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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101화 (101/442)

101화 감기

“사야께서 빙등을 만드실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어릴 때 갖고 놀 게 없어서 주로 조각을 했지. 나무토막과 칼만 있으면 몇 날 며칠 동안은 심심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월왕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따금씩 회상에 잠기는 그에게선 말로 설명하기 복잡한 사연이 느껴졌다.

손바닥 한가운데를 찔리기라도 한 듯 목운요는 손을 슬쩍 말아 쥐었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빙등 감사합니다. 다른 일이 없다면 전 좀 쉬어야 할 것 같네요.”

월왕의 눈빛이 목운요를 향했다. 꿰뚫어 볼 것 같은 그 눈빛은 마치 혼백을 움켜잡고 놔주지 않을 것처럼 차가우면서도 뜨거웠다.

“빙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

차가운 말투에 목운요의 몸이 움찔 떨렸다.

“빙등은 영롱하고 반짝거리는 게 무척 아름답지만, 약하기 짝이 없죠. 날씨가 조금만 바뀌어도 원래 모습을 잃잖아요. 정말 좋아하게 되면 쉽게 상처받을 거예요.”

목운요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에, 월왕은 왠지 모르게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려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월왕이 창가에 놓아둔 빙등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 월왕을 향해 목운요는 빈틈없는 미소를 보였다.

“날이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 사야.”

월왕이 목운요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내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사라지는 월왕을 보며 목운요는 창문을 닫은 뒤 비수를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금 침상에 누웠다. 하지만 삼십 분 정도가 지나도 잠이 오지 않자, 그녀는 피풍의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눈밭에 떨어져 있는 빙등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폭신한 눈 덕분에 빙등은 어디 하나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쌓여 있던 눈을 털어 낸 목운요는 빙등을 창가에 올려 두곤, 불을 붙였다. 일렁이는 촛불로 인해 빙등이 따뜻한 빛을 내뿜으며 영롱하게 빛났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빙등을 쳐다봤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훅 밀려 들어와 몸은 차가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월왕이 빙등을 내밀던 순간을 비롯해서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을 대하던 그의 모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장면을 하나씩 곱씹으며 목운요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월왕은 자신을 좋아한다.

자신은 한 번도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회귀 전 진왕의 첩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건 순전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월왕의 마음을 깨달아도 그저 밀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신분 차이는 둘째 치고, 회귀 전 자신의 죽음은 월왕과 관련되어 있었다. 정확한 사실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그와 감정적으로 얽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회귀 전의 빚을 모두 갚은 뒤,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마음을 정한 목운요가 얼음 고양이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가슴 한복판까지 밀려들었다. 그 한기에 그녀의 눈빛 역시 싸늘하게 식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잖아.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월왕도 마음에 두진 않을 거야…….”

손을 거둔 목운요는 침상으로 돌아와 애써 잠을 청했다.

* * *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쑤시고 열이 펄펄 나는 게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괴로운 마음에 목운요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요아야, 요아야! 정신이 드니?”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청이 아이의 이름을 연신 불러 댔다.

목운요는 간신히 눈을 떴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어머니…….”

목소리가 잔뜩 갈라진 걸 보니 감기가 심하게 든 듯했다.

소청이 재빨리 아이를 부축해 자리에 앉히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겨울날에 창문을 열고 자는 애가 어디 있어? 네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아서 아침에 와 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

“아…….”

“아까 장 의원님도 다녀가셨어. 감기가 심하게 왔다며 약을 지어 주셨단다. 금란이 약을 달이고 있으니 죽 먹은 뒤에 약을 먹으렴.”

목운요가 고개를 들고 창가를 살폈다. 창문이 꽉 닫혀 있는 바람에 빙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창문이…….”

“방 안이 답답하면 잠깐 열었다가 닫아야지, 밤새 열어 놓으면 안 돼.”

“예, 알겠어요.”

몽롱한 눈빛, 열이 올라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을 보자 소청은 가슴이 아려 왔다.

“조금 더 자렴. 죽이 다 됐는지 보고 오마.”

목운요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다가 또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평소 병이 잘 나는 편은 체질은 아니지만, 한번 병에 걸리면 좀처럼 낫지 않았다. 골골거리며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지난 한 해 동안 큰 병치레가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새해부터 쓰러질 줄이야…….

다시 깨어났을 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금란과 금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소저, 저희가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이에요. 어젯밤에 늦게까지 노느라 소저가 제대로 주무시는지 확인도 못 하고…….”

