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02화 (102/442)

102화 창밖의 등불

* * *

다음 날, 목운요가 초췌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금란은 초조한 기분에 휩싸였다.

“어제 몸이 좀 괜찮아지신 게 아니었나요? 어째 오늘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십니다.”

목운요는 고개를 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월왕이 드디어 마음을 접었나 보지? 다행이야.’

실망감을 애써 누른 그녀가 잡생각을 털어 냈다. 하지만 한때 일렁거렸던 마음이 어찌 예전과 똑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 사실을 지금의 목운요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네요. 금수원도 문을 열어야 하니까 화등(花燈) 같은 건 다 준비해 뒀겠죠?”

“예, 소저. 진 총관님께서 소저의 말씀대로 준비하신 걸 확인했습니다.”

“내일은 올해 처음으로 문을 여는 날이니까 떠들썩하게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예, 오늘 하늘을 보니 내일 날이 무척 맑을 것 같아요. 올해 대박 난다는 조짐이 분명해요!”

“후후, 내일은 의부님과 의모님을 보러 갈 생각이니 미리 준비해 주세요.”

“소저,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데……. 두 분께서도 일단 건강부터 챙기라는 말씀을 전해 오셨습니다. 병이 다 나은 뒤에 찾아뵙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월 대보름인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잖아요. 감기를 옮길 수도 있으니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인사만 드리는 거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예, 그럼 전 내려가서 선물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 * *

금수원 안, 장 의원이 조심스레 월왕의 손을 치료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갈 테니 부디 보중하십시오, 왕야.”

장 의원이 물러가자, 진 총관은 월왕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야, 어쩌다 손을 다치신 겝니까?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심합니다. 손가락 인대라도 끊어졌으면 그 손을 영영 쓰지 못했을 겁니다.”

“실수로 다친 거니 그리 걱정할 것 없다.”

“제가 주인님을 모신 게 몇 년인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 빙등에서 손 떼십시오. 목 소저에게는 제가 따로 빙등을 구입해 선물하겠습니다.”

월왕은 낮에 조각해 둔 빙등을 야심한 밤에 창가에 가져다 두곤 했다. 그렇게 십여 일 내내 잠을 설쳤더니 한눈에 척 봐도 알아볼 만큼 수척해져 있었다.

월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몸이 좋지 않아 외출하기도 어려울 텐데 가여워서 이러는 거다. 게다가 우리한테 큰돈을 벌어다 줬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라고…….”

“암요, 암요! 왕야께서는 가여운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분이시죠.”

옆에 있던 우의가 고개를 치켜들고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가여운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월서 변방에서 백골이 된 자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며 땅속에서 기어 나오고도 남을 거다!

하나 월왕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한숨을 내쉰 진 총관은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물러났다.

한데 우의와 우항이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나오더니, 문을 나서자마자 진 총관을 데리고 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 총관은 불같이 화를 내며 두 사람을 향해 발길질을 해 댔다.

“이놈들이 미쳤나? 내가 놀라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우의가 푸스스 웃으며 재빨리 사과했다.

“어르신, 저희들한테는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주인님께서 옆집의 그분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소택을 가리키는 우의에, 우항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진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의와 우항이 입을 떡 벌렸다.

진 총관은 그런 두 사람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단단히 당부했다.

“입단속 하는 게 좋을 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형제보다 듬직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심하라는 듯 연신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우항을 진 총관이 매섭게 째려봤다.

“오늘 왕야께서 티 내시지 않았다면 너희 같은 둔탱이는 죽을 때까지 몰랐을 거다. 대체 어디가 듬직하다는 건지, 쯧!”

“헤헤, 그럼 앞으로 목 소저를 좀 더 깍듯하게 대해야 하는 겁니까?”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라. 목 소저는 아직 혼례를 올릴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니.”

한숨을 쉬는 진 총관을 보며 우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될지 모르다뇨? 왕야보다 더 잘난 사내가 어디 있답니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는 거다. 왕야께서 요 며칠 기분이 저조하실 거다. 난 불선루 일로 자주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너희들이 왕야를 정성껏 보필하거라.”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정월 대보름 당일, 아침 일찍부터 단장을 마친 목운요가 조부로 향했다.

목운요가 왔다는 이야기에 금 부인은 사람을 시켜 난각(暖閣, 난방 설비를 하여 몸을 녹일 수 있는 작은 방)에 들도록 했다.

“심한 감기에 걸렸다더니, 몸은 괜찮은 거니? 날이 아직 쌀쌀한데 집에서 쉬지, 여긴 뭐하러 와.”

“며칠 동안 못 뵈었더니 의모님이 보고 싶어서요. 그동안은 병세가 심해서 혹여 감기라도 옮길까 봐 차마 오지 못했는데 이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고말고. 네 말대로 날마다 방에서 걸어 다니며 몸을 움직였더니 배 속 아이가 점점 내려오는 게 느껴지더구나.”

