
목운요는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한 상처도 아닌걸요.”
하지만 목운요의 말은 소청에게 통하지 않았다. 소청은 가져온 곰탕 그릇을 목운요의 손에 밀어 넣었다.
“여자아이는 몸과 마음을 모두 아껴야 해. 얼굴에 난 상처 하나라도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다.”
목운요는 수저를 들어 맛을 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으, 맛없어요. 그나저나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에 대한 대우가 이제 완전히 바뀔 테니까요.”
목운요의 말을 들은 소청은 깜짝 놀라 말했다.
“요아야, 설마 정말로 어제 있었던 일을 황상께 아뢰려고 하는 거니?”
목운요는 눈을 깜빡이며 당연하다는 듯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대부인은 맹씨 가문의 위세가 높아서 맹언연이 잘못한 걸 알면서도 그녀를 감쌌어요. 하나 황상이야말로 이번 일에 손쓸 수 있는 분이시죠.”
목운요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많은 돈을 투자해서 명성을 널리 퍼뜨린 것은 모두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서릉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맹언연에게 당하다니……! 이번 일은 반드시 제대로 시비를 가려 풀어야 했다.
“방금 대부인이 보내신 약도 받았고, 온 마마도 널 위로하지 않았니? 그 모든 건 네가 이번에 당한 수모를 참으라는 뜻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황상께 폭로하는 건 지나치지 않을까?”
소청은 불안에 떨며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소씨 가문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이니, 노부인과 대부인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무슨 괴롭힘을 당할지 몰랐다.
“그깟 약재 몇 가지와 위로의 말 몇 마디로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하다니,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