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목적 달성
“후후, 급한 공무인 듯하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제가 다시 대접하겠습니다.”
“좋소, 그리하기로 약조한 것이오.”
이원일은 생각할수록 이목년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이목년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이 승상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흘러 들어갈 터였다.
“예, 제가 배웅하겠습니다.”
* * *
이원일이 떠난 뒤, 목운요는 인감을 들고 서재로 빠르게 돌아왔다.
진 총관이 꺼내 놓은 상자에는 이원일의 필체로 미리 써 놓은 첩자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목운요는 인감을 꺼내 모든 첩자에 도장을 찍은 후 인주를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는 향낭에 넣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의에게 건넸다.
“절대로 이원일에게 들켜선 안 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저.”
우의는 향낭을 받아 들고선 재빨리 금수원을 빠져나가 이원일을 쫓아갔다.
* * *
이원일은 기분이 상한 채로 말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끼어든 마차로 인해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길가에 늘어선 좌판들도 뒤집어지면서 일대에 큰 소란이 일었다. 당황한 이원일이 말을 진정시키고 내리려는 순간, 말이 지나가던 아이를 들이받고 말았다.
자신의 품으로 떨어진 아이를 잽싸게 안아 든 이원일의 눈에 멀리서 달려오는 관병들이 보였다.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얼른 말을 죽여라.”
“예, 대인.”
그때 한 여인이 달려와 이원일에게 연신 절을 올렸다.
“나리,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원일은 품 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여인에게 건네주며 조심하라고 일렀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리처럼 좋은 분은 큰 복을 받으실 겁니다!”
“아이를 어서 의원에게 데리고 가게. 방금 입은 상처가 클지도 모르니.”
“예,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여인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근처의 인선당으로 향했다.
인선당에 도착하자, 여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잽싸게 뛰어내리더니 향낭을 우의에게 건넸다.
“대인, 향낭을 바꿔치기했어요. 저 아저씨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요.”
“수고했다. 이 돈을 들고 밤새 말을 달려 회안성으로 가거라. 그곳의 불선루를 찾아가면 사람들이 알아서 챙겨 줄 거다.”
“예, 대인.”
* * *
금수원 안, 우의로부터 모든 일이 순조롭게 끝났다는 보고를 들은 목운요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인장이 또렷이 찍힌 첩자를 상자에 넣은 그녀가 육냥에게 건네며 양주성으로 가라고 일렀다.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목운요는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저희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예요.”
“이게 네가 생각한, 소금 상인들에게서 은자를 쥐어 짜낼 방법인 건가?”
지난번에 목운요는 훔쳐 낸 소금을 팔아서 번 은자는 한 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소금 상인들에게서 은자를 따로 쥐어 짜낼 방법이 뭔지 줄곧 궁금했었는데, 지금 상자에 곱게 들어 있는 첩자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웃음을 터뜨린 목운요의 눈빛이 짓궂게 변했다.
“강남의 소금 상인들은 돈이 넘쳐난다고 들었어요. 매년 뱃놀이를 한답시고 쏟아붓는 돈이 경릉성 백성이 몇 년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랍니다. 그런 자들에게 몇 푼 뜯어내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요?”
“그래도 각별히 조심하거라. 네가 직접 나설 것이 아니라 제명에게 맡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소금 상인들을 과소평가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었다. 월왕이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무방비한 덕분이었다. 그들이 마음먹고 덤빈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목운요는 월왕에게 인사를 고한 뒤 서재에서 물러났다.
* * *
목운요가 떠난 곳에서 월왕은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원일이 금수원에 들락거리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잔뜩 가라앉은 월왕의 눈빛에서 뼈를 에일 듯한 한기가 쏟아졌다.
이원일의 성격으로 보건대 목운요에게 흑심을 품었으니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들이댈 게 뻔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살기가 솟구쳤다.
우의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확실히 손써 두겠습니다.”
왕야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다리 하나 정도 부러뜨려도 괜찮을 거다.
“그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주변의 한기가 누그러졌다고 판단한 진 총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왕야, 불선루를 통해 강남 곳곳에 우리 사람을 심어 뒀습니다. 이러저러한 소식이 잔뜩 들려오고 있는데, 대황자 능왕에 관한 소식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강남으로 서서히 세력을 키우려는 것 같은데, 나서서 막아야 할까요?”
