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주인을 선택하는 꽃
검은 비단을 벗겨 내자마자 화분 속의 모란꽃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닫혀 있던 꽃망울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가슴속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향기가 화악 하고 밀려들었다.
“빌린 방에 만개한 꽃이 정원 가득이니, 이제 막 피어난 모습이 요괴일까 두렵다(賃宅得花饒, 初開恐是妖.) 하더니,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주변을 에워싼 다른 손님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모란이야 숱하게 봐 왔지만 이렇게 신기한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한편 오민지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기를 지닌 꽃은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제명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나니 그동안 자신이 수집했던 온갖 진귀한 꽃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과분한 선물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제명이 어두운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 수령, 죄송하게 됐습니다만 이 꽃은 수령을 주인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더니 뒤에 있던 하인들에게 모란꽃을 다시 포장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당장 멈춰라!”
오민지는 허겁지겁 달려가 모란꽃 앞을 막아섰다. 주인을 알아보는 모란꽃이 제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다시 가지고 돌아가겠다니!
“제 선생, 꽃이 나를 보자마자 꽃망울을 터뜨렸으니 나와 인연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소? 영기를 지닌 꽃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는 선생의 말처럼, 날 위해 꽃을 피웠으니 날 주인이라고 인정한 것 아니오.”
하지만 제명은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 수령, 여기를 보십시오…….”
“으응?”
잎사귀 사이로 아직 피지 않은 꽃망울이 수줍게 숨어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핀 자색 모란과 색이 확연히 달랐다.
“이건…….”
“두 개의 꽃망울이 동시에 피어야 모란의 선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오민지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제 선생,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가서 제 안사람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네에?”
그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꽃을 아끼기로 유명한 오민지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부인에 대한 남다른 연심이었다.
오민지의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터라 혼례를 올린 후에도 후사를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부인을 향한 오민지의 마음은 멀어지기는커녕 예전보다 더욱 단단해졌다. 심지어 부인을 위해 첩실을 거느리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녀린 체구의 미인이 오민지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꽃보다 눈부신 외모,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하늘하늘한 몸짓에 사람들은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오민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인, 이거 보시오. 내가 말한, 주인을 선택할 줄 아는 모란꽃이라오. 조금 전에 그 앞에 서자 자색 꽃망울이 활짝 피어났는데, 나머지 꽃망울은 부인과 인연이 있는지 보시구려.”
오민지의 부인이 손님들을 향해 조심스레 절을 올렸다.
“소인 위씨(尉氏), 대인들을 뵙습니다.”
“위 부인을 뵙습니다.”
손님들이 인사를 올리자, 제명 또한 재빨리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위 부인을 뵙습니다. 부인께서 나오셔서 자세히 살펴봐 주십시오.”
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모란꽃의 잎사귀를 매만졌다.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닫혀 있던 꽃망울이 갑자기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위 부인은 물론, 자리에 있던 손님들마저 탄성을 질렀다.
“오오, 귀하기로 유명한 요황(姚黄)과 위자(魏紫) 아닌가? 두 품종 모두 화중왕(花中王)이라고 하더니, 그야말로 천상배필이로군!”
“그러게 말이야. 한 뿌리에서 두 가지 색의 꽃이 핀 것도 모자라 한겨울에 만개했으니 신기하구먼.”
“세상에 별의별 것이 다 있다지만, 꽃에도 영기가 있다는 건 난생처음 알았네…….”
한편 오민지는 크게 기뻐하며 아내를 바라봤다.
“이 모란꽃은 우리 내외를 찾아온 겁니다, 부인. 그러니 앞으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에 정성을 들이세요. 오래오래 나와 함께 살아 주시구려.”
옆에 서 있던 제명 역시 거들고 나섰다.
“이렇게 된 일이군요. 모란꽃은 서로를 아끼는 부부를 주인으로 삼고 싶었나 봅니다. 오 수령과 위 부인이 바로 그 주인이십니다.”
“고맙소이다, 제 선생. 이리 과분한 선물을 받았으니 상석에 앉으십시오.”
대청 안의 어느 누구도 더는 제명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오 수령의 호감을 샀기 때문이다. 어쩌면 강남에 새로운 소금 상인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금수원 안, 목운요가 손에 묻은 물방울을 모란꽃에 튕기자, 반쯤 열린 꽃망울이 활짝 피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금란과 금교가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저, 이런 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볼수록 신기하네요.”
“가루약을 조금 섞은 것뿐이에요. 누군가가 가루약을 넣은 물을 튕기자, 모란꽃 색이 완전히 변하는 걸 본 적 있는데 그거야말로 신기하더라고요.”
목운요는 잔을 옆에 내려놓은 뒤, 바구니 속에서 밭은 숨을 내뱉고 있는 눈여우를 돌아봤다. 그러곤 육포를 꺼내 들었다.
“날 따를지, 이대로 굶어 죽을지 생각해 봤어?”
눈여우가 힘이 빠진 채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과 달리 잔뜩 거칠어진 털, 충혈된 눈과 잔뜩 기가 죽은 모습의 눈여우는 육포 냄새를 맡자 저도 모르게 목운요의 손을 쳐다봤다.
