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16화 (116/442)

116화 무너져 내린 채월각

“이, 이년! 네년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 말겠다!”

도망칠 곳이 없어진 담림은 목운요에 대한 증오심에 눈이 멀어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가 목운요에게 미치광이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새인가 나타난 육냥이 담림을 힘껏 걷어찬 후, 그의 목에 장검을 드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목운요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어르신, 회안성을 제 안방처럼 여기며 수많은 여인을 희롱한 담팔왕의 더러운 죄를 덮어 주셨더랬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평소에 자식 교육을 잘하셨어야죠.”

“내가 뭘 했다는 거냐? 애먼 사람 잡지 마라!”

“자세한 이야기는 관아에 가서 해명하시면 되겠네요. 육냥, 손님 배웅해 드려.”

“목운요, 그런다고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네년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문가에 서 있던 진 총관이 차가운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이른 새벽부터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떠들어 대는 거야? 여봐라, 당장 이 미치광이 놈을 쫓아내거라!”

곧 우의가 호위를 이끌고 나타나 담림을 금수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진 총관님, 항상 수고가 많으셔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앞으로 저런 미치광이가 또 나타나면 제게 말씀만 하십시오. 헛소리 듣느라 귀가 따갑지 않게 당장 쫓아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진 총관은 육냥의 모습을 곁눈질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저, 호위라고는 육냥 하나인데 괜찮겠습니까? 소저를 호위하며 시중들 사람을 몇 명 보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육냥은 그런 진 총관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몸서리가 절로 쳐질 만큼 서늘한 기운이었지만, 진 총관은 그의 눈빛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굴었다.

왕야에 비하면 육냥 따위야 하룻밤 강아지에 불과했다.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면 사전에 쳐 내는 편이 훗날의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운요는 고개를 저었다. 진 총관이 소개해 준 사람보다는 육냥이 더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육냥 혼자서도 충분해요. 혹시라도 필요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 * *

며칠 동안 경릉성에는 풍운이 맴돌았다. 그 전날까지 기세등등하던 채월각이 하룻밤 사이에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관아에서는 채월각 대문에 붉은 봉인을 붙여 놓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러 가문의 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채월각의 미인책을 꺼내 태워 버렸다. 예전에 채월각에서 맞춘 옷도 모두 한 줌의 재로 변했다.

“소저, 채월각의 담림이 자수법을 전수해 준다는 핑계로 은밀히 뒷돈을 받고, 질이 떨어지는 옷을 백성에게 팔아 큰 피해를 입혔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게다가 담림이 회안성 관리와 결탁해 회안성의 어린 소녀들을 죽게 만든 담팔왕의 죄를 덮어 줬다고 해요. 지금 그 일이 폭로되면서 관아에 진실을 밝혀 달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운요는 빙긋 웃더니 육포를 꺼내 바구니 안에 가둬 놓은 눈여우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소문이 이렇게 빨리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걸 보면 누군가가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나 보네요. 성안에서 무슨 소문이 돌든 우리는 평소대로 지내면 그뿐이에요. 하운방도 곧 바빠질 테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

금교가 분개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우리 하운방이 문을 열었을 때는 소 닭 보듯 하며 채월각만 들락거리더니, 어찌 뻔뻔하게 옷을 사러 온답니까?”

눈여우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자, 목운요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육포를 던지더니 여상스레 입을 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장사하는 건 돈 때문이잖아요. 하운방에 오겠다면 기꺼이 옷을 팔 거예요.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니까요.”

* * *

이튿날, 하운방이 문을 열자마자 예상대로 손님들의 발길이 한시도 끊이지 않았다.

하운방에서 중요한 부인들을 직접 맞이한 뒤, 목운요는 온실로 향했다.

온실의 모란꽃은 당장이라도 피어날 듯 싱그러운 꽃송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꽃잎이 수줍은 듯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청초하면서도 무척 화려해 보였다.

목운요는 모란을 화분에 조심스레 옮긴 뒤 그중 하나를 월왕에게 보냈다.

모란을 살핀 월왕의 눈에 웃음기가 흘렀다. 온실 안에서도 가장 화려한 모란이었다.

전에 목운요에게 이것을 갖고 싶다고 말하긴 했는데, 정말 그것을 보내 줄지는 몰랐다.

“사야, 제명을 통해 오민지에게 모란을 가져다주려 하는데, 호위할 사람을 몇 명 보내 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마.”

