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말이 통하지 않는 소씨 가문
대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소우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 이 일을 엉망으로 처리한 걸 잘 알고 있었다.
“운요야,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말은 마라. 너와 시누가 얼마나 어렵게 우리 집안에 왔는데 어찌 이런 일 하나로 나가겠다고 해?”
대부인은 머리 회전이 빨랐다. 중요한 문제는 피하고 사소한 문제를 공략해 목운요를 달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목운요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밥을 한 숟가락씩 꼭꼭 씹어 먹어야 하듯이, 사건도 차례차례 매듭지어야 하는 법입니다. 일단은 맹 소저가 왜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저를 모함하려 들었는지부터 따져 보시지 않겠어요?”
그 와중에도 맹언연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명문가 규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여봐라, 어서 목욕물을 대령해라! 정말 내 두 다리가 망가져야 말을 들을 것이냐? 돌아가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이 사실을 고하겠다! 두 분이 나 대신 옳고 그름을 따져 주실 것이야!”
목운요는 조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확고하지만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제대로 사실을 말씀하시면 응당 목욕물을 대령하겠지만, 제대로 말씀하지 않으시면 계속 그렇게 참으셔야 할 겁니다.”
“나, 난 그저 너를 혼쭐내 주려고 했을 뿐이야. 찻잔을 네게 엎질러서 뜨거운 맛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러다 되레 내 다리에 엎지르고 말아서 당연히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에 가서 상처를 살펴보니 두 다리가 멀쩡하지 뭐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임 의녀가 갑자기 나를 도와 내 상처가 위중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약까지 발라 주었어!”
소우의는 맹언연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목운요가 시킨다고 저렇게 모든 사실을 까발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히 말을 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까지 말려들 뻔했다.
대부인은 속으로 천불이 나서 맹언연을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언연아, 네가 무례했구나.”
맹언연은 다리가 죽을 듯이 아파서 대부인을 상대할 겨를도 없이, 그저 목욕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사실대로 다 말했으니 물을 가져와! 어서!”
목운요는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다가, 고개를 돌려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큰외숙모, 맹 소저의 통증이 심하니 어서 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리의 약을 씻어 내야지요. 그런데 다리의 붕대는 버리지 마세요. 나중에 물증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임 의녀의 얼굴이 갑자기 새하얘졌다. 임 의녀의 두 눈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목 소저, 저는 맹 소저의 몸에 어떤 나쁜 짓도 한 적이 없습니다!”
목운요는 흥 하고 차갑게 웃었다.
“이번 일로 나뿐만 아니라 맹 소저까지 해쳐 일거양득을 취하려던 것 아닌가요? 당신처럼 의원의 마음가짐이 없는 자를 어찌 외할머니께서 안심하시고 곁에 두시겠어요? 가문에서는 당신을 하루라도 빨리 쫓아내는 것이 좋겠어요.”
임우함은 목운요의 차가운 표정을 보더니 곧장 무릎을 꿇었다.
“목 소저, 소인은 의녀입니다. 다른 하인들보다 의술을 조금 더 알 뿐이지, 사실상 큰 차이는 없습니다. 어떻게 저따위가 감히 먼저 맹 소저께 병을 조작하자고 제안했겠습니까? 맹 소저께서 소인에게 명하시니 저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부인과 소저께서 부디 소상히 밝혀 주십시오.”
임우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본래 그녀는 관아에 속한 노비였다. 과거 소씨 가문의 영감님이 자신의 조부를 아끼지 않으셨더라면 이렇게 편안한 삶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씨 가문에서 쫓겨나 다시 노비로 살아간다면 인생의 말로는 처참할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맹언연에게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다. 맹언연은 맹씨 가문 정실의 딸이니, 오늘 일이 잘못되어 봤자 평판이 깎이는 정도일 터였다.
목운요는 임우함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대부인의 앞으로 갔다.
“큰외숙모, 이제 누가 잘못했는지 확실하게 보셨겠죠? 그러니 부디 공정한 판결을 내리시어 제 누명을 벗겨 주시길 바랍니다.”
목운요의 말이 끝나자 대부인 맹 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실 맹 씨는 아직도 목운요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깟 어린 계집 하나가 소씨 가문의 물을 흐릴 수는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우함은 달랐다. 임우함은 노부인의 곁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녀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잘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다.
“언연, 오늘은 네가 도를 지나쳤구나.”
대부인은 깃털처럼 가볍고 나긋한 목소리로 언연을 나무랐다.
맹언연은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지만 대부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으로 대부인을 쳐다봤다.
“고모께선 언제나 절 예뻐하셨잖아요……!”
