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남다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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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안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손님들은 조운년과 금 부인에게 목운요가 지은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평소보다 옷에 신경을 썼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목운요는 여태껏 여인네들의 옷만 지은 터라 처음 선보이는 남성 의복에 대한 궁금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조운년과 금 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하던 대청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조운년은 짙은 푸른색 옷을 걸쳤는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군자란 무늬가 펼쳐져 부드러우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덕분에 조운년은 열 살은 어려 보일 만큼 힘이 넘쳐 보였다.
뒤따라 들어온 금 부인의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푸른 치마 위로 분홍색 모란 무늬와 푸른 나비들이 부푼 배를 뒤덮고 있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은 물론, 특유의 화려함 덕분에 고귀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자, 사람들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금 부인의 치마 위를 날아다니는 푸른 나비 한 쌍이 마치 조운년의 군자란에서 날아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두들 두 사람의 조화를 깨달으며 감탄을 터뜨렸다. 그중에는 목운요를 여러 번 곁눈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길래 저런 구성을 이끌어 낼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렇게 심오한 의미가 깃든 옷을 자신은 입어 볼 수 없다는 게 꽤나 원통했다.
결연식으로 목운요가 득을 볼 거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누가 누구의 득을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연회가 시작되자, 목운요와 소청을 대하는 부인들의 태도가 유별나게 다정해졌다.
척 봐도 바라는 것이 있는 얼굴인데도 목운요는 짐짓 모른 체하며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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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시진 가까이 열렸던 연회가 끝나고, 손님들을 배웅한 후 목운요는 안으로 돌아왔다.
“의모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네가 각별히 신경 써 준 덕분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단다.”
금 부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맥을 짚는 목운요를 살폈다. 볼수록 마음이 가는 아이다. 지금 걸친 옷은 가벼울 뿐만 아니라 따뜻했다. 심지어 신발마저도 바닥에 솜과 쑥을 넣어 몸에 뜨끈한 열기를 전해 주었다.
맥을 짚고 난 뒤 목운요가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맥도 안정적이네요. 오늘 동생도 꽤 즐거웠나 봐요. 그래서 의모님 고생도 시키지 않고 잘 놀았던 것 같아요.”
“후후, 지금처럼 얌전히 굴기만 하면 자다가도 웃을 것 같구나. 아얏, 이 녀석. 어미의 말이 거슬렸는지 또 발길질이구나.”
목운요는 금 부인의 배를 가볍게 쓸며 짐짓 화난 듯 입을 열었다.
“말썽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안 그러면 누나가 안 놀아 줄 거야.”
우연인 것일까? 발길질을 하던 아이가 목운요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얌전히 굴자 금 부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목운요도 한바탕 웃어 댔다.
“의모님,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어서 쉬세요.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너도, 동생도 오늘 고생 많았구나. 어서 가서 쉬렴.”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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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청은 여전히 들뜬 상태였다.
“요아야, 네가 조 대인과 금 부인에게 지어 드린 옷을 본 여러 부인들께서 날 유난히 다정히 대해 주시더구나. 옷 한 벌의 가치가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어.”
“후후, 그게 어디 옷 때문인가요? 옷이 보여 주는 신분 때문인걸요.”
“그게 무슨 말이니?”
“옷을 따로 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죠. 하지만 의부님과 의모님이 걸치신 옷을 한데 놓고 보면 꽃을 사랑하는 나비를 연상시키니, 부부간의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 연회에 참가한 정실부인들께서는 본처이긴 해도 정작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실제로 경릉성에서 첩실을 두지 않은 가문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옷 한 벌로 총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잃었던 총애를 되찾아 준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신분을 드러낼 수는 있으니까요. 이런 옷은 정실부인이 걸쳤을 때만 부군과 온전한 ‘한 쌍’이 될 수 있거든요.”
아이의 말에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귀족 부인들은 그저 마음 편히 산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구나.”
“큰 집일수록 드나드는 문이 많은 법이니까요. 어머니도 앞으로 그분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많이 듣고 보다 보면 천천히 그 이치를 깨닫게 되겠지.”
자신을 위해 평소와 달리 용기를 내는 어머니의 모습에 목운요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니가 계셔서 정말 좋아요.”
