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25화 (125/442)

125화 월왕의 질투

이원일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솔직하시군.”

“두 분 앞에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이리 이야기하지 않아도 두 분께선 눈치채셨을 겁니다.”

목운요가 찻잔에 뚜껑을 덮은 뒤 이원일에게 공손히 내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원일은 또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찻잔을 내려놓느라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에선 그 흔한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목운요가 몸을 살짝 숙이니, 은은한 향기가 슬며시 밀려 들어왔다.

그 향을 좀 더 자세히 맡으려고 다가가던 이원일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당황해서 몸을 물렸다.

이목년은 그 모습을 발견하곤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숙부님.”

퍼뜩 정신을 차린 이원일은 목운요가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살피는 것을 보곤 크게 당황했다. 하마터면 미인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뻔했다.

“목 소저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되어 꽤나 흥분했나 보오.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무례라뇨?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목운요는 고개를 저은 뒤, 이목년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소저의 호의를 경릉성 전체에 알리려면 큰 도움이 필요합니다. 십만 냥을 양식으로 바꿔 백성에게 나눠 주는 일 또한 쉽지 않을 테니까요.”

거기에 대량의 양식을 운송하는 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 터였다.

“그래서 이 대인께 도움을 청하러 온 겁니다. 지난번 죽을 나눠 준 일은 의부님과 의모님께서 도와주신 일이랍니다. 전 그저 돈만 냈을 뿐이에요. 이 대인께 구체적인 방도가 있다면 관저로 은자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보고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구체적인 방도를 세우고 함께 상의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목년의 제의에 목운요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야 그래 주시면 더 바랄 게 없죠. 그럼 부탁드립니다.”

목운요의 맑은 얼굴을 보며, 이원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목년은 그런 이원일의 표정을 잽싸게 잡아냈다. 불선루가 아니었다면 대놓고 호통을 쳤을 거다. 숙부라고 하지만 이목년의 눈에 비친 이원일은 미색만 밝히는 어리석은 늙은이였다.

목운요는 시집갈 나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일 뿐만 아니라, 쉽게 건드릴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전 이만 물러갈 테니 천천히 이야기 나누다 가세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원일의 모습에, 이목년이 잽싸게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목운요가 나가자, 이목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숙부님, 목운요는 황상께 재차 상을 받은 데다 조운년 내외와 결의를 맺었습니다. 게다가 하운방과 불선루를 다스리고 있으니 그 영향력은 명문가의 규수 못지않은 셈이죠. 총명하고 계산도 빠른 편이라 쉽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든지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목년, 말이 좀 지나친 것 같군. 난 대황자의 외숙이니 황실의 친척이라고 볼 수 있다.”

“숙부님의 연세라면 목 소저의 아버지뻘 되는 셈입니다!”

그 말에 이원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더 이상 자네 말을 들어 줄 수가 없겠군!”

“숙부님, 이번에 경릉성을 찾은 목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을 그르친다면 아버님께서도 도와 드릴 수 없을 겁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 보도록 하죠!”

이목년은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향했다. 그 뒤를 이원일이 불편한 표정으로 따랐다.

* * *

서재에 들어서자, 무릎을 꿇고 있는 명음이 보였다. 새하얗게 질려 가는 명음을 보며 목운요는 월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명음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이 일은 명음 소저 탓이 아니에요. 이목년이 갑자기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임무는 분명 성공했을 거라고요. 명음 소저, 얼른 일어나요.”

명음이 목운요를 향해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올렸다.

“소저, 기회를 놓쳐서 소저의 계획을 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죄가 크니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에요. 그렇게 급하게…….”

목운요가 말하는 도중, 우의가 서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왕야, 양강총독 이원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목 소저를 뵙고 싶다고 합니다.”

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소름 끼치도록 진한 살기가 들끓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오늘이 이원일의 제삿날이 될 성싶었다. 감히 왕야께서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우의의 보고에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드렸잖아요.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제가 가서 만나 볼게요.”

“잠깐!”

목운요를 부르는 월왕의 미간이 좁아져 있었다.

“그자를 네가 만나 볼 필요는 없다. 일단 명음에게 상대하도록 해 보자. 그마저도 안 통하면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월왕의 말에 목운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원일이 의심을 품지 않도록 제가 가는 게 확실해요.”

“안 돼!”

