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23화 (123/442)

123화 완벽한 함정

“명음 소저, 몸은 괜찮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어요.”

“소저, 안색이 영 어두운 것이 걱정이 있어 보이는데, 내 도울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그 말에 명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방금 운춘 언니가 한 말에 괜히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무슨 일이 있었다는 확신이 드는군.”

준수한 외모에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이원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릉성에서 무슨 일이 생긴 일이라면 내 얼마든지 도와 드리겠소.”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불선루에 차를 드시러 오신 것 같은데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몸도 훨씬 좋아졌으니…….”

“그럴 필요 없소. 아직도 몸이 성치 않은 것 같은데 소저에게 폐를 끼칠 수야 없지.”

“전 괜찮아요.”

말을 마친 명음이 이원일을 정자로 이끌었다.

“여기 있는 다구는 제가 평소에 연습용으로 쓰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고말고. 그럼 부탁하오, 명음 소저.”

명음은 호수 위 물결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원일은 가녀린 명음의 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보는 이로 하여금 흡족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명음의 옷소매 사이로 새하얀 팔뚝이 슬쩍 비쳤다. 그곳에는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명음이 재빨리 옷소매를 내렸지만 이원일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소저, 그 상처는 어찌 된 것이오?”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명음이 찻잔을 이원일 앞에 내준 뒤 뒤로 물러섰다.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차를 끓여 드렸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기다려 보시오.”

이원일은 저도 모르게 명음을 잡으려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명음이 뒤로 물러서면서 이원일의 손등 위로 부드러운 옷소매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손수건 하나만이 떨어져 있었다.

손수건을 주워 든 이원일은 손수건 한 귀퉁이에 수놓아진 시구를 읽어 내려갔다.

“꽃이 피어도 함께 즐길 사람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사람 없네. 그대는 지금 어디 계신지, 꽃이 피고 지는 이 계절에.(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若問相思處, 花開花落時.)”

이원일은 홀로 차를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대문으로 향하는 길을 찾지 못해 계속 헤매다가 정원에서 화초를 돌봐 주던 남아를 만났다.

“대인께서도 길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불선루에 제가 모르는 곳은 없답니다. 목적지만 말씀해 주시면 길을 안내해 드릴게요.”

“으음? 그럼 명음 소저를 아느냐?”

“당연하죠. 누나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누나는 요 며칠 기분이 안 좋아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데, 괜히 헛걸음하시는 건 아닌지…….”

“무슨 일로 기분이 그리 상한지 아느냐?”

“명음 누나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소문을 지어냈지 뭐예요! 담팔왕이라는 자가 명음 누나한테 무례하게 군 적이 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누나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어요. 마음 약한 명음 누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가 됐을 거예요.”

“그 담팔왕이라는 자가 누구냐?”

“경릉성분이 아니신가요?”

“후후, 담팔왕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구나.”

이원일로부터 은자를 받은 남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담팔왕은 채월각의 작은 주인으로, 지난번에 불선루에 와서 소란을 피운 것도 모자라 명음 누나를 희롱하려고 했어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남아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물을 떠 오라는 누군가의 외침에 잽싸게 이원일에게 절을 올렸다.

“대인, 전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궁금하시거든 다관이나 주루에 가서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한때 이 일로 경릉성이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나가시는 길은 이쪽이고요!”

이야기를 들은 이원일은 불선루를 나오자마자 근처에 있는 아무 다관에나 들어갔다.

은자를 몇 푼 쥐여 주자 다관의 심부름꾼은 그 사건에 대해 술술 쏟아 내기 시작했다.

명음의 팔뚝에 난 상처의 전말을 알게 된 이원일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미인은 팔자가 사납다고 하더니, 쯧…….”

명음 소저가 자신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런 일로 마음고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이원일은 명음을 만나기 위해 날마다 불선루를 찾았지만, 명음은 어떻게든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 우연히 후원에서 명음을 만날 수 있었다.

“대인, 저 때문에 귀한 시간 버리지 마세요.”

명음의 눈동자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명음 소저, 내가 어째서 요 며칠 소저를 보러 왔는지 알 거라 믿소. 소저도 내게 마음이 있거든 날 받아 주시오. 불선루에서 나오기 위한 돈은 내가 지불할 테니.”

“말씀 감사합니다, 이 대인.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저는 여기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걸요. 제 주제에 그것만으로도 과분하답니다.”

명음이 제의를 거절하자 이원일은 초조해졌다.

“명음 소저, 잘 생각해 보시오. 여기서 잘 지낸다 해도 결국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드는 일인데, 그것이 정말 소저가 원하는 것이오?”

“이 대인,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까요. 혹 여기서 차를 끓일 수 없다면 산 깊고 물 맑은 곳에 가서 혼자 조용히 살렵니다. 다른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소저, 어찌 이리 고집을 부린단 말이오? 이렇게 사는 게 소저의 뜻이 아님을 나도 알고 있는데, 설마 팔뚝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런 것이오?”

