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금 부인이 건넨 봉투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아이만 돌보느라 주 이낭에 대한 일을 깜빡했네요. 운요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쓴소리를 했다던데, 부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주 이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조운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장원(莊園)으로 가서 심성을 다스리라고 단단히 일러둘 생각이오. 조만간 승진을 알리는 성지(聖旨)가 당도할 텐데, 비록 첩실이기는 하나 조부의 체면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앞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하지만 풍족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 곳에 가면…….”
주 이낭은 눈물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는 데 능했다. 분명 이틀도 채 견디지 못하고 서신을 보내와 눈물로 호소할 터.
조운년이 마음이 약해져서 주 이낭을 용서할 바에야 차라리 지금 깨끗이 잘라 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걱정 마시오. 나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테니. 부인께서 그동안 첩실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소. 하나 이제 서릉에 들어가면 엄하게 단속해야 할 것이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체 놓은 신분일 테니 함부로 굴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으니 말이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 * *
금 부인이 몸을 푼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 무렵, 조운년을 서릉의 도찰원급사중(都察院給事中)으로 임명한다는 성지가 내려왔다.
이와 동시에 이목년을 경릉 염운사로 임명한다는 조서도 전해졌다.
인수인계가 끝나는 대로 조운년과 금 부인은 서릉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하나 그 소식에도 목운요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최근 육냥으로부터 끊임없이 소금 상인에 관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어, 도움이 되는 내용만 따로 추려 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정리하던 금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이전에 말씀하셨던 화초들은 금수원의 온실에 보냈습니다. 다만 아직도 날이 추워 꽃을 피울 거란 보장이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온실에 가 보니 꽃이 필 수 있는 온도만 유지되면 되겠더라고요. 분명 아름다운 꽃망울을 피워 낼 수 있을 거예요.”
회귀 전, 목운요는 난방이 되는 온실을 가지고 있었다. 온실에서 온갖 꽃을 길러 진왕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정말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봐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서릉 곳곳에는 꽃을 키울 수 있는 온실이 많답니다.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권문세가에서는 꽃을 찾는 이가 셀 수 없이 많으니까요.”
“그럼 화초들은 언제 보러 가실 건가요? 저도 소저를 따라 배우고 싶은데…….”
금교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자수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지만, 화초를 기르는 일만큼은 부쩍 관심이 갔다.
“그래요. 금교가 잘 배워 두면 저도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 * *
목운요는 금교를 데리고 며칠 동안 온실을 분주하게 들락거렸다. 그사이 금 부인의 만월연(滿月宴, 출산을 축하하는 연회) 준비도 틈틈이 도왔다.
일 년 사이에 정오품 지주에서 정사품 도찰원급사중으로 두 번이나 승진한 조운년은 주변으로부터 큰 부러움을 샀다. 벼슬 한자리 올라가는 데 십수 년이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기에, 승진해서 본분을 잊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연회를 준비해야 했다. 안 그러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금 부인은 목운요에게 경험 삼아 손님 명단 작성과 자리 배치, 그리고 음식 준비하는 일을 돕도록 했다.
목운요 역시 그런 금 부인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았다. 우선 그녀는 손님 명단부터 빠르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명단은 곧장 금 부인에게 전해졌다.
명단을 자세히 살펴보던 금 부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구나. 내가 네 나이 때는 놀 생각만 했는데, 넌 어찌 이리도 야무진 건지…….”
“의모님이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안 그랬으면 실수투성이였을 거예요.”
“이렇게 큰 연회를 준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니? 이대로 명단을 발송할 테니 계획한 대로 연회를 준비하렴.”
그러면서 금 부인이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내가 네게 약속했던 거 기억하고 있겠지? 며칠 뒤에 있을 만월연에서 주려고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괜히 널 곤란하게 할 것 같아 오늘 주기로 했단다.”
“감사합니다, 의모님. 지난번에 약조해 주신 거니 기꺼이 받을게요! 와아, 대체 은표를 얼마나 넣으셨길래 이렇게 무거운 거예요?”
“후후, 네가 직접 확인해 보려무나.”
봉투를 살짝 열어 본 목운요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의모님, 이걸 다 주시는 거예요?!”