월왕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자가 목운요를 찾아온 의도는 뻔했다. 그 속셈이 훤히 보이는데 어찌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겠는가!

우의는 명음에게 눈짓을 한 뒤 함께 서재 밖으로 물러났다.

서재 안에서는 월왕과 목운요 두 사람만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왕야께서는 왜 저를 못 믿으시는 거죠?”

“내가 못 믿는 건 네가 아니라 이원일이다.”

월왕이 내뿜는 한기에 서재의 공기가 더욱 차갑게 변했다.

목운요는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월왕이 자신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천하의 월왕이 질투를 하다니…….

“왕야, 그자에게서 인감을 가져오려는 것일 뿐 다른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제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그래도 널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이번에는 목운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된 설명에도 월왕이 여전히 살기를 내뿜고 있으니 슬슬 짜증이 났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절 우리 안에 가둬 두시는 게 낫겠네요!”

목운요의 굳은 표정에 월왕의 입가가 잔뜩 뒤틀렸다.

“그런…….”

“이 일에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요. 게다가 저희한테 남은 시간도 얼마 없어요. 저희가 예상한 대로 소금 상인들은 소금을 빼앗긴 일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어요. 한데 만에 하나 그들이 우리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고 일을 키우면 어쩌시려고요? 황상께서 조사를 명하시면 지금의 힘으로 상대하실 수 있나요?”

월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빛은 한겨울의 밤보다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따라가겠다. 안 보이는 곳에서 지켜보고 있으마.”

목운요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뭐, 그러도록 하세요.”

월왕은 목운요에게 다가가더니 옷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건넸다.

“호신용이다.”

지난번에 월왕이 줬던 비수와 같은 모양이었으나 칼자루에 박혀 있는 보석이 달랐다.

“이건…….”

월왕은 목운요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고 문을 나섰다.

* * *

진 총관은 이원일을 애써 공손한 말투로 상대하고 있었다.

“이 대인,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목 소저가 직접 손님을 대접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인을 뵐지 제가 가서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서두르게. 목 소저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분명 날 만나러 와 줄 걸세.”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삼십 분 정도가 지난 후, 목운요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저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까 말씀드린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옷을 갈아입고 나온 목운요의 모습에 이원일은 넋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달빛처럼 새하얀 옷을 입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청초하면서도 순결해 보였다.

이원일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몇 번이고 가다듬었다.

“그 일과도 관련이 있소이다. 단오절에 경릉성 백성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소저의 뜻에 감동해 나도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소. 내가 양강총독이라는 것을 소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내 말 한마디면 힘을 실어 줄 수 있소.”

“어머, 그 말씀이 사실인가요?”

“물론, 내 어찌 소저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목운요의 눈동자가 밤하늘 별빛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어찌나 환하고 아름다운지, 보고 있기만 해도 그 눈동자 속으로 절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이 대인,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이원일은 목운요에게 다가가 황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의 마음씨에 감동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뭔가를 바라고 이리 찾아온 게 아니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목운요는 태연한 척했다.

“이 대인께서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감사의 뜻으로 대인에게 손수 끓인 차를 올리고 싶습니다.”

“좋소!”

그깟 차 따위 관심도 없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뭐든 좋았다.

목운요가 차를 끓이려고 앉자, 이원일의 시선이 그녀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세상에 자신의 입맛에 이렇게 딱 맞는 여인이 있다니…….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특별히 내려 준 선물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차를 다 끓인 목운요는 찻잔을 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가 이원일과 부딪히면서 차를 쏟을 뻔했다. 놀란 마음에 그녀의 손이 상대를 붙들었다.

“앗, 이런……. 죄송합니다, 대인!”

목운요에게서 풍겨 오는 향기에 이원일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네면서 잽싸게 그의 허리춤에서 인감이 들어 있는 향낭을 바꿔치기한 뒤, 제 옷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원일은 목운요의 사과에 잽싸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갑자기 다가간 탓이오. 소저가 차를 끓이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나도 모르게 그만…….”

“대인께서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차를 다 끓였는데 맛보시겠습니까?”

“소저의 다도 솜씨가 천하일품이라고 하더니, 그 향만 맡아도 벌써 취한 것 같소이다.”

“과찬이십니다, 대인.”

그때, 진 총관이 들어와 염운사가 사람을 보냈다고 아뢰었다.

그에 이원일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목년! 그놈이 왜 자꾸 자신의 일에 훼방을 놓는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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