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파문이 일다
* * *
금수원으로 달려온 목운요를 맞이한 건 진 총관이었다.
“소저,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사야를 뵙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사야께선 서재에 계시니 얼른 가 보십시오.”
목운요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서재에 들어선 순간, 희미하게 느껴지는 혈 향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야를 뵙습니다.”
월왕의 시선이 목운요를 훑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에 매섭던 눈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감기는 다 나았느냐?”
“예,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지난번 올린 세의를 황상께서 마음에 드신다 하여 오늘 큰 상을 받았습니다. 성지를 가져온 이 공공이 오늘 밤에 불선루에 들릴 것 같은데, 몸을 피하지 않으셔도 될까요?”
“갈 만한 곳도 없다. 게다가 곳곳에 보는 눈들이 많아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행적이 발각되기 쉽다.”
어두워진 표정의 월왕을 보며 목운요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월왕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간에 지금은 그 마음을 접은 것 같다. 앞으로 계속해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면 마냥 거리를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야께서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잠시 몸을 피하셔도 됩니다.”
“금 부인은 어쩌고?”
그 말에 목운요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공공이 불선루에 온다면 조운년이 동행할 테고, 그리되면 금 부인도 같이 나설 가능성이 컸다. 혹시 금 부인이 어머니와 이야기하겠다고 나섰다가 우연히 사야를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목운요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괜찮으시다면 제 방에서 잠시 몸을 피하세요. 의모님이라고 해도 제 방에는 들어오지 않으실 테니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 같네요. 금란 등에게도 제 방에는 일절 들어가지 말라고 단단히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월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다.”
그때, 진 총관이 찻물을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병문안도 못 갔네요. 얼굴빛이 좋아진 걸 보니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총관님.”
“앞으로는 건강도 잘 챙기십시오. 몸이 아픈 것만큼 괴로운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진 총관의 말에 목운요는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그냥 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방금 서재 안으로 들어오면서 났던 혈 향이 떠올랐다.
진 총관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조용히 물러갔다.
잠시 머뭇거리던 목운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야, 다치신 건가요?”
“실수로 다쳤을 뿐이다. 별거 아니다.”
“그래서 서재에 들어올 때부터 혈 향이 났던 거로군요. 그런데 왜 약 냄새가 안 나는 거죠?”
월왕이 책상 위에 왼손을 올렸다. 상처를 감싼 흰 붕대에는 옅은 핏자국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장 의원을 불러 치료는 대충 마쳤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지냈으면 이런 상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거지? 목운요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의술이라면 저도 조금 알아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붕대를 다시 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붕대를 푼 목운요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왼쪽 엄지손가락과 검지 사이에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게 척 봐도 무척 심각한 상태였다.
상처를 보니 칼에 베인 것이 분명했다. 저번 밤에 빙등을 가져다주지 않은 게 마음을 접어서가 아니라 손을 다쳐서였구나…….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던 마음에 다시 한번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붕대를 다시 감아 준다더니?”
“상처가 너무 깊어 조심히 다뤄야 해요. 아플 테지만 조금만 참아 주세요.”
우선 그녀는 상처부터 깨끗이 씻어 냈다. 큰 통증을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면서도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그 후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사야, 왼손은 최대한 건드리지 마세요. 붕대로 고정시켜서 움직이는 건 불편하겠지만, 이래야 상처가 금방 나아요.”
“알았다. 수고했다.”
상처를 치료한 목운요는 눈을 내리깐 채 월왕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약상자를 정리했다.
“먼저 돌아가서 준비할 테니 이따 제 방으로 오시면 될 거예요.”
“그래.”
목운요가 서재 밖으로 나가고 얼마 뒤, 진 총관이 밥상을 들고 나타났다.
“왕야, 목 소저가 간 겁니까? 같이 식사라도 들자고 잡으시지 않고…….”
월왕은 고개를 내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쓰는 물건을 챙겨서 소택으로 보내라. 오늘 밤에 황궁 사람이 불선루에 올 수도 있다고 하니 소택에서 몸을 피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당장 챙기겠습니다. 옷은 갈아입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필요 없어.”
월왕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가라앉았던 눈빛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변방에서 구르며 군대를 호령한 그에게 남아도는 것은 참을성이었다. 서둘렀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니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기회를 노려야 한다.
특히 상대가 고양이처럼 보이지만 꾀 많은 여우라면…… 이쪽에서 서둘러 덤벼들수록 경계심만 살 뿐이다.