봉투 안에 든 돈은 수만 냥에 달했다. 거기에 장원, 가옥, 점포 등의 문서는 물론, 각종 자기와 장신구가 빽빽이 적힌 명단도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당초 금 부인이 약조한 혼수품에 몇 배는 달하는 수준이었다.
“의모님, 이렇게 귀한 건 받을 수 없어요.”
“일단 내 말부터 차분히 들어 보렴. 네가 날 의모라고 부르는 이상 넌 내 친딸과 다름없는 존재란다. 너나 질문 모두 내게는 똑같이 소중한 아이지. 하지만 사내의 몸으로 태어난 네 동생은 나중에 커서 스스로 앞날을 헤쳐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넌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혼례를 올리면 시부모님은 물론, 지아비와 자식까지 돌보며 살아야 하겠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과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거라도 네가 갖고 있어야 내 마음이 놓일 것 같구나.”
금 부인의 말에 목운요는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의모님, 서릉은 번화한 곳이라 돈이 들어갈 일이 더 많지 않나요? 제게는 하운방과 불선루가 있으니 돈은 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동안 의모님 곁에 머물면서 저도 어느 정도 깨달았어요. 금씨 가문은…… 기댈 만한 곳이 못 돼요. 그런데 이 많은 걸 제게 다 남겨 주시면…….”
“후후, 걱정하지 말렴. 그동안 나도 돈 좀 번 터라 네게 그리 많이 준 것도 아니야. 게다가 나중에 네 혼수품으로 쓸 돈은 남겨 놨으니 이건 그냥 받아다오. 내가 경릉성을 떠나고 나면 장원이나 점포는 관리하기 어려울 테니 네게 주는 것이란다.”
“하지만…….”
이건 금 부인이 경릉성에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텃밭’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자신에게 그대로 물려준다는 건 과분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화가 날 것 같은데? 몸을 푼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화를 내면 산모한테 엄청 안 좋다고 하던데 말이지…….”
금 부인의 표정을 살피던 목운요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후후, 이래야 맞지. 나랑 오랫동안 일했던 금 총관이 내 장원, 점포 등을 줄줄 꿰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거든 그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거야. 서릉에 올라갈 때 금 총관은 두고 갈 생각이니 곁에 두도록 해.”
“예, 의모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참, 그러고 보니 이목년이라는 자가 네 의부님의 후임이 된다고 하더구나. 대단한 가문 출신이라고 하니 그자와 틀어지는 일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서릉의 이씨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경릉성에서도 그 명성을 알 정도니 보통내기는 아닌가 보네요.”
“이목년의 아버지는 승상인 이경주란다. 황상을 평생 보필한 노신이지. 요 몇 년 동안 소씨 가문에서 힘을 키우며 이경주에 맞서려고 했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게 쉬울 리가. 이목년이 이번에 경릉성에 부임한 데는 아마도 다른 목적이 있을 게다. 우리가 경릉성을 떠나고 나면 그 영향력이 예전만 못할 테니,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렴.”
목운요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야 조용히 지낼 텐데 이 대인과 엮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하아, 불선루와 하운방만 아니었으면 다 같이 서릉에 갔을 텐데…….”
“후후, 좀 더 시간이 흐르면 하운방과 불선루가 서릉에서도 문을 열지 모르잖아요. 그때가 되면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니? 서릉에 올라가면 그날이 오기를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마.”
금 부인은 목운요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함께했던 지난 시간이 그리 긴 것은 아니지만, 아이 덕분에 새롭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더랬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의부님께서 자리를 잡으시면 어머니를 모시고 서릉에 놀러 갈게요.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구경해 보고 싶어요.”
“그래, 자리를 잡으면 서신을 보낼 테니 꼭 와야 한다.”
이런저런 말로 금 부인을 충분히 위로한 목운요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고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만월연의 날이 밝았다.
소청과 함께 조부를 찾은 목운요를 은홍이 맞이했다. 뒤이어 손님들이 거의 다 왔을 무렵, 목운요는 내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원에 발을 디디자, 조운년 옆에 서 있는 젊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스물대여섯 남짓한 얼굴의 사내에게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비범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얼굴 가득 피어난 따뜻한 미소는 왠지 모르게 호감을 끌었다.
하지만 목운요는 부드럽게 휘어진 입가와 달리 그의 눈가는 싸늘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미소는 상대로 하여금 그 속내를 알 수 없도록 철저히 진심을 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