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현생이 중요하다
“…….”
월왕은 마음속이 혼란해졌다. 본래 의도는 목운요와 더 가까워지려는 거였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목운요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이었다.
“절 죽이지 않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일순간 월왕의 온몸에서 한기가 뻗쳤다. 두 눈에는 감정이 거칠게 용솟음치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였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스레 다가가려 노력했다.
이에 목운요도 차츰 그의 앞에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제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그녀가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진 총관은 월왕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왕야……. 목 소저의 얼굴빛이 안 좋던데, 혹시 목 소저의 몸이 편찮은 겁니까?”
순간 월왕의 온몸을 휘감던 냉기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진 총관, 일전에 말한 장신구는 골라 놓았나?”
“네.”
“그럼 사람을 시켜 운요에게 보내게.”
“저…….”
진 총관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직접 주지 않으시고요?”
월왕은 잠시 침묵했다. 마치 마음속에 타오르던 불씨에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온몸에 추위가 엄습했다.
“내가 무언가 실수한 것 같네.”
진 총관은 월왕의 낯빛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챘다. 보아하니 목운요와 싸운 것이리라. 젊은 시절 사랑 때문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왕야, 제가 소상히 알지는 못하나 책에서 본 대로 한마디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집요한 진심을 가진 남자는 통한다고 했습니다. 목 소저는 지금 소 부인과 단둘이 의지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왕야와 신분 차이도 크니 아직은 태도가 방어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약 왕야께서 목 소저를 진심으로 마음에 두고 계시다면 좀 더 인내심을 가지는 게 좋을 거라 사료됩니다.”
저도 모르게 월왕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진 총관, 평상시에 그리 바쁘면서 소설 읽을 시간도 있었소?”
“가끔씩 읽지요. 많은 걸 배울 수 있답니다.”
진 총관은 황망히 웃으며 대답했다.
월왕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진 총관은 사람을 불러 머리 장신구가 든 상자를 가져왔다.
“왕야, 장신구는 여기에 두겠습니다. 시간 나실 때 목 소저에게 전해 주시지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물러났다.
월왕은 상자를 열어서 그 안에 가지런히 놓인 머리 장신구를 보았다. 새하얀 비녀가 반짝반짝 윤이 났다. 흠잡을 데 없는 이 비녀는 목운요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 * *
며칠 후, 이원일이 양주성의 소금세 조사를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양주성의 소금세 비리가 까발려지다 보니, 제명도 자연스레 이원일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었다.
목운요는 육냥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분부했다.
“이 서신을 제명에게 전해서 이원일이 읽게 하라고 해. 대황자님의 필적으로 쓴 거야. 이원일이 이걸 보면 제명의 종적을 지울 수밖에 없겠지.”
“네.”
그때, 문밖에서 소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운요는 서둘러 육냥에게 말했다.
“얼른 가 봐. 어머니께서 보시면 걱정하실 테니까.”
육냥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청이 안으로 들어왔다. 목운요는 얼른 몸을 일으켜 어머니를 맞이했다.
“어머니, 오늘 웬일로 이리 일찍 오셨어요?”
최근 목운요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이후로, 소청은 하운방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아이 곁에 있으려 했다.
“요아야, 내가 질문이 많은 성격은 아니다만, 네 안색을 보아하니 마음에 번뇌가 있는 것 같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에이, 어디가요? 괜한 걱정이세요.”
“날 속일 생각은 마라. 자식 얼굴만 봐도 부모는 다 아는 법이란다. 어릴 적부터 네게 고민이 있는지 없는지는 딱 보면 다 알았어.”
소청은 걱정스레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전에도 한동안 이렇게 기분이 안 좋다가 며칠 지나니까 괜찮아진 듯싶었는데, 요 며칠 전부터 다시 안색이 안 좋잖니. 예전보다 더 낯빛이 어두워졌구나. 도대체 무슨 일인 게야.”
목운요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사야가 어떤 사람인 거 같으세요?”
소청은 목운요가 영 공자의 피풍의를 걸친 채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 기억났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 설마…… 영 공자를 맘에 두고 있는 거니?”
목운요는 황망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무슨 소리세요? 그럴 일은 없어요!”
아이가 저리 다급하게 반박하는 걸 보니 소청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리 크게 반응하고 그래?”
목운요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손바닥에 통증을 느꼈다. 아까 전에 생긴 상처 때문이었다.
“그냥 어머니 말씀에 놀랐을 뿐이에요. 어찌 제가 그분을 좋아하겠어요?”
소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보다 훨씬 존귀하신 분이잖니. 분명 첩실도 따로 있으실 거야. 요아야, 절대 이상한 생각 마라. 너에게 안 좋을 뿐이야.”
목운요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께서 월왕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단 걸 알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머니,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요. 전 평생 어머니만 모시고 살 작정이거든요.”
목운요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봐도 다른 이상한 느낌은 없자 소청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는. 이 어미와 어찌 평생을 함께하겠니? 네가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
목운요는 그런 소청의 어깨에 기대었다.
