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99화 (99/442)

99화 경릉성에서 올린 세의

우항과 우의의 얼굴에서도 좀처럼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자신들도 세뱃돈을 받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소 부인께서 주신 거니 왕야께서도 뭐라 하시진 않겠지!

그때, 진 총관이 미리 준비해 둔 세뱃돈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목 소저, 제가 드리는 것이니 꼭 받아 주십시오.”

봉투가 두툼한 걸로 봐서는 족히 수천 냥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목운요의 모습에 진 총관은 더욱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금란 등에게도 세뱃돈을 나눠 주며 덕담을 건넸다.

밖에 피워 둔 향불이 거의 다 타 갈 무렵, 제사상에 올릴 음식과 십이간지 모양의 밀가루 떡이 차려졌다.

“부인, 소저. 어서 앉으세요.”

목운요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상을 훑으며 토끼를 찾았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집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잽싸게 토끼를 낚아채 갔다.

월왕이었다.

한편 소청은 토끼 모양의 떡을 차지한 월왕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진 총관의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더욱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먼저 월왕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건 식었네요. 나중에 화로에 구워 먹으면 겉이 바삭해져서 더욱 맛있답니다.”

그 말에 목운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바삭은 무슨. 어머니도 참, 우리 식구도 아닌 사람한테 뭐하러 신경을 쓰시는 건지…….

“어머니, 설마 저희 집안 전통을 잊으신 거예요? 새해에는 자기 띠에 속하는 떡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월왕이 떡을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모르고 그만…….”

“저 아이 말은 듣지 마세요. 전통은 무슨, 마음에 드는 걸 먹으면 그만이지.”

소청은 월왕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넨 뒤 목운요를 슬쩍 째려보고는 접시에 아무 떡이나 올려 줬다.

“이거나 먹으렴.”

왕자가 새겨진 호랑이 한 마리가 접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분한 마음에 호랑이 귀를 한입에 물어뜯자, 소청이 뜨거운 물을 따라 줬다.

“누가 안 뺏어 먹으니 천천히 먹으렴. 하여간 너도 참.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는데 왜 아직도 어린애처럼 구는 거야.”

통통한 몸에 줄무늬가 가득 난, 귀 없는 호랑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선 한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고 싶었다. 목운요는 호랑이와 열심히 눈싸움하느라 월왕의 눈가에 웃음이 스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반면 이를 지켜보고 있던 우의는 옆에 있는 우항을 툭 치며 월왕 쪽을 슬쩍 가리켰다.

“보여?”

보이냐니? 뭐가? 우항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우의의 접시에 떡을 올려놨다. 아무래도 이걸 먹고 싶어서 달라고 했나 보다.

“옜다.”

우의는 당장이라도 험한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곤 고양이 모양의 떡을 공손히 월왕의 접시에 올려 줬다.

“사야, 좀 더 드십시오.”

월왕이 떡을 받아 들자, 우의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었다.

* * *

소택에 모여든 사람들이 훈훈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서릉의 황성 역시 평소보다 몇 배는 밝은 등불 아래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용상에 기댄 황제는 손에 쥔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대전 위에서 펼쳐지는 가무를 감상했다.

황상의 술잔이 빈 것을 본 내시 서립이 재빨리 술을 따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황상, 올해는 대풍년이 들어 황은에 보답하자는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자자하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의를 살펴보니 하나같이 귀하고 아름다워 눈길이 떨어지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호오. 이리 칭찬을 늘어놓는 걸 보니 예사 것이 아닌가 보군. 어디 한번 내와 보라고 하게.”

서립은 속으로 박수를 치며 엄선한 세의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황상, 이것은 노동(魯東) 순무가 올린 태산(泰山)의 신석(神石)입니다. 캄캄한 밤중에도 빛을 낸다고 알려진 것인데, ‘수(壽)’라는 문양이 천연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합니다.”

하나 정성스레 올려진 선물을 보는 황제의 눈에선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봤자 돌멩이지, 다를 게 뭐 있겠나? 다른 건 없는가?”

“경릉성에서도 세의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상께서 상을 내렸던 하운방을 필두로, 경릉성 백성들도 힘을 보태 준비한 것이라고 들었사옵니다.”

“짐에게 선물을 바치느라 백성들을 불안케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황제의 이야기에 서립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제 막 내시 총관으로 발탁된 데다, 목운요를 띄우느라 황상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다행히 황제가 화제를 돌렸다.

“경릉성에서 보냈다는 세의를 가져오너라. 백성들이 함께 준비한 것이 뭔지 궁금하구나.”

