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절대 인정 못 해
목운요는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소우의에게 다급한 눈빛을 보냈다.
“분명히 찻잔은 언연 언니가 똑바로 잡지 못해서 떨어진 거지, 제가 일부러 뿌린 게 아니에요. 우의 언니도 옆에 계셨으니 제대로 보셨겠죠?”
소우의는 가볍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정성스럽게 화장한 눈에 근심 한 가닥이 흘러들었다.
“차에 집중하느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빨리 의원을 불러 언연 동생을 봐 달라고 해야겠네요. 상처라도 남으면 평생 곤란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맹언연의 분노는 한층 거세어졌다. 맹언연은 뒤에 서 있던 시녀를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내 명을 못 들었어? 어서 목운요를 끌고 가서 따귀를 치라니까!”
“네, 소저.”
맹언연의 뒤에 있던 두 명의 시녀가 분주히 앞으로 나가 목운요의 양팔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목운요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게 먼저였다. 대충 계산해 보니 곧 소청오가 올 시간이었다. 맹언연이 소란을 피우겠다니, 기왕이면 크게 한판 놀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 어귀를 본 목운요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죽일 듯한 기세로 목운요를 쫓던 두 명의 시녀는 순식간에 문으로 들어오던 소청오와 부딪혀 뒤엉켰다. 소청오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다.
“엇, 큰 도련님……? 노비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소우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오라비를 맞이했다.
“오라버니!”
소청오의 눈빛은 목운요에게 내리꽂혔다. 눈에는 오만 가지 감정이 용솟음쳤고, 심장은 세차게 뛰었다.
‘어째서 목운요를 다시 만나게 된 거지?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소씨 가문에서!’
목운요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는 창백하게 변했고, 하얗고 고른 치아는 가볍게 입술을 물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자세히 지켜보진 못했지만, 소청오는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사나운 눈빛이 바닥에 무릎 꿇은 두 시녀에게로 옮겨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그에 소우의가 급히 튀어나왔다.
“오라버니는 삼황자와 함께 변경에 다녀오셨으니, 그간 있었던 많은 일을 모르시겠네요. 오라버니가 떠나신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께서 목운요가 외할머니의 손녀라는 걸 발견하셨어요. 운요의 어머님은 바로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우리 고모고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던 소청오는 그 말을 들은 후 더욱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목운요가 사촌 동생이라는 말이냐? 내 동생이라고……?”
그때, 맹언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마침 잘 오셨어요. 오늘 제가 좋은 마음으로 운요 동생을 보러 왔는데, 운요는 제게 적의를 품고 있지 뭐예요? 저를 미워하는 거로도 모자라 제 다리에 뜨거운 차를 쏟아 버렸어요. 이제 제 다리는 영영 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맹언연은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보는 사람도 연민을 느끼게 하는 눈물이었다.
소청오는 맹언연에게 시선을 옮겼다. 과연 맹언연의 치마에는 쏟아진 차의 자국이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산산조각이 난 찻잔이 나뒹굴고 있었다.
“우의야, 어떻게 된 일이냐?”
“저희 세 사람은 원래 차를 마실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운요가 건넨 차가 언연의 다리 위로 쏟아졌답니다.”
목운요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소우의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맹언연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서 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목운요가 일부러 맹언연의 다리로 찻잔을 쏟았다고 믿을 만한 말이었다.
소청오는 목운요를 바라봤다.
“저 말이 사실이오?”
소청오의 질문을 받은 맑은 목운요의 두 눈은 유독 강인했다.
“오라버니께서 생각하시기에 합당한 대로 하세요. 저를 때리든 벌하든.”
맹언연은 비소를 흘렸다.
“청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들으셨죠? 저는 좋은 뜻으로 목운요를 찾아온 거예요. 한데 목운요는 감사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음흉한 방법으로 절 해치려 했어요. 다리에 흉터라도 남으면 전 앞으로 어떡해요?”
소청오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는 몸을 돌려 옆의 시녀를 쳐다봤다.
“너희도 현장에 있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히 말해 봐라!”
소우의는 ‘홱’ 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자신이 상황을 설명했는데, 오라버니가 시녀에게 다시 물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설마 오라버니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한 걸까?
두 시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아까 소우의가 했던 말과 대동소이한 대답을 했다.
“목 소저가 맹 소저께 드릴 때 갑자기 찻잔이 쏟아져서…….”
그에 가만히 있던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시녀들에게 물어본다고 해서 뭐가 나올까요? 저들은 맹 언니의 명을 받고 제게 손을 대려 했어요. 만약 오라버니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지금쯤 바닥에 누워 뺨을 맞고 있었겠죠.”
소청오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아랫것이 감히 소저에게 손을 댈 생각을 해? 너희 같은 것들은 우리 소씨 가문을 시중들 필요 없다.”
두 시녀는 냉큼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었다.
“큰 도련님, 저희는 그저 맹 소저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소청오는 자신의 시종에게 단호히 명을 내렸다.
“저것들의 입을 막고 끌고 가라. 가문에서 나가면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단단히 교육해라.”
“네, 도련님.”