그 말에 명음의 낯빛이 변하더니 팔뚝을 뒤로 숨겼다.

“역시 그렇군……. 그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담팔왕이라는 자는 죗값을 치렀소. 팔뚝에 난 상처는 이제 다 나았는데 어찌 마음의 상처는 여태 낫지 않았단 말이오.”

“이 대인, 아무리 제가 비천한 출신이라 해도 제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인처럼 지체 높으신 분의 명성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말을 마친 명음이 절을 올린 뒤, 빠르게 뒤돌아 물러났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건강을 회복한 명음이 손님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되찾은 그녀는 마치 이원일의 제의를 아예 들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한편 이원일은 그녀를 하루라도 못 보면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명음의 얼굴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싶을 때면 불선루까지 달려가곤 했다.

진 총관에게 특별히 부탁해 명음의 일정을 모두 취소시킨 뒤 자신만 상대하도록 하기도 했다.

* * *

한밤중.

목운요는 왠지 모르게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한참 동안 몸을 뒤척이는데 창문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놀란 마음에 그녀가 빠르게 일어나 앉았다.

“누구야?”

“놀랄 것 없다. 나다.”

어두운 밤, 월왕의 목소리가 유독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숨을 돌린 목운요가 방에 불을 밝혔다.

“왕야, 무사히 다녀오셨나요?”

방 안으로 들어온 월왕의 눈가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예상한 대로 소금을 실어 나르는 염운선과 똑같이 생긴 배가 강가에 숨겨져 있더군. 그 배에는 소금이 아닌 모래가 담겨 있었는데, 소금 상인들이 밤에 그 배를 바꿔치기하려다가 내 부하들에게 덜미가 잡혔지. 배에 실렸던 소금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옮겨 두었다.”

“정말 잘되었네요. 축하드려요, 왕야!”

부드럽게 휘어진 그의 눈가가 평소보다 한결 따뜻해 보였다.

“제명이 큰 공을 세웠다. 정확한 정보를 가져다준 덕에 수고를 덜 수 있었지. 안 그랬다면 이렇게 쉽게 염운선을 빼내지 못했을 거다.”

“그럼 모래를 실은 배는 어떻게 됐나요?”

“놈들이 배에 구멍을 내서 가라앉혀 버렸다.”

“후후, 염운선이 납치됐다는 걸 알고도 소금 상인들이 원래 계획대로 배에 구멍을 냈다고요?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게 엄청 싫었나 보네요.”

하긴, 조정에서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사건을 조사하라며 대규모 인력이 파견됐을 것이다. 그리된다면 위험이 몇 배나 커질지, 계산 빠른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한껏 들뜬 목운요의 귀에 월왕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안색도 평소보다 좋지 않았다.

“왕야, 다치신 거예요?”

“내상을 입어 한동안 쉬어야 할 것 같다.”

“제가 봐 드릴게요!”

목운요가 월왕의 손목 위에 제 손가락을 올려 맥을 짚었다.

“이리 큰 상처를 입으신 거예요?!”

맥이 무척 불안정한 것이, 만에 하나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다시는 제 발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 심한 건 아니다.”

월왕은 무척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으니 왕야께선 안심하고 돌아가서 쉬세요. 제 쪽은 내일 정도에 가닥이 잡힐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기력을 회복하는 약방을 써 드릴게요. 마침 필요한 약재도 전부 있으니 잘 달여서 금수원을 보내 드리도록 할게요.”

“그래, 너도 일찍 쉬도록 해라. 약은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달여도 된다.”

“내상은 하루빨리 치료해야 해요.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무공을 닦는 데 영향을 줄지도 몰라요.”

“그럼 네가 약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마.”

말을 마친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운요는 약을 달인 뒤, 육냥을 통해 금수원에 보냈다.

기다리겠다는 월왕의 말을 들었지만, 한밤중인 만큼 육냥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 * *

금수원.

진 총관은 월왕으로부터 지시를 받던 중, 육냥이 약을 가지고 왔다는 우항의 보고를 들었다.

“왕야, 다치신 겁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 힘이 넘치는 말투에 아무 일도 없는 줄 알았는데 다치셨다니…….

한편, 육냥이 약을 가져왔다는 소리에 월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사이 우항이 약을 가지고 들어오자 진 총관이 얼른 약을 마시라고 권했다.

“왕야, 따뜻할 때 얼른 드십시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장 의원을 부를 테니 확실히 진료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난 괜찮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괜찮으시다뇨?”

자신의 말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진 총관의 모습에 월왕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공으로 잠시 맥을 바꾼 것일 뿐, 아무 일도 없다.”

“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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