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국수 한 그릇의 의미
“금란, 오늘은 가서 푹 쉬도록 해요. 저도 이젠 괜찮으니 이젠 방 밖에서 지키고 있지 않아도 돼요.”
“그래도 불편하면 언제든지 절 부르세요. 밤에는 창문 꼭 닫고 주무시고요.”
“네, 금란도 그만 가 봐요.”
목운요의 단호한 말에 금란은 등불을 들고 발길을 돌렸다.
한숨을 내쉰 목운요가 방에 들어가니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방 안의 촛불이 환하게 타올랐다.
목운요는 탁자에 앉아 있는 월왕을 발견하자마자 제 실책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사야.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방에 몰래 숨어 있어야 하니 날이 어두워도 불을 켜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만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됐다. 이 공공 일행은 간 건가?”
“지금도 금수원에서 경치를 감상 중일 거예요.”
월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서 좀 더 기다리는 수밖에.”
문득 어색한 기분이 들어 목운요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사야, 저녁은 드셨나요?”
입을 굳게 다문 월왕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안 드셨으면…… 잠시만 기다리세요. 얼른 부엌에 갔다 올게요.”
늦은 시각이라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운요는 재빨리 불을 피우고 솥 안에 물을 부었다. 시간이 없어서 기껏해야 국수 한 그릇 삶아 내는 게 고작이었다.
* * *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월왕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시간이 너무 늦은 데다 뭘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국수를 삶아 왔는데 이거라도 드셔 보세요.”
커다란 그릇에는 맑은 국물의 국수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새하얀 면발 위로 푸릇푸릇한 채소가 살짝 올려져 있어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겼다.
조심스레 한 젓가락 맛본 월왕은 평소보다 조금은 밝은 눈빛을 한 채 묵묵히 그릇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가 먹는 모습을 목운요는 가만히 지켜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국수 가락을 집어 올리는 모습에서조차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어쩐 일인지 목운요는 등불 아래에서 빛나는 월왕의 눈동자에 자꾸 시선이 갔다. 수천, 수만 개의 별이 총총히 떠 있는 듯한 밤하늘 같은 그의 눈동자에서 왠지 모를 오만 가지 사연이 느껴졌다. 한없이 그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때, 창밖에서 난데없이 새 울음소리가 났다. 조운년과 이 공공이 떠났다고 우항이 소식을 보내온 거였다.
“진짜 새가 우는 것 같네요. 슬슬 가 보셔야겠어요.”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렸다. 이제 그만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월왕은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
“별것 아닙니다. 그냥 국수 한 그릇인데요, 뭐.”
월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금수원으로 넘어갔다.
마침 등불을 든 진 총관이 대기 중이었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왕야께 음식을 보내 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몹시 시장하실 텐데 얼른 돌아가서 식사하십시오. 밥상을 차려 놨습니다.”
“이미 먹었으니 됐다.”
“어이쿠! 하여간 목 소저가 꼼꼼하네요. 그렇긴 해도 오늘은 제가 직접 만든 장수면(長壽麵)을 드셔야 합니다. 오늘 생신이시니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그 말에 월왕의 입가가 휘어졌다. 하지만 미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차디찬 냉소만 흐를 뿐이었다.
“내 생일을 기억해 주는 건 자네와 성 숙부밖에 없군.”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부황이 제 생일을 기억할 리 없다.
그에 진 총관은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왕야라는 높은 신분인데도 어찌 저리 기구하단 말인가? 왕야께서 겪은 고초를 보통 사람이 겪었다면 일찌감치 무너져 내렸을 거다. 대체 언제까지 왕야께서 홀로 힘들어하셔야 한단 말인가?
“왕야, 얼른 가시죠. 면이 불면 맛이 없을 겁니다.”
* * *
방에 돌아가 국수를 한 젓가락 먹은 월왕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도 국수를 먹고 왔는데, 자네 것보다 맛있더군.”
그 말에 진 총관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암요, 암요! 제 솜씨가 어디 목 소저만 하겠습니까?”
월왕의 입가가 다시 한번 휘어졌다. 아까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이었다.
고맙다는 인사에도 목운요는 별거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평범하기 그지없는 국수 한 그릇이 오늘의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 그녀는 절대 알지 못하리라.
* * *
하룻밤 푹 자고 나니, 언제 감기에 걸렸나 싶을 만큼 기운이 넘쳤다.
목운요는 일어나자마자 소청에게 생일상을 차려 준다며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그렇게 정오가 되자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온갖 음식이 차려졌다. 생일상 옆에 선 금란과 금교는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소청에게 달라붙어 극진한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 오늘 기분이 좋아서 금란 등에게 한 달 치 월급을 상으로 줬어요. 저 잘했죠?”
아이의 깜찍한 모습에 소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네 말이 다 옳다.”
목운요가 금란 등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한 달 치 급여를 상으로 받았으니 앞으로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할 거예요. 하운방도 오랜만에 재개장하기도 하고요.”
