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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95화 (95/442)

95화 월왕의 방문

그에 황제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의덕 장공주의 서신을 조심스레 접어 들었다.

“누님께서 짐에게 군왕의 책임을 항시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겠지. 서립, 짐이 준비한 선물에 진주와 취옥 열 개, 비단 열 필을 보태거라. 잠깐. 서신을 쓸 테니 그것도 같이 전해 드리고, 기거하시는 곳에 부족한 게 있는지 살핀 뒤 짐에게 알려다오.”

“알겠사옵니다.”

서립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광대를 끌어 내리려 애를 먹었다.

그동안 황상께서는 장공주에게 물품이나 서한을 보낼 때는 항상 내시 총관인 덕 공공(德公公)을 찾으셨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황상과 장공주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된 것이다!

곧 내시들이 황제 앞에 있는 탁자를 치우더니, 종이와 붓, 먹 등을 대령했다. 황제는 서신을 다 쓴 후에야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신들에게 눈길을 던졌다.

“됐소. 모두 일어나시오. 장공주께서 보내 주신 서화를 보고 군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스스로 돌아보시게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신들은 품계에 따라 돌아가며 이숭 대사의 작품을 살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막상 그림을 보고 나니 생동감 있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쯧, 다른 관리들은 정적을 쌓기 위한 방도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경릉성 관리들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명예와 업적을 손에 넣다니. 질투로 눈이 멀 지경이었다.

* * *

무심코 손댄 일이 서릉에서 또 한 차례의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한 목운요는, 새해가 다가오자 하운방과 불선루의 문을 닫고 새로이 단장한다고 외부에 알렸다.

간만에 시간이 난 그녀는 모처럼 마음 편히 쉬기로 했다. 그네도 뛰고 투호(投壺) 던지기도 했다. 금란 등과 신이 나서 놀다 보니 금수원에 해맑은 웃음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진 총관은 꽁꽁 언 호수 위를 조심스레 걸어 다니는 그림자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얌전한 줄만 알았는데, 밖에다 내다 놓으니 온몸에 눈을 묻혀 가며 노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우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총관님, 내일이면 새해인데 왕야께선 어찌 지내고 계실까요?”

“쩝, 새해라고 해도 평소처럼 월서에서 보내시겠지. 그래도 이번엔 생강차도 있고 은자도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좀 나으실 게다.”

“왕야께서도 이곳에서 새해를 보내시면 좋을 텐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왕야께서 오실 턱이 있겠느냐?”

그 순간, 우의가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더니 진 총관의 뒤를 다급하게 가리켰다.

“와, 왕야?!”

“새해부터 웬 헛소리야? 그렇게 꽥 하고 부르면 왕야께서 네놈 앞에 나타나시기라도 할 것 같으냐?”

“와, 왕야께서……. 총관님, 뒤, 뒤돌아보십시오!”

혀를 끌끌 차던 진 총관이 속아 넘어가 준다는 듯 뒤를 돌았다.

“와, 왕야?!”

쟁반만큼 휘둥그레진 진 총관의 시선 끝에 두툼한 피풍의를 걸친 월왕이 보였다.

어안이 벙벙하던 것도 잠시, 진 총관이 크게 기뻐하며 달려갔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왜 밖에 있는 거지?”

진 총관은 평소 허리가 좋지 않았다. 월왕을 돌보다가 얻은 병이었다. 그래서 월서에 함께 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것이기도 했다.

월왕의 물음에 진 총관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허리는 이제 멀쩡합니다. 이것도 다 목 소저 덕분이지요! 목 소저는 의술도 뛰어나 침술로 제 병을 많이 고쳐 주었답니다.”

그때, 갑자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소저! 빨리요, 빨리!”

“오늘은 반드시 소저를 이기고 말 거예요!”

금란과 금교 등에게서 도전을 받은 목운요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번에도 지면 몇 달 치 은자가 전부 내 차지가 될 테니까요! 그때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요.”

“흥, 소저 뜻대로는 안 될걸요.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연습했다고요. 이번에야말로 소저한테서 잃었던 돈을 몽땅 되찾을 거예요. 한 푼도 남김없이요!”

“후후,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판을 키워 볼까요? 제가 지면 백 냥 더 낼게요. 반대로 제가 이기면 백 냥 더 내놔야 해요.”

“좋아요!”

그 모습을 보던 진 총관이 눈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왕야, 목 소저가 시녀들과 얼음 위에서 경주를 하려나 봅니다.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왕야께서도 가 보시렵니까?”