“두 사람 탓이 아니에요. 그리고 예전에도 말했듯이 밤새 누군가가 제 방문을 지키고 있는 건 제가 싫어요. 참, 아침에 제 방에 왔을 때 창가에 뭔가 놓여 있지 않았나요?”

“아뇨,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뭔가를 떨어뜨리신 건가요?”

“어젯밤에 심심해서 창가에 눈사람을 만들어 놨는데 아무래도 녹아 버렸나 보네요.”

“그럴 거예요. 아침에 와 보니 창가에 물기가 남아 있더라고요.”

목운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죽과 탕약을 먹곤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해 질 무렵까지 잠을 자던 목운요는 끈적거리는 기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두꺼운 면 이불이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어 땀범벅이었다.

“금란?”

자신의 부름에도 근처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목운요는 미간을 살짝 구긴 채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이불을 젖혔다.

“아픈 줄도 모르는 거냐? 그 몸을 해서 돌아다니겠다고?”

서늘한 목소리에 놀란 목운요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야, 여긴 어떻게……. 금란은요?”

“왜 아픈 거냐?”

월왕은 목운요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다.

목운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이 살면서 아픈 거야 당연하죠. 새해부터 재수가 없어서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월왕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어젯밤에 내가 준 빙등은?”

“후후, 사야께서 직접 던져 버리고선 왜 제게 물으십니까? 정 궁금하시면 계단 밑을 찾아보세요. 아직 녹지 않았다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잘 쉬어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잠시 뒤, 금란이 약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일어나셨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그보다 땀이 나서 온몸이 끈적거리는데 좀 씻게 뜨거운 물 좀 준비해 주세요.”

“감기에 걸렸는데 씻으신다뇨!”

“괜찮아요. 뜨거운 물이면 괜찮을 거예요.”

그때, 소청이 화난 얼굴을 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감기에 걸린 사람이 씻겠다는 게 말이나 돼?”

가뜩이나 몸이 아파 괴로운데 어머니한테 꾸중까지 듣자, 괜히 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에 목운요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에 소청은 화가 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식 쪄 왔는데 안 먹을 거니?”

그제야 목운요가 눈만 빼꼼 내민 채 불쌍하게 대답했다.

“먹을 거예요.”

“어서 일어나렴. 목욕은 절대 안 되지만, 이걸 먹고 난 뒤에 손 씻는 건 허락해 주마.”

자신을 염려하는 소청의 마음을 목운요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기로 했다.

* * *

낮에 얼마나 잤는지, 밤이 되자 오히려 기운이 났다. 가만히 창문을 쳐다보던 목운요는 어젯밤에 놔뒀던 빙등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 녹았겠지? 고양이가 엄청 귀여웠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창밖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에 자세히 살펴보자, 따뜻하게 빛나고 있는 빙등이 보였다.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촛불을 껴안고 있는 얼음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그때, 문밖에 있던 금란이 방 안에서 들리는 기척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목운요는 빠른 손길로 창문을 닫았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난 것뿐이에요. 아무 일도 없으니 계속 쉬어요.”

“예,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절 부르세요.”

“알겠어요.”

빙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빛이 창가에 아른거리니 왠지 차분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목운요가 평화로운 얼굴로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감기 증세는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전날보다 더 심해졌다. 소청은 걱정된 나머지 장 의원을 다시 불러와 치료를 받도록 했다.

목운요는 자신의 상태를 잘 알았지만 탕약을 안 먹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화를 내는 건 둘째 치고 크게 걱정하실까 봐 억지로 쓰디쓴 탕약을 삼켜야만 했다.

금란이 환기를 위해 창문을 살짝 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저, 왠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창가에 물기가 맺혔네요. 대체 어디서 물기가 올라오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제 남은 물기가 채 안 말랐나 보죠.”

그렇게 다시 어둠이 내릴 무렵, 창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목운요는 잽싸게 침상에서 내려와 창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덩그러니 서 있는 빙등만 보일 뿐,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의 빙등은 거침없이 달리는 말이었다. 하늘 높이 발을 치켜들고 울부짖는 모습이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한숨을 내쉰 목운요는 잠시 빙등을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십여 일이 지나도록 매일 밤 그녀의 창문에는 새로운 모양의 빙등이 놓여 있었다.

첫날 나타났던 고양이를 제외하곤, 십이간지 동물 중 원숭이를 뺀 나머지 동물들이 날마다 그녀의 창가를 찾아왔다.

오늘 밤도 빙등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빙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 이상 졸음을 참지 못한 목운요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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