“동생이 어머니를 무척 아끼나 봐요. 몸에 조금이라도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알아서 잘하고 있네요.”

출산이 임박했을 때 태아가 산도(産道) 쪽으로 내려와야 산고(産苦)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

그 이야기에 금 부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으니 이따 집으로 돌아갈 때 챙겨 가려무나.”

“예, 감사합니다.”

금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고했다.

“의모님, 감기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가 가고 나면 은홍에게 방을 환기시키라고 하세요. 요 며칠 날이 부쩍 추워진다고 하니 외출은 최대한 자제하되, 방 안에서 꾸준히 운동하시고요.”

“그래, 네 말대로 하마.”

조부에서 나온 목운요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 * *

집으로 돌아온 아이의 모습에 소청은 한숨을 돌렸다. 아이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서 쉬렴. 먹을 것을 만들어 줄 테니.”

“예.”

목운요가 막 몸을 일으킨 순간, 급하게 달려오는 은홍의 모습이 보였다.

“소 부인, 목 소저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급하게 달려왔나요? 일단 앉아서 몸 좀 녹이고 말해 보세요.”

“하아, 하아……. 부인, 소저를 당장 조부로 모셔 가야 합니다. 황상께서 선물을 내리셨다며, 금 부인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소청은 물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금란 등도 뛸 듯이 기뻐했다. 세의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황상께서 선물을 내리셨다는 소식에 그간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며 크게 감격했다.

“그럼 당장 가 봐야겠네요. 어머니, 진 총관님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 주세요.”

“알았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어서 조부에 다녀오거라.”

은홍을 따라 마차에 오른 목운요는 금세 조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금 부인이 손을 잡아 왔다.

“아까 널 잡아 둘걸 그랬구나. 괜한 헛걸음만 하지 않았니?”

짐짓 나무라는 말투를 하면서도 금 부인은 시녀에게 손난로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의모님께 예지력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거예요.”

“요것이! 의모를 지금 놀리는 게야? 나중에 네 동생이 태어나면 누나를 열심히 쫓아다니라고 일러둘 테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 뒤에 동생의 옷을 지을 생각이에요. 옷감도 미리 준비해 뒀고요. 절 쫓아다니게 내버려 두지 못할 만큼, 아주 예쁘게 꾸며 줄 생각이랍니다.”

목운요의 말에 금 부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목운요가 올 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유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잠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어느새 두 사람이 정원에 도착했다.

* * *

“황제께서 이르시되, 경릉성 목운요는 특별한 세의를 올렸기에 황금 백 냥, 비단 열 필, 황금 비늘 한 개, 옥여의(玉如意) 한 개…….”

상이 얼마나 많은지 조서를 다 읽었을 땐 꿇어앉은 무릎이 다 저릴 정도였다.

“황은에 감사드리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조운년과 금 부인 역시 각자 상을 받았다. 종사품 관리로서는 파격적인 대우였기에 조운년은 기쁜 마음을 좀처럼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성지를 가져온 내시에게 차를 대접하겠다며 재빨리 화원으로 이끌었다.

“이 공공(李公公), 어서 오십시오.”

내시는 나이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목운요에게 유독 다정하게 굴었다.

“목 소저, 총관 대인께서 안부 전하라 하셨습니다.”

“총관 대인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 갑자기 안부라 하시면…….”

“아뇨, 소저께서는 이미 만나 보셨습니다. 지난번에 총관 대인께서 소저에게 황상의 말씀을 전해 드린 걸로 압니다. 게다가 총관 대인께 찻잎도 드리셨다면서요?”

“설마…… 서 대인께서 총관 대인이란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서 공공께서 내시 총관으로 승진하셨지요. 저더러 소저를 만나러 가거든 찻잎 좀 얻어 오라 하셨답니다.”

“찻잎은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안 그래도 새해 인사 겸 찻잎을 보내 드리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그 기회가 왔네요. 다른 찻잎도 몇 가지 준비해 봤는데 환궁하실 때 챙겨 드리겠습니다. 서 대인께서 품평해 주시면 소녀로서는 큰 영광일 겁니다.”

“정말 잘되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부님께서 소저가 덖은 차를 마시고 싶다고 날마다 노래를 부르셨거든요.”

서립을 사부라고 부르는 이 공공의 말에 목운요의 눈이 빛났다.

조운년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술상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이 공공,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을 텐데 제가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수고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조 대인을 자주 뵙게 될 텐데 이렇게 격식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공공이 기분 좋게 응대하며 소식을 슬쩍 흘렸다.

그 말에 조운년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 공공의 말대로라면 머지않아 자신이 서릉으로 입성하게 될 거란 말이 아닌가!

“감사합니다, 이 공공.”

조운년이 이 공공을 대접하는 동안, 목운요는 금 부인을 부축해 내원으로 돌아왔다.

“요아야, 너도 얼른 돌아가서 준비하거라. 저녁에 이 공공께서 아마 불선루를 찾아가실 것 같구나.”

금수원에 있을 월왕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조부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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