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소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다
* * *
방으로 들어가던 목운요는 마침 하운방에서 돌아오던 소청과 마주쳤다.
“어머니.”
소청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무슨 일이 있니? 표정이 좋지 않구나.”
“아뇨. 그냥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간식이 먹고 싶어져서요.”
목운요가 소청의 어깨에 기대었다. 월왕과의 관계를 끊어 내려 했건만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깊은 곳이 공허했다.
그때, 사금(司琴)이 누군가의 방문을 알려 왔다.
“부인, 소저. 금수원의 영사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멍해진 소청이 정신을 서둘러 차리고는 딸을 나무랐다.
“이 녀석, 손님께서 오신다고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소청은 소매와 치맛자락을 정리한 후 손님을 맞이했다.
월왕은 은빛 자수가 놓인 연남색 옷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준수한 자태는 그 존귀함이 하늘을 찔렀다.
“소청 부인과 목 소저를 뵙습니다.”
목운요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월왕을 보았다.
‘갑자기 어머니를 뵈러 오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녀의 낯빛에 월왕은 마음이 괴로웠다.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은데 그녀는 그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소청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한 채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영 공자, 얼굴색이 유난히 창백하십니다. 혹시 몸이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며칠 전 감기에 걸렸는데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보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돌아가기 전에 부인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직 아프신 몸인데 떠나시려고요?”
“사안이 급하여 지체할 수 없습니다.”
월왕은 말하는 중에도 가벼운 기침을 했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까지 맺힌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어서 앉으세요. 요아야, 네가 의술을 잘 아니 얼른 공자님을 봐 드리렴.”
“네, 어머니.”
목운요가 월왕의 옆으로 다가갔다. 눈빛에는 냉랭함이 돌고 있었다.
반면 월왕은 온화한 모습이었다.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었고, 눈빛이 유달리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럼 부탁하겠소.”
그의 건강 상태야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월왕이 감기에 걸렸다고 말했기에 있는 그대로 소청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며칠 더 몸조리를 하시면 별문제 없을 것입니다. 병세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유의하셔요.”
“고맙네. 부인, 새해를 맞을 적에 진 총관과 저를 초대해 주셨지요. 제가 맞아 본 가장 즐거운 설날이었습니다.”
월왕은 담담히 말했으나,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유달리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청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 나시면 언제든지 기분 전환 겸 놀러 오십시오.”
그에 목운요가 소청을 말렸다.
“어머니, 사야께서는 집안 사정으로 바쁘실 텐데 어찌 짬이 나시겠어요?”
“아뇨. 혈혈단신이라 괜찮습니다. 부친께서 특별히 찾지만 않으신다면 온종일 밖에 있어도 근심할 것 없지요.”
그 말에 소청이 멈칫했다.
“혈혈단신이요? 외람되지만 공자께서는 혼인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가 고개를 저었다.
“여러 일들로 바빴던지라 지금까지 혼자입니다.”
소청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았는지 캐묻고 싶었지만, 이는 주제넘은 질문이었다. 그래서 호기심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고 나서 가정을 꾸리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월왕의 시선이 목운요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눈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할 수 있다면 몇 년쯤 더 기다려도 괜찮지요.”
“정말 보기 드문 생각이십니다.”
소청은 그의 생각을 매우 높이 여겼다. 영 공자 같은 신분이면 보통 삼처사첩(三妻四妾)을 두니 말이다.
그에 작게 웃은 월왕이 미리 준비한 선물을 전했다.
“부인께 드릴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영 공자,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걸 어찌 받겠습니까?”
“이건 제 마음이니 꼭 받아 주십시오. 목 소저가 금수원 관리와 운영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선루가 지금처럼 번창할 수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큰돈을 벌었지요. 제가 떠나도 부인과 목 소저께서 계속 신경 써 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애초에 금수원을 빌려주신 덕분에 저희가 큰 이윤을 낸걸요. 전심전력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목운요의 눈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아깐 내 제안을 생각해 보겠다더니, 어머니 앞에선 계속 협력하자고 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때,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청에게 인사했다.
“시간이 늦었군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리 급히요?”
소청은 사금을 시켜 서둘러 간식거리와 반찬을 싸서, 옆에 있던 우항에게 건넸다.
“가는 길 조심하시고,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건강이 제일이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부인.”
소청은 목운요를 데리고 문밖으로 갔다. 월왕이 말을 타고 떠나는 것까지 배웅하고 나니 마음이 벅찼다.
“영 공자께서는 참 좋은 분이시구나. 집안에 일이 있다는 소식에 병환도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시다니…….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지만 소청의 말에도 목운요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이는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요아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소청의 눈에는 딸의 본심이 보이는 듯했다.
사실 예전에 딸아이가 영 공자의 피풍의를 걸치고 왔을 때부터 그녀는 설마설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이는 그때보다 더 일찍 마음을 품은 것 같았다.
‘그나마 영 공자께서 혼인을 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로구나. 하지만 그런 집안 출신이면서 여태 장가를 안 가시다니, 무슨 지병이라도 있으신 건가?’