오민지와 연락을 취하는 일을 제명에게 맡기기로 했다. 제명은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습보헌의 개장을 준비 중이었다. 하운방에 맞선다는 명분을 세운다면 자신과 연관 짓지는 못할 거다.

* * *

목운요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제명은 월왕이 보내 준 호위들과 함께 양주성으로 향했다.

양주성은 오민지의 생일잔치로 인해 평소보다 갑절은 활기가 넘쳤다. 거리마다 선물을 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민지의 저택에 들어가려고 줄을 선 사람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제명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줄도 서지 않은 채 대문으로 걸어가 초대장을 건넸다.

초대장을 확인한 하인은 제명에게 깍듯이 절을 올렸다.

“주인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에 제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월왕이 특별히 준비한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제명이 오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오민지가 직접 마중 나왔다.

흰 얼굴과 부드러운 표정, 고상한 몸짓. 중년의 사내한테선 장사꾼 특유의 거친 인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 수령을 뵙습니다.”

허리를 굽혀 절을 올리는 제명의 동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상대의 호감을 사려고 아첨하는 기색은커녕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오만함이 은근히 느껴졌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오민지의 속마음은 조금 복잡해졌다.

“제 선생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제명이라는 자는 생신연(生辰宴)을 앞두고 갑작스레 명첩을 보내왔다. 그것도 순금으로 만들어진. 그 위에 새겨진 필체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척 봐도 대가의 손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보다 이상한 건, 필체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기억을 한참 쥐어 짜낸 후에야 그 필체를 서릉에서 본 적 있다는 게 생각났다.

오부의 대청에는 내로라하는 소금 상인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알아주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로, 그들이 재채기만 해도 강남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겁 없이 대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제명이 호기롭게 대청 안의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오늘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인 제명, 어르신들에게 인사 올립니다.”

오민지가 직접 달려가 맞이한 탓에 그들은 거만한 기색 하나 없이 앞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오셨습니까?”

“미천한 가문 출신이라 입에 올릴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그보다 오 수령께서 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연히 모란꽃을 하나 얻었는데 꽤나 희귀한 것 같아 드리고 싶습니다.”

“모란꽃?”

좌중의 손님들은 오민지의 평소 취미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 보내는 선물도 대부분 꽃이었는데, 정작 오민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모란꽃을 가져왔다는 그의 말에 오민지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과 같은 계절에 피는 모란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으랴.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제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허리 높이의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녹나무로 만든 상자는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자 좌중의 분위기가 점점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명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제가 가져온 건 평범한 꽃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을 찾을 수 있답니다. 그러니 수령께서 직접 꺼내 보십시오. 진귀한 꽃에는 영기(靈氣)가 깃들었다고 하지요. 오 수령께서 꽃에게 간택되지 못한다면, 아쉽지만 집으로 가져가 다른 이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말에 오민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었다. 한데 갑자기 들이닥쳐선 기껏 모란꽃 하나 가져와 놓고, 이런 건방진 말이라니!

“제 선생께서 주신 선물인데 직접 꺼내 보여 주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오민지의 대답에 제명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아랫것들에게 상자를 들고 나가라고 손짓했다.

“제가 드린 선물이 오 수령의 눈에 차지 않나 봅니다. 보잘것없는 선물은 안 드리는 게 낫겠지요.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꽃을 아끼는 분인 줄 알았는데, 꽃이 주인을 택한다는 이야기도 모르시다니. 허허…….”

그 이야기에 오민지는 잠시 멈칫하더니, 방문을 나서려는 제명을 쫓아 나갔다.

“제 선생, 기다리십시오.”

제명은 발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얼굴의 미소는 전보다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조금 전에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여기까지 발걸음해 주셨는데 그냥 가신다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상대의 신분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냥 보내 버린다면 나중에 일이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었다.

제명의 굳은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자, 대청에 앉아 있던 이들도 제명에게 안으로 들 것을 권했다.

결국 제명이 다시 대청 안으로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은 상자에 쏠려 있었다. 주인을 선택하는 꽃이 뭔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다. 지금껏 한 말이 모두 허풍이라면 정신 번쩍 나게 혼내 주리라.

“오 수령, 모란꽃을 꺼내 보십시오.”

오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자를 열었다. 이내 검은 비단이 보이자 그는 허풍임이 분명하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제명은 여전히 긴장한 모습으로 꽃이 상하지 않게 잘 꺼내야 한다며 전전긍긍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꽃을 길러 왔던 터라 그 정도 일은…….”

오민지는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선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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