“끼잉…….”
목운요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바구니를 연 그녀가 눈여우를 쓰다듬었다.
“여긴 월서가 아냐. 내가 널 풀어 준다고 해도 여기선 살기 어려울 거야. 날 따르면 잘 먹여 주고 정성껏 길러 줄게.”
목운요의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지만, 눈여우는 그녀의 말속에 깃든 살기를 본능적으로 읽어 냈다.
결국 눈여우는 조심스레 몸을 뒤집어 목운요를 향해 배를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오던 진 총관이 그 모습을 보곤 탄성을 질렀다.
“녀석이 드디어 머리를 숙였군요!”
자신의 약점인 배를 상대에게 보여 준다는 건 복종한다는 뜻이었다.
목운요의 눈가가 곱게 휘어지더니 눈여우 입가에 잘게 찢은 육포를 넣어 주었다.
“이건 딱딱하니까 조금만 먹어. 이따가 부엌에 가서 맛있는 걸 만들어 줄게.”
목운요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먹을 것을 만들어 주곤, 눈여우의 발톱과 털을 다듬어 줬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 * *
월왕은 양주성에서 소식을 받은 뒤, 목운요에게 서한을 건넸다.
그녀의 어깨에서 웅크리고 있는 눈여우를 쓰윽 훑은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여우는 교활한 동물이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 말에 목운요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눈여우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손을 타고 눈여우가 어깨에서 손바닥 위로 내려왔다.
“월서의 눈여우는 영특해서 한번 길들이고 나면 주인한테 충성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녀석한테 어떻게 하는 게 자신한테 가장 좋을지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주었어요.”
눈여우는 애교를 부리며 목운요의 손가락을 핥더니 손목에 머리를 가볍게 비볐다.
월왕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눈여우를 길들이는 건 여러 번 봤지만, 눈여우가 주인에게 살갑게 구는 건 처음 본 터였다.
“말을 잘 듣는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목운요는 눈여우를 어깨에 다시 올려 둔 뒤, 월왕이 건넨 서신을 자세히 살폈다. 목운요가 서신을 읽느라 고개를 숙이자, 눈여우도 고개를 숙였다.
둥그렇게 휜 눈매나 슬쩍 치켜 올라간 입매…… 목운요와 눈여우는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모습에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던 월왕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란꽃 선물이 통했나 보네요.”
목운요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월왕이 어색하게 눈길을 내리깔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 계획은 한층 힘을 받을 수 있겠군.”
“예, 그보다 이번에 소금세를 심사하러 파견된 자가 누군지 아시나요?”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양강총독(兩江總督) 이원일(李源一)일 거다.”
“이씨인가요?”
쯧, 이씨 성이 하여간 많기도 하지…….
“그래, 이원일은 이씨 가문의 방계로, 현 대황자비를 배출한 가문 소속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대황자가 이원일을 외숙이라 불러야 하지.”
이씨 가문의 손에 강남이 들어오면 소금 상인 세력을 포섭한 뒤 대황자의 대업을 도우려 할 터.
“황상께서 소금세를 심사하는 사람을 보내신 건, 사염을 취급하는 장사치가 날뛰지 못하게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거겠죠? 황명을 받았는데 강남에서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부황께서는 속내가 깊으신 분이라 그 마음을 읽는 건 쉽지 않지. 하지만 지금 부황께선 형님을 마뜩잖게 여기시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 문을 닫은 채월각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황상께서 채월각에 상을 내리도록 대황자 쪽 사람이 조정에서 유세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사야, 양강총독이 뭘 좋아하는지 아시나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월왕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미인이다.”
“풋, 하긴. 세상에 미인을 거절할 사내가 어디 있답니까? 여색을 밝힌다니 쉽게 해결할 수 있겠네요. 사야 휘하의 명음 소저를 잠시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명음은 암살 기술을 익혔다. 그 아이에게 이원일을 맡긴다면 별 효과가 없을 테니 다른 사람을 보내 주마.”
“아뇨, 제 생각엔 명음 소저가 딱이에요. 게다가 암살 기술도 지녔으니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는 제 몸을 지킬 수도 있을 거고요.”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큰 그림이 그려지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목운요는 눈여우를 무릎 위에 내려놓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목운요의 확고한 대답에 월왕도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실눈을 뜨고 있는 눈여우에게로 향했다.
“어떤 이름을 지어 줄지 생각해 봤느냐?”
“아뇨, 사야께서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으신가요?”
“눈여우는 날렵해 설원에서도 재빠르게 달릴 수 있지. 그런 뜻에서 답설(踏雪)이 어떨지?”
그 말에 목운요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월왕이 생각해 낸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소씨 가문의 큰 소저가 기르는 눈담비의 이름은 백설(白雪)이었다.
눈을 밟는다는 의미의 답설, 그 이름처럼 ‘눈(白雪)’을 밟아 버려라!
“좋아요. 멋진 이름을 지어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