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천오백만 냥
“으응? 이게 무슨 뜻이지?”
“천오백만 냥을 내놓으라는 건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수작이야? 가산을 탈탈 털어도 천오백만 냥이 안 되는데!”
서신을 살펴본 오민지의 눈가가 연신 파르르 떨렸다.
“여러분, 서신의 내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뇨?”
“상대는 가격만 말하고 우리에게 소금을 얼마나 팔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신을 보낸 시기가 참 묘하지 않습니까? 이걸 보고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는 겁니까?”
계산 빠르기로 유명한 소금 상인들은 숨은 뜻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수령의 말은, 우리에게 서신을 보낸 자가 염운선을 훔쳐 간 자라는 것이오?”
“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펄펄 끓고 있는 기름에 물을 뿌린 것처럼 방 안의 분위기는 폭발 직전을 연상시켰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구려. 우리의 염운선을 훔쳐 간 이는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우리의 것을 되팔려는 게 분명하오!”
“우리 것을 훔친 것도 모자라, 우리를 상대로 비싸게 되팔려 해?! 이게 물 먹이려는 게 아니고 뭐겠소!”
“비겁한 놈!”
“오 수령, 이자를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오민지는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뱉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당해 주는 수밖에요.”
씩씩거리던 소금 상인들은 오민지의 말에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상대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걸 안다고 해도 달리 맞설 방법이 없지 않은가. 소금을 사지 않고 버틴다면 머지않아 이 소문이 황상에게도 닿을 거다. 진노한 황상이 사건을 조사하라는 황명을 내린다면 목이 달아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우리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게 문제 아니겠소!”
소금 상인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제명에게 건넨 돈만 천만 냥이나 됐으니 수중에 돈이 남아날 리 없었다. 대체 어디서 그만한 돈을 구한단 말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오민지가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또다시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목이 달아나면 복수니, 기회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뭐가 더 중요한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씨, 위씨, 조씨 가문에서 각각 이 할의 자금을 마련할 테니 나머지 사 할은 다른 분들이 책임지고 마련해 주십시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상대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분해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소금 상인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위씨 가문의 위기와 조씨 가문의 조병(曹柄)이 남았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세 사람은 기탄없이 말을 꺼냈다.
“오 수령, 어찌 된 일인지 잘 알고 계시겠죠?”
오민지가 주먹을 꽉 쥔 채로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번 일은 모두 제명의 짓입니다. 아니, 따지자면 대황자의 짓이겠죠!”
“어찌 이렇게 사람의 뒤통수를 친단 말이오! 제명을 우리 무리에 잠입시킨 뒤 소식을 캐서 염운선을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소문까지 퍼뜨려 우리를 겁박하다니! 어디 그뿐이오? 훔쳐 간 소금을 되팔겠다고 하다니…….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조여 오는 걸 보니 우리를 탈탈 털어 가기로 작정을 한 거 같소이다!”
조병의 말에 위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중요한 건, 덫을 놓은 자가 누군지 알아도 맞설 방도가 없다는 거요.”
“하아, 잘못 놓은 한 수 때문에 다 지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자만했던 탓이죠……. 애초부터 우리 돈으로 세금을 메우려 했다면 이런 사달은 안 났을 텐데…….”
“오 수령, 자책할 것 없소이다. 강남 소금 상인의 힘이 아무리 커 봤자 대황자 앞에서는 새 발의 피 아니겠소이까? 지금 내 걱정은 그게 아니오. 대황자가 우리를 쥐어짜 놓고는 또다시 비수를 꽂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오. 우리에게 돈을 빼 간 뒤에, 다른 소금 상인을 앞세워 강남의 소금 사업을 장악한다면 강남은 대황자의 세상이 될 것이오!”
“가만히 당할 수야 없지! 대황자가 우리를 통으로 먹으려 든다면 이쪽에서도 죽기 살기로 덤비는 수밖에!”
위기와 조병의 말에 오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말이 맞습니다. 돈만 가져가면 그뿐이지만, 우리를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이라면 우리도 배수진을 치는 수밖에요. 모든 증거를 황상에게 올린다면 천하의 대황자라고 해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좋소이다!”
위기와 조병은 오민지의 제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일개 장사치로 강남에서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혜와 담력 덕분이었다.
대황자가 자신들의 목을 노린다면 이쪽에서도 가만히 당해 줄 수만은 없다. 대황자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상처라도 입힐 수 있다면 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다.
오민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은자를 마련해야 합니다.”