이내 내시 몇 명이서 커다란 틀을 들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척 봐도 병풍 같은데, 붉은 천으로 덮여 있어서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

경릉성의 세의를 확인한 여러 대신들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소문원을 슬쩍 쳐다봤다. 지난번 황제의 생신 때 소문원은 병풍을 올렸다가 크게 낭패를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소씨 가문은 지난 반년 동안 병풍 사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써 왔다. 성공이 머지않았는데 경릉성에서 떡하니 병풍을 올리니, 소문원으로서는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시들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황상은 지난번 소문원의 병풍 선물을 떠올리곤 이내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뭐 그리 대단하길래 저리 꽁꽁 감쌌단 말이냐? 천을 벗겨 내거라!”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내시들은 깜짝 놀라 붉은 천을 허겁지겁 거둬 냈다.

대낮처럼 밝은 대전 한가운데 세워진 병풍의 모습에 모두들 말을 잃었다. 몇몇은 퍼뜩 정신을 차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경릉성에서 올린 세의는 병풍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틀에 세워진 자수 작품이었다.

대전 안을 대낮처럼 밝힌 등불 아래, 금사로 수놓인 ‘만.수.무.강’이라는 네 글자가 구름 한가운데서 모습을 드러냈다.

황상마저 눈을 크게 뜨곤 작품을 찬찬히 살펴봤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내 황상은 단 아래로 내려와 가까운 데서 자수 작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볼수록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만수무강이라는 글자는 서로 다른 필체로 쓴 글자를 일일이 모아 만든 것 같군. 대체 몇만 자나 되려나?”

어두웠던 황제의 낯빛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보며 서립은 식은땀을 몰래 닦아 냈다.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고 확신한 그는 황제의 질문에 잽싸게 입을 열었다.

“순무 장백용(張伯庸)이 작품의 사연을 적은 서한을 같이 보내왔습니다.”

“어서 가져와 보거라.”

장 순무가 올린 서한을 읽어 본 황상의 얼굴이 전보다 몇 배는 환해졌다.

“이 글자들은 복을 타고났다는 노인들이 쓴 것을 모은 것인데, 그 수만 무려 만육천여 명이라고 하더군. 같이 모은 종이도 보냈다고 하던데, 그것들은 지금 어디 있지?”

“사람을 시켜 바로 대령하겠나이다.”

잠시 뒤, 몇몇 시위들이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상자를 열자, 만수무강이라고 적힌 종이가 상자 가득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서립이 종이 몇 장을 황제에게 올렸다.

종이를 받아 든 황제는 병풍을 자세히 관찰했다. 병풍에 수놓아져 있는 만수무강이라는 네 글자는 필체는 물론 크기도 제각각이라서 짝이 맞는 글자를 단박에 찾아내기 어려웠다.

“경들도 나와서 짝이 맞는 필적을 찾아보시구려.”

그 말에 몇몇 대신들이 종이를 들고 병풍 앞에 서서 일일이 필체를 맞춰 보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종이에 적힌 필체는 여기 이 글자와 짝이 맞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는 것인가?”

“소신도 찾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황상.”

종이를 쥔 채로 자수 작품 속 글자를 맞춰 보는 대신들로 인해 대전이 평소와 달리 왁자지껄해졌다.

“수를 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만 자나 되는 필적이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한데 모아 놓으니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도 엄청난 위엄과 기력이 느껴집니다.”

“역시 황상께서 상을 내리실 만했습니다. 수놓는 솜씨가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황제 또한 저도 모르게 칭찬의 말을 꺼냈다.

“허허, 목운요라 했던가? 어린 나이에 손재주가 이리 좋다니,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서립은 재빨리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황상, 뒤편의 도안을 보시겠습니까? 이쪽이 더 대단한 듯합니다.”

내시들은 잽싸게 움직여 작품의 뒤편을 공개했다. 곧 커다란 황룡(黃龍)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리부리한 눈의 황룡은 보통 사람이라면 절로 몸이 움찔거릴 만큼 압도적인 박력을 풍기고 있었다.

“멋지군!”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황룡에, 황상은 만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운요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순무와 염운사 또한 민생을 안정시키고 부유케 했으니 그 공을 높이 사 상을 내리도록 하겠노라!”

서립은 공손한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굳게 다문 입과 달리 그의 가슴은 요란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드디어 내 시대가 열렸구나! 누구도 날 막지 못할 것이다!’

* * *

금수원으로 돌아온 월왕은 곧바로 침상으로 향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찬합을 든 진 총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야, 아까 보니 소 부인이 빚은 떡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남은 떡을 몇 개 챙겨 왔습니다. 출출하실 때 드십시오.”

진 총관의 반짝이는 눈빛에 월왕은 왠지 모르게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날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서 쉬게.”

“예, 그만 가 보겠습니다. 참, 소 부인께 손아래라고 하셨으니, 예법에 따라 내일 아침 일찍 소택에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시는 게 어떨지…….”

“알았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푹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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