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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13화 (113/442)

113화 돌아온 월왕

* * *

조운년과 금 부인이 서릉으로 떠난 뒤,목운요와 소청은 정신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기 시작했다.

새롭게 지어진 육층 높이의 하운방은 불선루보다 한결 위풍 있어 보였다. 목운요는 길일을 골라 편액을 건 후 재개장을 선언했다.

그리고 각 가문에도 초대장을 보냈다. 온갖 선물이 당도했지만 정작 가게를 찾아온 이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썰렁한 하운방을 보며 소청은 불안한 마음을 좀처럼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한테 호감을 보여 줬던 사람들이 조 대인과 금 부인이 가시자마자 입을 싹 닦다니…….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하구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를 대하는 이목년의 태도를 좀 더 지켜봐야 할 테고, 채월각 쪽에서도 괘나 압박을 주고 있는 눈치거든요. 며칠 지나서 상황이 좀 더 분명해지면 예전처럼 저희를 대해 줄 거예요.”

“하아, 알겠다.”

그때, 금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저, 채월각에서 여러 가문에 초대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릉성의 부인들과 소저들께서 모두 채월각에 가셨다 합니다.”

“후후, 하운방이 문을 여는 날에 어쩜 그리 딱 맞춰 초대장을 보냈대요? 뭐, 상관없어요.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데 우리도 놀죠.”

“채월각에서 저희를 노리는 게 아닌지 걱정이에요. 채월각에서도 미인책을 냈는데 부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고 들었어요.”

“그래요? 그러면 우리 가게의 옷값은 한 벌당 이백 냥을 더 올려서 팔도록 해요.”

“그리하면 손님이 더 줄어들 텐데…….”

“기다려 보면 알 거예요.”

그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평소 금 부인과 가까이 지내던 진 부인과 조 부인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부인을 뵙습니다.”

품에 아이를 안은 진 부인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가게 문을 열었다고 해서 축하해 주러 왔단다.”

“두 분께서 귀한 걸음을 해 주셨으니 앞으로 하운방에는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자, 어서 들어와 앉으세요. 금란, 차를 올려 줘요.”

썰렁하기 그지없는 가게 모습에 진 부인과 조 부인은 재빨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난감한 표정의 조 부인이 목운요를 위로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솔직히 조금 속상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해요. 사람이 떠나면 차는 식기 마련이니까요……. 두 부인께서 이리 와 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기쁘답니다.”

빙그레 웃는 목운요의 모습에 두 부인은 한숨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도 참으로 기특하구나. 오늘은 옷을 보러 왔는데 다 내놔 보거라. 덕분에 눈 호강이라도 실컷 하게.”

“봄옷을 새로 준비했는데 두 분께서 걸치시면 원숙한 아름다움을 뽐내실 수 있을 거예요.”

“후후, 하여간 네 말재간에는 당할 수가 없다니까.”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 썰렁했던 하운방에도 조금씩 활기가 들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봄옷을 꺼내 놓으며, 아이 옷도 조심스레 내밀었다. 그걸 본 진 부인이 넋이 나간 듯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이건…… 우리 애를 위해 옷을 지은 거니?”

“예, 부인께서 아이를 낳으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만월연도 가족끼리 조용히 지내신다고 하셔서 준비한 걸 드릴 기회를 좀처럼 찾지 못했답니다. 오늘 어렵사리 도련님을 뵙고 선물을 드릴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에요.”

옷을 받아 든 진 부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정성 들여 지은 티가 역력한 옷엔 귀여운 무늬가 수놓아져 있어, 보면 볼수록 유쾌함을 선사했다.

“운요야, 어쩜 이리 섬세하기도 한지…….”

“부인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두 부인은 한바탕 폭풍 칭찬을 늘어놓으며 수다를 떨었다. 진 부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잠이 들고 나서야 두 사람은 하운방의 문을 나섰다.

진 부인과 조 부인을 배웅한 뒤 더 이상 손님이 찾아오지 않자, 목운요는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 소식은 채월각의 신임 총관에게도 전해졌다.

“흐흐, 어르신께서 하운방의 콧대를 밟아 버리라고 하셨지. 이제 시작인데, 하운방의 꼬맹이가 나중에 울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어르신이 일러 주신대로만 하면 하운방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판세를 뒤집지 못할 겁니다.”

“자수법 하나로 주변에서 칭찬 좀 들었다고 잘난 척이라니. 범 무서워할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제대로 혼내 줘야 합니다.”

* * *

하운방 소식을 접한 진 총관은 괘나 속상한 눈치였다.

“소저, 그런 자들에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이렇게 잠깐 한가한 것도 좋죠. 이 틈에 온실을 손봐 둘 수도 있고요.”

전혀 개의치 않는 목운요의 모습에 진 총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목 소저라면 이런 일로 절대 기가 죽을 리 없었다.