“그럴 필요 없다. 당분간은 정체를 숨기는 게 좋다. 안 그러면 우리의 기반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어. 이번에 운요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성을 잃은 소금 상인들이 진상을 밝혀내려 하겠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사건의 배후에 대황자가 있다는 심증을 심어 줘야 한다.”
“예, 왕야.”
* * *
양주성 안, 심각한 표정의 소금 상인들이 오부에 모여들었다.
“오 수령, 이번 사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조사해야 하오! 염운선에 실은 소금만 천만 냥에 달해 큰 손해를 입었소이다!”
“그깟 돈이 뭐라고. 이번 사건이 밝혀지면 강남에 우리 모두가 다신 발도 붙이지 못할 거외다!”
“대체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오민지는 구겨진 미간을 애써 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을 써도 소용없을 겁니다. 사실이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 눈에 관염은 이미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니까요. 소금세 장부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양강총독을 적당히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말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구려! 게다가 우리 소금을 훔쳐 간 자들이 혹시라도 이 일을 밖에 떠벌린다면 어찌해야 할지…….”
“흥, 소금을 팔면 천만 냥은 족히 될 겁니다. 염운선을 훔친 걸 보면 돈 때문인 게 분명한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관아에 내놓기야 하겠습니까?”
“오 수령의 말이 맞소.”
“일리 있는 말이구려.”
무거운 마음으로 오부를 나선 소금 상인들은 얼마 뒤 춘풍원(春風苑)에 와 달라는 첩자를 동시에 받았다. 춘풍원은 양주성에서 노래와 음악으로 정평이 나 있는 기루였다.
한데 그런 곳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대체 뭐란 말인가?
평소 같으면 무시하고 말았을 테지만 첩자 아래 찍힌 인감을 보곤, 오부로 다시금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첩자에 날인된 인감을 보니 양강총독 이원일의 것이 분명합니다. 저녁에 다 같이 춘풍원에 가 보도록 합시다.”
“오 수령, 설마하니 염운선을 도난당한 일이 외부에 알려진 건 아닐 테지요?”
오민지도 막막한 기분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일단 춘풍원에 가 본 뒤에 대책을 의논하도록 합시다.”
* * *
그날 저녁, 소금 상인들이 무리를 지어 춘풍원으로 향했다. 평소 시끌벅적하던 춘풍원은 어쩐 일인지 유난히 고요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른 채로 방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기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선생?!”
방 안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한 건 다름 아닌 제명이었다!
“대인들을 뵙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곳으로 여러분을 모신 건 중대한 사안을 다루기 위한 것이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오민지의 눈가가 분노로 팽팽해졌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듯 차분히 가라앉았다.
“제 선생, 자네가 양강총독의 사람인 줄은 예상도 못 했소.”
그 말에 제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던 시녀들에게 차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소금 상인들은 지금의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지난번 제명이 귀한 선물을 들고 오부를 찾아왔을 때만 해도 그저 뒤를 봐주는 사람을 믿고 소금 장사로 돈이나 벌려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아하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명은 입을 굳게 다문 사람들을 쭉 살피며 한숨을 뱉었다.
“이번에는 정도가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모두를 대신해 오민지가 입을 열었다.
“제 선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오 수령, 계속 그렇게 모른 척하실 겁니까? 얼마 전, 소금을 나르는 관아의 염운선이 강에 가라앉은 사건을 모르시진 않겠죠?”
오민지는 태연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일이라면 우리도 알고 있소이다. 듣자 하니 소금의 양이 꽤 많았다고 하던데…….”
“오 수령의 말씀은, 이 일에 대해서 저와 상의할 준비를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지요?”
“제 전생의 말씀이 뭔지 모르겠소이다. 대체 뭘 상의해야 한다는 건지…….”
“그렇다면 괜한 걸음을 하셨군요. 나중에 사죄의 뜻으로 선물을 보내 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말을 마친 제명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오민지가 문을 나서려는 제명을 쫓아갔다.
“제 선생, 잠시 기다려 보시오. 우리 이러지 말고 말로 합시다, 말로! 조정에서 소금세를 조사하려는 중요한 상황에서 우리끼리 싸워 봤자 무슨 소득이 있겠소!”
제명은 뒤돌아서서 방 안을 스윽 둘러봤다.
“여러분이 궁지에 몰린 것 같아 도와 드릴까 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절 못마땅하게 여기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봤자 나중에 난처하게 될 건 제가 아니라 여러분일 테니까요.”
“제 선생,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그러지 말고 우리 잘 이야기해 봅시다.”
다른 소금 상인들도 제명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