“옳습니다!”
다른 소금 상인들은 은자를 모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들에게는 그렇게 골치 아픈 문제는 아니었다. 방법이야 널려 있었다.
* * *
그 무렵, 제명은 목운요로부터 서신 한 통을 받았다.
“소금 상인들이 돈을 마련하려고 판 자산을 인수하라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명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목 소저의 수완과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명은 그녀에게 건네받은 은표로, 소금 상인들이 내놓은 최고급 장원, 토지, 점포 등을 사들였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온 매물이라서 수십만 냥은 아낄 수 있었다.
그렇게 소금 상인들이 천오백만 냥을 모으는 데 성공하자, 월왕은 사람을 보내 소금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리고 며칠 뒤, 천오백만 냥의 돈이 월왕의 손에 떨어졌다.
* * *
경릉성에서 소금세 조사 업무를 마무리한 이원일은 이틀 전 울며 겨자 먹기로 양주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경릉성에 더 머물며 목운요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소금이 모래로 바꿔치기됐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황상께서 진노하셔서 멸족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데 양주성으로 향하는 길에, 익명의 서신을 한 통 받았다. 서신에는 소금을 구입한 관리가 모래와 소금을 바꿔치기해서 폭리를 취한 일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심지어 훔친 소금을 숨겨 둔 장소까지 적혀 있었다.
이원일은 양주성의 나루터에 내리자마자 관리가 소금을 숨겨 뒀다는 곳으로 향했다. 서신에 쓰인 대로, 창고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소금이 가득했다.
이원일을 따라온 양주성의 관리들은 창고 가득 쌓여 있는 소금을 발견하곤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원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곤, 양주 염운사 손동(孫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 염운사,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네?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대량의 관염을 사들인 뒤, 모래와 바꿔치기해서 염운선을 서강에 침몰시키다니! 진짜 소금은 여기에 숨겨 뒀다가 사태가 일단락되면 시장에 내다 팔아 폭리를 취하려 하지 않았더냐? 다행히 본관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덕분에 네놈의 음모를 밝혀낼 수 있었다!”
“이 대인, 소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옵니다!”
“흥, 즉시 조정에 네놈의 비열한 술수를 고발하는 상주문을 올릴 것이다. 황상께서 네놈을 서릉으로 압송하라 하실 테니 목 닦고 기다리고 있거라!”
염운사 손동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이원일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인 거다. 자신을 빌미로 소금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그는 진실을 밝혀냈다는 공로를 쌓으려 하는 것이다.
“이 대인, 함부로 모함하지 말고 증거를 내놓으십시오!”
“이번 일은 내가 철저히 밝혀낼 것이다. 증거 역시 황상께 올릴 것이니 네놈은 빠져라! 여봐라, 손동을 당장 압송하거라!”
* * *
이원일은 염운사 손동을 투옥한 뒤 그의 휘하 관리들을 전부 잡아 가뒀다. 그리고 사건의 정황을 담은 상주문을 황상에게 올리는 한편, 밤새 죄인들을 심문해 증거를 확보했다.
서릉으로 전달된 상주문은 곧장 황제의 앞에 놓였다. 그 내용을 확인한 황제는 크게 진노했으나, 제때 소금을 되찾아온 덕분에 큰 손실을 피할 수 있다는 내용에 화를 가라앉혔다.
얼마 뒤, 이원일은 양주성 소금세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황명을 받았다.
성지를 받은 그는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누가 서신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놀란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있던 중, 소금 상인 오민지가 뵙기를 청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강남 소금 상인이라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통째로 삼키려면 그 정도 수고야 기꺼이 해 줄 의향이 있었다.
* * *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오민지는 답답했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대황자와 이원일은 자신들을 놓아줄 생각인 듯했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이원일은 오민지의 기색을 살피며 반갑게 맞이했다.
“오 수령, 어서 오시오. 요새 소금세 문제로 계속 바빠서 이제야 보는구려.”
“사건을 조사하느라 고생이 많으실 듯하여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기쁘게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오민지가 이원일에게 상자를 하나 건넸다. 상자를 열어 본 이원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 수령께서 강남의 소금 사업을 잘 관리해 주고 계셔서 참으로 다행이오.”
“과찬이십니다. 이번 일은…… 대인께서 잘 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이원일은 누군가에게 밀서를 받아서 숨겨진 소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오민지 역시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일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저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보니 터놓고 이야기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본심을 숨긴 채 한 시간 가까이 의례적인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