“난 당연히 너를 아낀단다. 하지만 옳고 그름은 공평하게 따져야지. 자매 사이에 다투는 건 별일이 아니다. 싸웠다고 너를 나무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넌 분을 못 이겨서 선을 넘었잖니. 다행히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운요를 크게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되었다. 네가 큰 사고를 쳤으면 내가 노부인과 시누의 얼굴을 어찌 보았겠어?”
대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우의가 한마디 거들었다.
“언연은 아이처럼 순수한 동생입니다. 나쁜 마음을 먹고 그리 행동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이에 목운요의 얼굴에 한기가 스쳤다. 그녀의 얼굴에선 어떤 온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녀가 입을 맞춰 이번 일을 그저 자매간의 다툼으로 마무리 짓고 대충 넘어가려 함이 훤히 보였다.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굴던 맹언연도 다리의 통증이 얼추 가라앉자 조금씩 진정되었다. 맹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하긴 했죠. 이번 일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선 이번 사건에서 빠져나가고 나중에 천천히 갚아 주마!’
훤히 보이는 생각에 목운요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맹언연을 비웃었다.
“이번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싶다면 어쩔 건가요? 언연 언니, 어떻게 보상하실 거예요?”
“방금 내가 미안하다고 말했잖아요. 용서는 너그럽게 해야 한다는 거 몰라요?”
‘너그럽게 용서하라고? 하…….’
맹언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목운요는 말문이 막혔다. 조금 전까지 무서운 기세로 사람을 몰아붙이던 맹언연이 아니던가. 그래 놓고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니 목운요에게 용서하라며 따지고 있었다.
목운요는 두 눈을 깜빡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러나저러나 제가 할 말은 변하지 않아요. 이곳에서 공정한 판결이 나오지 않는다면 말이 통하고 도리를 아는 곳에 찾아가 오늘 일을 말하겠어요.”
일순간 녹의 소전각에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대부인은 목운요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체 어떤 든든한 뒷배가 있기에 저렇게 맹랑한 말을 내뱉는 건지 알아낼 요량이었다.
맹언연은 목운요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며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어디 그럼 말이 통하는 곳을 천천히 잘 찾아봐요. 난 피곤해서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네요. 고모, 우의 언니, 나중에 다시 뵐게요.”
맹언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녹의 소전각을 빠져나갔다.
한편 목운요는 올곧고 강인한 모양새로 자리를 지키며, 맹언연이 떠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대부인이 임우함을 향해 말했다.
“오늘 저지른 잘못에 대해선 확실하게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넌 노부인의 사람이니 우선 노부인께 죄송하다고 잘못을 빌어라. 노부인만큼 공평하신 분도 안 계시니 어떤 벌을 내리시든 알아서 잘 따르도록 해라.”
임우함은 마음을 짓누르던 큰 돌덩이를 하나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한시름 놓은 그녀는 대부인께 예를 갖췄다.
“네, 알겠습니다, 부인.”
대부인은 소우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소우의가 일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성가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소우의는 불쌍해 보이는 눈으로 대부인을 쳐다보았다.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퍽 가련해 보였다.
그런 소우의의 모습을 보자 대부인도 마음이 녹아 남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제 딸은 자존심이 워낙 세고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니, 목운요를 혼쭐내려던 것도 이해가 갔다. 질책하려거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목운요를 질책해야 했다.
‘말끝마다 우리는 말이 안 통하니 말이 통하는 곳을 찾아가겠다고? 하! 우리 소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다니. 조운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조운년의 든든한 뒷배인 금 부인의 집안도 널 쉽게 돕진 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부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목운요를 위로했다.
“운요, 오늘 네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넌 예전의 평민이 아니란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 소씨 가문의 얼굴이야. 말이든 행동이든 예전처럼 해서는 안 돼. 맹언연은 맹씨 가문의 적녀다. 언연의 말 한마디면 사, 오품 관원들의 딸이라도 손쉽게 …….”
순간 목운요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요한 두 눈으로 대부인을 응시했다. 그 모습이 마치 값비싼 비취옥 같았다.
목운요의 고요한 시선을 받은 대부인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니, 역시 촌구석에서 자란 아이는 교양이 없었다.
“의원을 불러 네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라고 하마. 이삼 일간은 약을 발라야 상처가 아물 거다. 곧 중추절이구나. 노부인께선 중추절마다 가족들과 함께 모이는 걸 좋아하신다. 말하지 않아도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목운요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보고 배운 게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어요.”
대부인은 목운요가 눈을 내리깔고 저자세로 나오자 그제야 만족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목운요는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