“하여간…… 얘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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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성 한복판에서 진 총관 등은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죽을 나눠 주는 일을 돕던 사람들 중에는 걸어갈 힘도 없다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이들도 여럿 됐다. 멀건 죽 몇 사발에 경릉성 백성들이 뜨겁게 호응할 줄이야.
우의가 진 총관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경릉성의 모든 백성이 죽을 받아 간 건 아니겠죠?”
“어디 그뿐이랴?”
“그 말씀은…….”
“그래, 지금 경릉성에 객상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도 죽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모습을 여럿 보았다. 그들이 죽 한 사발 받으려고 줄을 선 건 아닐 거다.”
“그럼 뭐하러 힘들게 줄을 선 건가요?”
“쯧, 시위를 고를 때는 무공과 충성심만 볼 게 아니라 머리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왕야께 그리 말씀드렸건만……. 오늘 백성들이 죽을 받아 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더냐?”
“무척 감동받았습니다. 그거 외엔 딱히 특별한 건 없었는데……. 아, 힘들기도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느냐?”
우의는 여전히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후후, 죽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죄다 먹을 게 없어서 힘들게 줄을 선 것은 아닐 게다. 그보단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지. 내 추측이 맞다면 경릉성의 이름이 또 한 번 세상에 울려 퍼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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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이유로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가 막을 내리고, 붉은 해와 함께 새로운 날이 시작됐다. 목운요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새해맞이 준비에 나섰다.
두 번째 삶을 허락받은 후 어머니와 보내는 첫 새해였다. 그래서 새해맞이 준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새해를 무탈하게 시작하면 남은 한 해 동안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각, 특별한 선물이 황성으로 전해졌다.
조정 대신들이 모두 모인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내시 서립이 두루마리를 든 호위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상을 뵙습니다.”
“으음?”
서립 뒤에 서 있는 이들을 확인한 황제의 용안이 환해졌다.
“저들은 의덕(懿德) 장공주(長公主, 황제의 누이)를 보필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장공주 휘하의 자들로, 황상께 특별히 드릴 선물이 있다 하여 찾아왔나이다.”
황제는 기쁜 마음에 보좌에서 일어나 계단 아래로 직접 내려왔다.
“장공주께선 언제나 짐을 챙겨 주시는구나. 국운을 위해 호국사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시면서도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시다니…….”
그 말에 조정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찬사를 보냈다.
“의덕 장공주와 황상의 정이 이리 돈독하신 걸 보니 무척 보기에 좋습니다.”
“의덕 장공주께서 나라를 위해 기원을 올리고 있으시니, 이는 천하 여인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신하들의 말에 황제는 더욱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의덕 장공주는 그의 친누이이자, 그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했다.
유달리 동생을 아꼈던 장공주는 그가 황위에 오르자, 모든 영광을 동생에게 돌린 채 조용히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장공주께서 어떤 선물을 보내셨느냐?”
호위들이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쳤다. 길이 칠 척, 너비 사 척에 달하는 두루마리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강남의 가옥 양식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죽을 나눠 주는 막사 앞에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어 정답고 푸근한 기운이 절로 넘쳐흘렀다.
그림을 훑어보던 황제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을 나눠 주는 경릉성이라……. 이, 이것은 이숭(李崇) 대사의 작품?!”
호위가 재빨리 서신을 올렸다.
“황상, 장공주 전하의 친필 서한이옵니다.”
황제는 서신을 받아 들곤 자세히 그 내용을 살폈다.
한편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들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최근 조정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이 다름 아닌 경릉성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상께서 직접 상과 묵보를 내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성에게 죽을 나눠 주는 경릉성의 전경을 담은 그림이라니?!
섣달 초파일에 죽을 나눠 주는 것이야 오랜 관습 아니던가. 한데 어찌 경릉성만 콕 집어 황상에게 바친단 말인가. 이숭 대사께서 손수 그린 것이 아니었다면 경릉성 관리들이 황상의 총애를 받고자 일부러 이런 짓을 꾸몄을 거라 의심했을 것이다.
황제는 의덕 장공주의 서한을 다 읽더니 다시 한번 그림을 살폈다. 그러곤 한참 뒤에야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들도 모두 와서 보시구려. 이처럼 민간의 상인들이 백성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데, 국록을 축내는 관리들이 많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려.”
“송구스럽사옵니다.”
황제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