“그보다 총관님, 왕야께서 월서로 가신 지 거의 두 달이 된 것 같은데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하아, 그건 저도 모른답니다. 서한을 보내 여쭤봐도 왕야께서 정확한 답을 주지 않으시니……. 아니면 목 소저가 서신을 보내 물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입가를 슬쩍 깨문 목운요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왕야께서 아직 안 돌아오신 걸 보면 월서에 아직 할 일이 남으신 거겠죠. 괜히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

“사태가 심각하니 도움을 청하는 게 맞습니다.”

“왕야께선 큰 뜻을 품고 계시니 그걸 방해할 순 없죠.”

그리 말한 목운요가 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진 총관이 아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왕야께서 목 소저의 빙등을 깎다가 손을 다친 일로 목 소저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왕야께서 목 소저의 마음에 들기까지 아무래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입춘이 한참 지나도록 여전히 날씨는 싸늘했지만, 온실 안은 푹푹 찌는 찜통 같아서 목운요는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온실로 향했다.

그녀는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 낸 뒤 화분 곳곳에 물을 줬다. 옆에서는 금교가 비료를 줬다.

“소저,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추워서 모란꽃이 제대로 필 수 있을까요?”

“지금 상태라면 며칠 안 가서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할 거예요.”

그에 금교는 시시때때로 온실에 찾아가 꽃봉오리가 달렸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금교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목운요에게 달려왔다.

“소저 말씀처럼 꽃봉오리가 올라왔어요! 꽃을 피우면 무척 멋질 것 같아요.”

“정말요? 같이 가 봐요.”

육냥도 목운요의 뒤를 따랐다.

그는 꽃봉오리가 올라온 걸 보고는 꽤나 놀란 눈빛을 지어 보였다.

“주인님, 소금 상인을 이끄는 오민지의 생일 때 이걸 보내실 생각입니까?”

“응, 오민지는 화초를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이른 봄에 핀 모란꽃을 보면 무척 좋아할 거야.”

“하지만 오민지는 원체 노련한 자라 이 정도 선물로는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겁니다.”

“모란꽃이야 그저 잘 봐 달라는 뜻에서 건네는 선물일 뿐이야. 경계 어린 시선보다야 호감을 사는 편이 낫잖아? 게다가 오민지 때문에 이 많은 화초를 기른 것도 아니고.”

평소 화초를 유난히 좋아하는 어머니에게도 선물을 드릴 생각이었다.

금교가 꽃을 누구에게 선물할 건지 물어보려던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온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시커먼 옷차림, 정교하게 수놓아진 무늬, 푸르스름한 피풍의를 걸친 상대에게선 냉랭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 기척을 깨달은 목운요가 돌아보자, 월왕의 묵직한 눈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사야?”

엄동설한보다 차디찬 그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빛이 떠올랐다. 월왕은 목운요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다.”

* * *

금란과 육냥이 물러가고, 온실 안에는 목운요와 월왕이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었다.

사방에 꽃이 만개한 가운데, 월왕은 목운요의 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곧 만개할 날을 기다리며 수줍게 고개를 든 꽃봉오리…… 그 가운데 흰옷을 입고 새하얀 손으로 가지를 움켜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그는 꽃송이를 쥔 목운요를 향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꽃이 피면 내게도 보내 주겠느냐? 나도 꽃을 무척 좋아하니.”

월왕이 꽃을 좋아한다고? 뜻밖의 말에 목운요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야께서 그러하시다면 당연히 보내 드리겠습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를 더 이상 숨기지 못한 채 월왕은 사방에 핀 꽃을 흥미롭게 살펴봤다.

“오민지에게 주려고 기르는 건가?”

예상대로 월왕은 그녀의 행동을 파악하고 있었다.

“예, 화초를 좋아한다고 해서 적당히 맞춰 줄 생각이에요.”

“소금 상인은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돈줄을 쥔다고 하더군. 추운 날씨에 만개한 꽃이 보기 드물긴 하지만, 반드시 그자의 눈에 든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

오민지 같은 자는 진귀한 선물을 평소에도 자주 받는 탓에 자연히 안목이 높은 편이었다.

그 말에 목운요는 조용히 웃더니, 손에 든 주전자를 기울여 모란꽃에 골고루 뿌려 줬다.

“그저 인사를 드리는 것뿐인걸요.”

푸른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목운요의 손등 위에 떨어진 채 영롱하게 빛났다.

월왕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비볐다. 처음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을 때의 촉감이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옥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새하얀 저 두 손에 닿으면 어떤 기분이려나…….

월왕의 노골적인 시선에 목운요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사야,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단하실 텐데 전 이만 돌아갈 테니 푹 쉬세요.”

“잠시 기다려라. 월서에 가느라 새해 선물로 제대로 주지 못해 오늘은 그걸 보상하고 싶은데…….”

“저번에 주시지 않았나요?”

지난겨울, 밤마다 자신의 창가를 지켜 주던 빙등이 떠올랐다.

“사야,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냐?”

월왕은 목운요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엄청난 위압감 앞에서 목운요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따라오너라.”

월왕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목운요가 미간을 잔뜩 구기더니, 결국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뒤를 따랐다. 앞으로 소금 사업에 뛰어들려면 월왕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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