그녀는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가 영 공자께 받은 은혜가 정말 커. 요아야, 금수원을 잘 관리해야 한다. 알았지?”
소청의 당부에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 * *
방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진 총관이 찾아왔다. 목운요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를 옆방으로 모시라고 했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진 총관은 따뜻한 미소를 띠고 인사를 건네 왔다.
“진 총관님, 어쩐 일이신가요?”
이에 그가 장부 한 더미를 꺼내 목운요의 앞에 내려놓았다.
“왕야께서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목운요는 미간을 찡그리고는 손을 저어 금란을 내보냈다.
“진 총관님께선 여태껏 저를 정말 많이 도와주셨지요. 그러니 총관님께는 감추지 않겠습니다. 이 장부는 제가 전하께 드린 겁니다. 제 불선루 수익과 왕야의 하운방 수익을 맞바꾸려고요. 이렇게 하면 하운방과 불선루를 분리할 수 있을 겁니다.”
진 총관은 놀란 기색이었다.
“왕야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목운요는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인 일까지 그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소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불선루도 없었을 겁니다. 소저께 정말 감사해야 한다고 왕야께서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떨렸다.
월왕이 자신을 조사한 것은 괜찮았으나, 어머니까지 조사한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간에 그 위험을 감당할 수 없었다.
진 총관이 말을 이었다.
“전 오랜 세월 왕야를 보필했습니다. 왕야께서는 여러 해 동안 월서에 주둔하시면서 매일 전투를 치르셨고, 친구라곤 눈과 바람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 관계에 있어선 항상 서투시죠.”
진 총관은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슬퍼져 눈물을 닦았다.
“표현이 서툴어 항상 오해를 많이 받으시지만, 마음만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소저는 총명하시니 다 알고 계시지요……?”
목 소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에 그는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목 소저, 저는 일개 신하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주제넘은 말을 하겠습니다. 어떤 점이 소저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왕야께선 절대로 소저에게 악의가 없으십니다.”
그러자 그녀가 장부에 손가락을 얹으며 살며시 웃었다.
“진 총관님, 괜한 염려세요. 제가 어찌 감히 왕야께 화를 내겠어요? 그저 별로 도운 것도 없이 불선루 이윤의 사 할이나 가져가자니 염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진 총관이 재빨리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불선루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소저의 총명함 덕분이었습니다. 아직도 소저께서 도와주실 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또 다른 장부 두 권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회안성과 양주성에서 온 장부입니다. 개업한 지 한 달여 만에 장사가 크게 성했지만, 그만큼 많은 시샘을 샀습니다. 누군가는 신선한 찻잎을 모두 사들여서 가격을 올려 버렸습니다.”
진 총관의 말에 목운요의 미간이 찌푸려지는데, 마침 소청이 방으로 들어왔다.
“진 총관께서 오셨다기에 한번 뵈러 왔습니다. 마침 집에서 새로 다과를 만들었어요. 괜찮으시면 불선루에 한번 들여 보시는 게 어떨까요? 조금이나마 손님을 끄는 데 보탬이 될 것 같아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소청에게 예를 올렸다.
“부인께서 수고가 많으십니다.”
소청이 보기에 진 총관은 인상이 참 좋았다. 그녀는 그의 인사에 고개를 저었다.
“사금을 시켜 조리법을 적어 드릴게요.”
“돌아가면 자세히 연구해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소청은 목운요에게 말했다.
“요아야, 불선루 일을 절대 게을리해선 안 돼.”
간절한 눈빛의 진 총관을 보자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어머니. 장부를 꼼꼼히 살펴보고 대책을 강구해 볼게요. 총관님, 방도가 생각나면 금수원으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 부탁드립니다.”
진 총관은 몹시 기뻐하며 분주히 일어나 인사했다.
“그러면 더 이상 두 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목운요도 일어나려 하는데, 소청이 한 발 더 빨랐다.
“요아야. 다과에 관해서 의논도 할 겸, 진 총관님은 내가 배웅해 드리고 올게.”
목운요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소청은 문을 나선 후였다.
사실 소청은 월왕에 대해 더 알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한 가운데, 마침 진 총관이 먼저 화두를 던져 주었다.
“저희 공자님을 위해 떡과 음식을 준비해 주신 것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항이 곁에서 시중들긴 하지만, 그놈은 세심하지 못하여 사람을 돌보는 데 지극히 소홀하거든요.”
소청은 이를 듣고 약간 놀랐다.
“그럼 공자님 곁에 시녀를 두시면 좋을 텐데요.”
진 총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공자님 성정이 유달리 차가워야지요. 남들이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하신답니다. 그런 연유로 혼담도 모두 퇴짜를 놓으셨지요. 나이가 벌써 스물하고도 하나이신데, 곁에 시중드는 시녀조차 없으니 다들 그분께 무슨 지병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공자님은 그저 마음 맞는 여인 한 명을 찾아 평생 함께하고 싶어 하시지요. 만약 찾지 못한다면 홀로 외롭게 살다 돌아가실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