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목년의 의심
진 총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더니 한참 동안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웃음을 갈무리한 진 총관이 아까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조금 전에 이원일의 상황을 물으셨는데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대인은 명음에게 푹 빠져서 비싼 장신구를 몇 개나 보내왔습니다. 얼핏 봐도 일만 냥은 족히 들었겠더군요.”
“일만 냥이라……. 양강총독이라는 자가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통도 크군.”
진 총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야는 수만 냥 때문에 골치를 앓았는데 일개 이품 관리가 돈을 물 쓰듯 쓰다니 쓴웃음이 절로 났다.
“얼마 못 가서 발버둥 치게 될 겁니다.”
“그래, 내일부터 이원일을 더 바짝 감시하도록 하게. 다 된 밥에 코 빠뜨리지 않게.”
“예, 왕야. 오늘은 일찍 쉬시지요. 어쨌든…… 내상을 입었으니 말입니다.”
진 총관은 왕야의 방을 빠져나온 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왕야께서 평생 혼자 살다 죽는 거 아니냐며 성가 놈이랑 걱정하곤 했었는데, 왕야께서 아픈 척까지 하며 관심을 끌려 하시다니.
후후, 좋구나, 좋아!
* * *
이튿날 아침, 목운요는 명음을 만났다.
“오늘이에요. 제가 준 가루약을 사용한 뒤에 양강총독의 인감을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요.”
“예,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네.”
목운요는 마음이 무거웠다. 소금 상인들이 소금을 바꿔치기하려다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외부에 퍼뜨리진 않을 테지만,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이원일을 찾아갈 테니 오늘의 기회를 놓친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매일 아침 일찍 불선루에 달려오던 이원일은 평소보다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이목년도 함께였다.
불안한 마음에 목운요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장 월왕을 찾아갔다.
월왕도 그 소식을 들었는지 목운요가 나타나자마자 진정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사람을 시켜 이목년을 끌어낼 생각이다. 다만 이렇게 하면 나중에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닌지…….”
“이목년이 도중에 알아서 빠져 주면 좋을 텐데요. 안 그러면 왕야께서 도와주시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다. 이번 기회만 잘 잡으면 앞으로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은 물론, 소씨 가문도 무서워할 필요 없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번 기회를 놓치면 숨죽인 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았다.”
월왕은 불안해하는 목운요를 안심시키려는 듯 확신에 찬 눈빛을 보여 줬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내 세력이 강남을 온전히 접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너 하나 지켜 주는 건 문제도 아니다.”
옷소매 안에서 손을 어지간히 꽉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누군가가 제 심장을 움켜쥐고 누르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지난 생에서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곁을 지켜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달리 다른 방법이 없던 그녀는 진왕을 선택했었다.
죽을힘을 다해 그의 환심을 사려 했고, 그를 기쁘게 하는 일이 뭔지 온종일 전전긍긍하며 고민했다. 그렇게 갖은 애를 쓰고도 결국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월왕부로 보내져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스스로 힘을 키우고 어머니를 세상으로부터 지키겠노라 결심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다고 하자, 차분히 가라앉았던 마음이 세차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군. 명음 쪽 상황을 살피러 가는 게 어떻겠느냐?”
목운요는 가까스로 감정을 가라앉힌 뒤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왕야. 명음 쪽에서 실패해도 무리하게 밀어붙일 생각은 없어요. 기회야 다시 만들면 되니까요.”
그러자 깊고도 맑은 월왕의 눈빛이 목운요를 향해 쏟아졌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그 바람을 들어주리라.
* * *
한편, 명음은 이원일과 이목년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원일에게 가루약을 탄 뒤 인감을 훔쳐 낼 생각이었는데, 이목년이 끼어들 줄이야.
초조한 기분이 들었지만 적당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이목년은 그런 명음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이원일이 그녀에게 빠져 온종일 불선루에 머무르는 것도 모자라, 말끝마다 명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빠져도 단단히 빠진 듯했다.
그래서 의심스러운 상대를 살피러, 이원일을 따라 불선루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명음은 진정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초조한 기색을 이원일에게 들키고 말았다.