“어머니께선 어떻게 아버지께 시집가셨어요?”
“네 아버지와는 우연히 알게 됐단다. 산에서 장작을 베다가 발을 헛디뎠는데, 그때 뒷산에서 약재를 캐던 네 아버지를 만난 거지. 네 아버지가 날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자연스레 혼인을 하게 된 거란다. 특별한 거 없어, 뭐.”
목운요는 고개를 들어 소청의 얼굴을 보곤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특별한 게 없다면서, 왜 아버지 얘기를 꺼내니 웃음꽃이 가득 피셔요?”
소청은 제 입가를 어루만졌다.
“네 아버지만 생각하면 이렇게 웃음이 나는구나. 지금 이 세상에 없어도 내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 계시거든.”
“만약 아버지께 시집가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게 사셨을 수도 있잖아요. 오랫동안 할머니께 구박받지도 않고 말이에요. 후회한 적 없으세요?”
소청은 애정 가득한 눈으로 목운요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바보 같긴.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니? 비록 시어머니께 구박받긴 했지만 네 아버지만큼은 내게 참 잘해 주었어. 게다가 이렇게 예쁜 우리 딸이 생기지 않았니? 그러니 어디가 불만이겠어?”
“어머니, 만약 시집가시기 전에 할머니가 그렇게 못살게 굴 걸 아셨더래도 아버지를 선택하셨을 거예요?”
“난 진작 알고 있었단다.”
“이미 알고 계셨다고요?”
목운요는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 네 할머니는 온 동네에 악명이 높았거든. 그래서 시집가기 전에 날 말리는 사람도 꽤 되었지. 한데 날 아껴 주는 네 아버지를 보니 그리 걱정은 들지 않았단다.”
소청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일었다.
목운요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기면서도 자꾸 속으로는 월왕과 비교하게 되었다.
회귀 전의 자신은 월왕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런데 계속 그와의 관계를 이어 나가도 될까?
“요아야?”
그녀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소청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부러워서요.”
“넌 아직 어리니까 사랑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할 거 없어. 시집갈 때가 되면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도 늦지 않아. 지금은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내는 것으로도 충분해.”
소청은 가슴이 칼에 베인 것처럼 아려 왔다. 회귀 전 딸아이가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게 생각났던 것이다.
목운요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남몰래 자책했다.
‘다 내 탓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어머니께 심려를 끼치다니……’
“네, 어머니 말씀대로 할게요. 현재의 삶을 누릴게요.”
소청은 목운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딸을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요아야, 이 어미가 무능해서 네 짐을 덜어 주지도 못하고 자꾸 부담만 주는 것 같구나.”
목운요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소청은 제 말을 끝까지 들으라는 듯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지금의 넌 회귀 전과는 전혀 달라.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황상께서도 상을 내리지 않으셨니. 아무리 소씨 가문이 횡포를 부린다 해도 우리에겐 어느 정도 자본이 있어. 나도 서릉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게. 전생은 교훈 삼고, 현생을 중대사로 삼으라고 했다. 그러니 이미 일어난 일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진 말자꾸나.”
목운요의 큰 눈이 잘게 떨렸다. 복잡했던 마음이 일순간 사라지는 듯했다.
“네, 어머니.”
소청을 한참이나 끌어안고 있던 목운요는 어머니에게 같이 자자고 졸랐다.
소청은 윤이 나는 목운요의 이마에 콩,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언제 이렇게 응석받이가 됐대?”
목운요의 아리따운 얼굴에 복사꽃처럼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어머니 앞에선 전 늘 응석받이인걸요!”
“아이고, 이렇게 당당하기까지!”
“헤헤.”
* * *
단잠을 자고 난 다음 날, 목운요는 일찍이 일어났다. 창밖의 밝은 태양을 마주하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소씨 가문이 여길 찾아올 날도 머지않았다. 그러니 한낱 감정에 소모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월왕이 진왕처럼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미 죽음의 길을 걸어 본 그녀였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어!’
아침밥을 다 먹은 뒤, 목운요는 소청을 따라 하운방으로 갔다.
최근 양주성의 소금세 건으로 바빠 하운방을 살피지 못했다.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으니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했다.
소청은 목운요가 정신을 차린 걸 보고 안도했다.
“요아야, 하운방 맞은편에 있는 습보헌(熠宝轩) 가게 봤니? 거기서 파는 머리 장신구가 참 예쁘더구나. 오후에 무슨 일 없으면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
목운요는 습보헌을 슬쩍 살펴보았다. 하운방에 놀러 오는 부인이나 소저들이 보통 습보헌까지 구경 가곤 했다. 그들에게 옷이나 장신구는 언제나 부족한 것이었으니까.
“전 좋아요.”
습보헌도 자신의 가게라는 얘기를 어머니께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충분한 비밀만이 완벽한 퇴로를 보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