* * *
저녁이 되자, 예상대로 조운년이 이 공공과 함께 불선루를 찾았다.
화려한 등불을 가지에 매단 나무들은 영롱한 햇살을 머금은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오색 빛깔을 내뿜는 정원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서릉의 화려함에 익숙한 이 공공조차 눈앞의 절경에 넋이 나갔다.
“과연 명성대로군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때, 새하얀 옷을 걸친 목운요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주변에 걸린 등불 덕분에 그녀의 옷이 불그스레 물들면서 아름답던 얼굴에 묘한 매력을 더했다.
“의부님과 이 대인을 뵙습니다.”
그 모습에 이 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가 서릉에 오면 많은 귀부인과 규수들한테서 질투를 살 게 분명했다. 타고난 자태와 청춘 특유의 싱그러움까지 더해지자 저절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늘 불선루에 와서야 그동안 정월 대보름의 풍취를 제대로 느껴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차를 준비했으니 안으로 드시지요.”
금수원에는 다른 곳처럼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나 익살스러운 곡예단 대신, 단정한 옷차림을 한 차 전문가들(司茶)이 전부였다.
하지만 초라하기는커녕 오히려 고급스러운 분위기 덕에 훌륭한 접대를 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이내 목운요가 직접 두 사람에게 차를 대접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그녀의 동작에 이 공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목 소저의 다도 솜씨를 사부님께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더니……. 자수 놓는 솜씨도 그렇지만 다도 실력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목운요가 갓 끓인 차를 찻잔에 따라 두 사람 앞에 건넸다.
“드셔 보시죠.”
이 공공은 조심스레 찻잔을 받쳐 들었다. 예전에 서립이 칭찬해 마지않던, 찻잔 속에서 피어났다는 꽃을 보게 되는 건가 내심 기대가 들었다.
뚜껑을 열자 꽃 대신 가지런히 놓여 있는 찻잎이 보였다. 화려한 화등의 불빛 아래에서 찻잎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보니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대단합니다!”
“보잘것없는 잔재주입니다.”
“소저,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이런 게 잔재주라면 서릉의 소저들은 모두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뛰어들어야 할 거다.
이 공공은 찻잔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 색과 향을 즐겼다. 최고급 벽옥처럼 맑고 푸른빛, 청아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눈과 코를 사로잡았다.
한 모금 마시자, 처음에는 씁쓸했던 맛이 목구멍을 넘어가서는 감칠맛이 나더니, 배 속 가득 은은한 잔향을 남겼다. 마실수록 오묘한 맛이 느껴지는 게 좀처럼 찻잔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훌륭한 차로군요! 차를 제게도 따로 주실 수 있을까요?”
“후후,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미리 챙겨 놨으니 이따 가실 때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 소저.”
“이리 칭찬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하지요.”
목운요가 고개를 깊이 숙여 물러갔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작은 등불을 들고 정원을 거니는 남아의 모습이 보였다. 목운요를 발견한 남아가 후다닥 달려와 절을 올렸다.
“소저를 뵙습니다. 부인께선 금 부인과 함께 이야기 중이세요. 그쪽으로 바로 가시면 돼요.”
“알았어. 손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렴.”
“예! 아모, 려아랑 저 구석에 가서 놀게요.”
“응, 얼른 가 봐.”
이내 금 부인을 만나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 내고 대문까지 배웅한 뒤에야 목운요는 간신히 쉴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문질렀다.
“오늘 정말 힘드네요.”
“요아야, 괜찮은 거야?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야?”
“아뇨,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룻밤 푹 자면 괜찮을 거예요.”
“밥상을 봐 놨단다. 데워 줄 테니 든든히 먹고 푹 쉬렴.”
목운요가 턱을 괸 채로 소청을 바라봤다.
“그보다 내일이 어머니 생신이잖아요. 금수원에서 저희끼리 떠들썩하게 보내는 게 어떨까요?”
“그럴 필요 없단다. 솔직히 말해서 내 생일도 정확히 모르는걸. 난 친딸도 아니었으니, 그 생일이라는 것도 아마 날 주워 온 날일 거야. 그러니 괜한 소란 피울 것 없어.”
그 이야기를 들으니 목운요는 더욱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내일 제가 직접 맛있는 생일상을 차려 드릴 거예요!”
목운요의 반응에 소청은 작게 웃었다.
“그럼 내일 뭘 먹어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겠구나. 네가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 * *
식사를 마친 후, 목운요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월왕이 안에 있다는 게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