“명음 소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손님께 차를 끓여 드리고 대접하는 게 제 가장 중요한 일이랍니다. 오늘 귀한 두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보다 더 신경 쓸 만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명음은 길고 새하얀 목을 일부러 드러냈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간 이원일과 달리 이목년은 냉소를 금치 못했다.
이내 그녀가 찻잔을 두 사람 앞으로 가져갔다.
“차를 다 끓였으니 맛을 보시지요.”
한데 찻잔을 이원일에게 건네는 순간, 명음의 발이 꼬이면서 차를 제 옷에 쏟고 말았다.
놀란 이원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음 소저,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괜찮으니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온 뒤에 다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됐다. 우린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목년이 심각한 눈빛으로 이원일을 쳐다봤다.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을 의심하는 이목년의 태도에 명음은 크게 당황했다. 두 사람을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목 소저가 오랫동안 세워 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 둬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목운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인이 오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는지요?”
안으로 들어온 목운요는 명음의 옷이 찻물에 젖은 것을 보곤 허겁지겁 달려와 살폈다.
“괜찮아요? 어디 덴 곳은 없어요?”
걱정스러운 말에 명음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좋은 차를 저 때문에 버리고 말았으니…….”
차도 차지만 오늘과 같은 절호의 기회를 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에 명음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람이 무사하면 됐지, 그깟 차가 무슨 대수랍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젠 제가 두 분을 대접할게요.”
“예, 소저.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명음은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인사를 고하곤 물러갔다.
목운요의 등장에 이목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 소저, 오랜만이군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한편 그의 옆에 앉은 이원일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명음의 미색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소문의 목운요를 보고 나니 그동안 자신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오른 꽃봉오리 같은 그녀의 모습은 묘한 기대감을 선사했다. 몇 년 잘 참고 기다리면 꽃망울을 있는 힘껏 터뜨린 아름다움을 온전히 제 것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즐기는 자신의 입맛에는 목운요가 딱이었다!
목운요는 살며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오월 단오가 되지요. 경릉성의 많은 백성들로부터 항상 도움을 받고 있는 터라 이번 단오절 때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에 이목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경릉성에서 일어난 일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황상께 상을 받았다 하여 그녀가 경릉성 백성에게 죽을 대접한 일, 그 일을 이숭 대사가 화폭에 담은 일, 그리고 의덕 장공주께서 그 그림을 손수 황상에게 전한 일까지.
이번에 목운요가 일을 벌인다면 자신도 자연스레 그 일에 얽히게 될 것이고, 나아가 황상의 귀에 제 이름이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경릉성 백성에게 어떻게 보답할 생각입니까?”
단오절까지는 아직 꽤 남은 상황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려는 걸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을 준비하려는 것 같다. 그리되면 이쪽으로서는 더욱 반가울 따름이었다.
“단오절의 풍습대로 모든 분께 종자(粽子, 대나무 잎에 찹쌀과 다양한 소를 넣어 찐 음식)를 대접하고 싶어요. 그 금액으로 십만 냥을 내놓을 생각이에요. 모두의 도움으로 번 것이니, 그만큼 보답하고 싶습니다.”
목운요가 꽤 큰 이익을 세웠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십만 냥이라니! 천재지변이 일어날 시 조정에서 내려보내는 구제금조차 십수만 냥이 될까 말까 한 수준이건만.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원일이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목 소저, 그리 힘들게 번 돈을 내놓아도 괜찮겠소?”
그 말에 목운요는 민망한 듯 눈을 내리깐 채 웃어 보였다.
“말하기 부끄럽사옵니다만, 여러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명성을 쌓고 싶습니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이원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경릉성에서 소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 들었소. 황상께서도 소저를 칭찬하셨는데 더 큰 명성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명음이 차를 쏟는 바람에 이원일의 잔은 비어 있었다. 이를 발견한 목운요가 말을 이으며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대인께서는 지체 높은 관리이시니 저희 같은 장사치의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우실 겁니다. 채월각이 사라지고 하운방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걸 누가 고운 시선으로 보겠습니까? 명성을 쌓아 두면 훗날 하운방이 다른 곳에 분점을 세워도 손가락질을 덜 받게 될까 싶어 이번 계획을 세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