두 시녀는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갔다. 끌려 나가는 시녀들을 본 맹언연은 제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소우의는 남몰래 혀끝을 깨물었다.
맹언연은 계속 소청오를 성가시게 굴었다.
“오라버니, 목운요가 제 다리를 다치게 했는데 벌하지 않을 생각이세요? 여인에게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라버니도 잘 아시잖아요. 이번 일은 반드시 공정하게 처리해야 해요. 만약에 오라버니께서 관대하게 넘어갈 생각이시라면 바로 고모와 고모부를 찾아가겠어요!”
“의원은 불렀고?”
소청오는 소우의에게 물었다.
“네, 지금 오는 길일 거예요.”
“맹 소저, 진정하시오. 우선 의원을 불러 다친 곳을 살펴보는 게 가장 중요하오. 운요가 소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문의 규율을 몰라서 그랬을 거요. 소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우리 소씨 가문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은 용서하고 넘어가 주시오.”
맹언연은 그런 말을 하는 소청오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안 돼요!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아야죠!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잘못을 두둔했어요?”
목운요는 맹언연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를 쏘아봤다.
“맹 소저, 소란을 피우는 것도 정도가 있어요. 그렇게 악을 쓴다고 해서 내가 무서워할 것 같나요?”
“운요!”
소청오가 인상 쓰며 목운요를 나무랐다.
“어서 맹 소저께 죄송하다고 해요.”
“왜요?”
목운요의 말엔 불만이 가득했다.
“맹 소저에게 차를 쏟았다는 이유로 저를 벌하려는 건가요?”
맹언연은 주눅 들지 않는 목운요를 보고 미움과 분노가 점점 커졌다. 결국 자기감정도 조절하지 못하는 수준이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내 다리를 망쳤으니 동생 다리도 망가뜨려 사죄해야죠!”
“언연 동생!”
소우의는 맹언연의 팔을 붙들며 저지했다.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지나친 말이었다.
어쨌든 목운요는 노부인의 외손녀이고, 이제 막 소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두 다리를 망가뜨린다면 오히려 소씨 가문이 비난받을 것이 뻔했다.
안타깝게도 맹언연은 그런 소우의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죽일 듯한 기세로 목운요를 째려봤다.
“소씨 가문에 들어왔다고 해서 신분도 소씨 가문 사람들만큼 높아졌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그저 옷이나 팔고 찻잎이나 파는 장사꾼이라는 것을 명심해요. 썩은 뿌리에 금과 옥을 처발라도 변하는 건 없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언연 동생, 어찌 그리 심한 말을 해요?”
소우의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맹언연이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 굴긴 해도, 그동안 정도를 알아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일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라도 오면 소우의 자신도 함께 벌을 받을지 몰랐다.
소청오의 낯빛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한마디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목운요가 맹언연을 세게 잡아 일으켰다.
“맹 소저, 다리가 망가졌다고 했죠? 좋아요. 그럼 다친 다리를 보여 줘요. 두 다리 모두 정말 다쳤다면 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사죄하겠어요. 하지만 멀쩡하다면 오늘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예요!”
그에 맹언연의 목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목운요, 이 빌어먹을 것! 널 죽여 버리겠어!”
맹언연은 손을 뻗어 목운요를 향해 휘둘렀다.
목운요도 그 즉시 쟁반으로 맹언연의 손을 쳐 냈다.
“난 산골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예의와 지켜야 할 규율은 잘 알아요. 맹 소저처럼 막무가내에 무례한 명문가 규수는 태어나서 처음 보네요!”
맹언연은 쟁반에 맞아 손이 부어올랐다. 손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악! 내 손!”
목운요는 곧장 탁자로 걸어가 찻주전자를 들었다.
“오라버니, 이 찻주전자는 특별 제작해서 반 시진이 지나도 물의 온도를 유지해 준다고 우의 언니에게 전해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소청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가 차를 우려내고 지금까지 이 각이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니 주전자 온도도 크게 변하지 않았겠죠. 보세요, 이런 물로도 화상을 입을 수 있을까요?”
목운요는 말을 마치자마자 찻주전자를 들어 안에 들어 있던 물을 자신의 손에 부어 버렸다.
소청오가 놀라서 찻주전자를 빼앗았다.
그사이 목운요가 물에 젖은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목운요의 희고 보드라운 손에 물방울이 살짝 맺혀 있었다.
소우의와 맹언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찻주전자의 물을 손에 끼얹었는데도 손이 조금 붉어졌을 뿐이었다. 사실 붉은 기색도 굉장히 옅었다.
목운요는 제 손을 휘저었다.
“전 어려서부터 피부가 약했습니다. 조금만 뜨거워도 붉은 상처가 나죠. 정 못 믿으시겠다면 사촌 오라버니께서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목운요의 손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한 소청오는 살며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목운요를 향해 신뢰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직접 주전자를 가져와 그 물을 자신의 손바닥에 부었다.
소우의가 놀라 소리쳤다.
“오라버니!”
손가락에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다. 뜨끈하기는 했지만 이런 온도로는 절대 손이 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