그에 옆에 서 있던 우항의 입가가 슬쩍 비틀렸다. 왕야께선 춥고 거친 월서에서 몇 날 며칠 동안 말을 타고 오셨다. 조금이라도 빨리 쉬시게 해도 모자랄 판에 구경은 무…….

한데 그때, 월왕이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보며 우항의 입이 떡 벌어졌다.

“초, 총관님, 어, 어째서…….”

우의는 그런 우항의 팔을 낚아채며 진 총관을 향해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단단히 가르치겠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목 소저에 관한 일이라면 진 총관이 가차 없이 군다는 사실을 눈치챈 우의였다. 우항이 엉뚱한 말을 내뱉는다면 진 총관이 곱게 보내 주지 않을 거다.

우의의 말에 진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월왕을 따라 호숫가 옆 정자로 걸음을 옮겼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정자에 오르자 호수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반대로 호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자 안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자에 앉은 월왕의 시선이 호수 위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호수 위에 선 목운요는 빙혜(氷鞋)를 신은 채 도발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은자는 준비했겠죠? 은자를 못 내놓으면 딱밤이에요!”

옆에서 구경하던 남아가 재빨리 나무 상자를 가져와 안에 든 은자를 보여 줬다.

“소저, 내기 돈은 제가 확인했어요. 여기서 잘 지키고 있을게요.”

“후후, 좋아. 저 돈을 내가 몽땅 따서 사탕 사 줄게!”

“우왓, 감사합니다, 소저!”

“흥,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승리를 장담하십니까?”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모두들 호수 남쪽의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목운요는 물 찬 제비처럼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는지, 바람에 펄럭이는 치맛자락이 마치 한 송이의 꽃을 연상시켰다.

결국 가장 먼저 호수 북쪽에 도착한 이는 목운요였다.

“소저, 삼 일 후에 다시 겨뤄요. 그땐 반드시 저희가 이걸 거예요!”

금란 등이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씩씩대자, 목운요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기분도 좋으니 멋진 걸 보여 줄게요.”

“멋진 거라뇨?”

목운요는 빙그레 웃음을 지은 채 멀찍이 나아가더니, 호수 한쪽에 걸어 둔 붉은 비단 천을 끌어당겨 길이를 확인했다. 이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비단 천을 손목에 묶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음 위를 지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손목에 묶인 붉은 천이 구름처럼 퍼져 나갔다. 그녀의 춤 동작에 맞춰 일렁이는 비단 천은 붉은 연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붉은 천을 좇다 보니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아름답다는 말 외에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동작을 멈춘 목운요가 숨을 고르며 손목에 묶은 천을 풀었다. 넋이 나간 사람들을 향해 목운요는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이내 그녀의 눈이 쟁반만 하게 휘둥그레졌다.

월왕이다!

* * *

호수를 바라보는 차가운 월왕의 눈이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움으로 변했다.

목운요는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았다. 처음 봤을 땐 겁쟁이 소녀인 줄 알았는데, 제 상처를 치료해 줬을 뿐만 아니라 비수를 훔쳐 사람을 해쳤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소 철두철미하고 계산도 빠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열람에게 선심을 베푼 일이나 자유국의 고아들을 거둔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지금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이라니…….

들여다볼수록 그 속이 보이지 않는 여인이 시나브로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월왕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차게 식은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진 총관은 그러한 월왕의 미묘한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뜨거운 차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왕야, 새로 덖은 연꽃차인데 이것도 한번 드셔 보십시오. 연잎과 연꽃에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거랍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월왕의 시선이 다시 호수로 향했다. 새하얀 얼음 위로 붉은 비단 천이 구불구불 펼쳐져 있을 뿐, 목운요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시선을 좇던 진 총관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목 소저는 옷을 갈아입으러 간 것 같습니다.”

평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목운요였다. 왕야가 온 것을 봤으니 분명 옷을 갈아입으러 갔을 거다.

호수 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자 우항이 월왕에게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갈 쉴 것을 권했다.

그 모습에 진 총관은 가자미눈을 치켜떴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의가 무슨 계시라도 받았는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왕야, 설경이 무척 아름다운데 잠시 둘러본 뒤에 쉬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우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한겨울이라 썰렁하기 그지없는 풍경 어디가 아름답다는 건가?

하지만 우의의 제안에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월왕의 대답에 우항은 눈을 껌뻑거렸다. 제 주인이 대체 언제부터 설경을 ‘감상’하게 됐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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