“예, 맡겨만 주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목운요는 식사를 이어 나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채월각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담림이 각지에 자수법을 전수한 뒤 채월각의 명성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폐쇄됐던 채월각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귀빈들도 잔뜩 초대했다고 해요.”
금교의 말에 목운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문을 열면 여는 거지, 우리랑은 아무 상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하운방보다 채월각의 명성이 더 크다며, 얼마 뒤에 황상께서 채월각에 편액을 내리실 거라고 수군거린다고요.”
“황상의 편액을 받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저 조용히 지켜보면 돼요.”
목운요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담담했다.
“소저, 어찌 그리 침착하신 거예요? 채월각의 명성이 높아져서, 담팔왕이라는 자가 또 해코지를 하면 어쩌시려고요? 채청과 남아 등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후후, 그리 걱정되면 채월각의 동향을 자세히 살피도록 해요. 정말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도 미리 대비하는 게 좋겠죠.”
“예,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새해가 지나자, 사람들은 속속들이 일상의 분주함으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자수법을 전수한 채월각의 명성은 널리 퍼져 화제의 중심에 섰다.
“소저, 진 총관께서 새로 산 다구를 확인해 보시라며 불선루로 와 달라는 기별을 넣으셨습니다.”
목운요는 손에 들고 있던 옷감과 바늘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옷을 갈아입는 대로 건너가죠.”
보통 이런 일로 진 총관이 그녀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분명 월왕도 채월각에 관한 소식을 받은 게 틀림없다. 대책을 논의하려 자신을 부른 걸 거다.
옷을 갈아입고 불선루로 건너가자, 예상대로 진 총관이 월왕의 서재로 그녀를 안내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목운요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사야를 뵙습니다.”
“자리에 앉아라.”
“채월각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건가요?”
뒷일을 이미 다 계획해 둔 터라 목운요는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채월각은 네가 이미 처리 중이니 내 도움이 필요 없는 거 아니었나?”
목운요를 바라보는 월왕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사야께서 절 급히 찾으신 게 채월각 문제를 상의하려고 그러신 줄 알고……. 제가 오해했나 봅니다.”
“내일 난 떠난다. 그 일로 소택을 찾아가면 너무 느닷없을 것 같아 진 총관을 시켜 널 부른 거다. 작별 인사를 하려고.”
목운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눈을 내리깔았다.
“먼 길 가실 텐데 몸 보중하시길 빌겠습니다.”
그 대답에 월왕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잠시 지긋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하운방이 문을 다시 열게 되면 많이 바빠질 것이다. 네 나름대로 준비는 했겠지만 채월각의 공세를 피하려면 그저 의지만으로는 어려울 테지. 불선루 쪽은 안심하고 진 총관에게 맡겨도 된다. 그는 충직해서 절대로 속이는 일이 없을 거다. 그러니 틈틈이 시간을 내서 쉬도록 해라.”
무심한 듯 던지는 월왕의 말에 목운요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고맙다는 인사만 건넸다.
“그리고 두 달 뒤에 조운년의 전근령이 내려올 거다. 그가 서릉에 입성하면 이목년(李牧年)이 그의 뒤를 잇게 될 거다.”
그에 목운요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목년이라면…… 가문의 후광을 업은 자가 어찌 경릉성의 일개 정사품인 염운사 자리를 노리는 거죠?”
이런, 쓸데없는 말을!
말을 꺼내는 순간 목운요는 아차 싶어 혀끝을 깨물었다. 뜻밖의 소식에 놀라서 이목년을 이미 알고 있다고 제 입으로 밝히고 만 것이다. 월왕이 이걸 어떻게 생각할지…….
예상대로 월왕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저 이름만 말했을 뿐인데 목운요의 입에서 그의 신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서릉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한 게 아니었던가? 조정의 세력을 어찌 이리 잘 알고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꼬치꼬치 따질 생각은 없었다.
“맞다. 이목년은 승상 이경주(李慶州)의 막내아들로, 글재주가 뛰어나 과거에서 삼등에 오른 인물이지. 원래대로라면 경릉성에 부임될 리 없지만, 지난 반년 동안 경릉성의 이름이 크게 알려져 스스로 자원하였다 한다.”
월왕이 추궁하지 않자 목운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 가문에서 아들까지 보낼 줄은 몰랐습니다.”
“강남의 소금세를 노리는 거겠지.”
“소금세요?”
목운요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금의 강남이 부유한 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소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하운방과 불선루를 운영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긴 했지만, 소금 상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래, 조정에서 삼 년마다 한 번씩 소금세를 조사하지. 얼마 있으면 그때가 되는 데다, 때마침 조운년이 서릉에 입성하게 됐으니 이씨 가문에서 이번 기회에 강남 세력을 잡으려는 걸 거다. 어쨌든 네 일과는 무관한 것이니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목운요의 모습에 월왕은 미간을 구겼다.
“뭘 생각하는 거지?”
“왕야, 성공하려면 작은 것을 챙길 줄 알아야 하고, 돈을 쥐려면 과감히 나서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왕야께서는 그럴 만한 담력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