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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93화 (93/442)

93화 지극한 효심

* * *

그렇게 음력 섣달 초파일이 되자, 조부는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었다. 조부의 하인들이 전부 나와 집 안 곳곳을 쓸고 닦는 가운데, 조운년도 조금은 긴장한 채로 새로 지은 옷을 꺼냈다.

금 부인은 그 옆에서 시중을 들며 자신이 만든 주머니를 걸어 준 뒤에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아를 의녀로 맞이하는 데도 각별히 신경 써 주시는 걸 보니,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버지를 둘 겁니다.”

그에 조운년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금 부인의 둥그런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우리의 첫 아이니 당연히 아껴 줘야죠. 불면 날아갈세라, 손대면 다칠세라 그렇게 떠받들어…… 엇, 부인! 방금 아이가 발길질을……. 발길질하는 게 느껴지시오?”

조운년은 신기한 듯 눈을 쟁반만 하게 뜨더니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에 금 부인의 마음이 따스하게 녹는 것 같았다.

“아이가 제 아버지인 줄 알고 인사하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아이에게 입힐 옷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부인은 몸조리에나 집중하구려. 주 이낭의 자수 실력이 괜찮다고 하던데, 평소 딱히 할 일도 없는 것 같으니 옷을 지으라 일러두겠소.”

금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왕 이낭이 사라진 뒤로 괄괄한 성미의 주 이낭이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아녀자의 덕목을 단단히 가르쳐야겠다.

“제가 직접 사람을 시켜 그리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때, 초대장을 든 손님들이 속속 조부에 도착했다.

조운년은 직접 나와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걸 보며 사람들은 조운년 내외가 목운요를 얼마나 아끼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어린 소녀가 움켜쥔 것이다. 후한 선물을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손님들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목운요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 부인이 각별히 목운요를 아끼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단아한 몸짓이나 고상한 자태는 누군가한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 봐도 남다른 재주를 지녔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이 모두 조부에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목운요가 금 부인을 부축한 채 나타났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연식이 끝나면 운요는 이제 제 딸이니 앞으로 잘 가르쳐 주십시오.”

“축하드립니다, 부인. 운요처럼 착하고 똑똑한 아이에게 가르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 소저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지요. 부인께서 잘 가르치시면 분명 이름을 날릴 만한 미인이 될 겁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목운요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니, 금 부인이 아이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줬다.

그때, 은홍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 소저! 길시(吉时)가 되었으니 얼른 나와 보십시오.”

금 부인은 몸을 일으키며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결연식이 이제 시작되려나 봅니다. 모두 가시죠.”

“예, 어찌 좋은 구경을 놓칠 수 있겠습니까!”

금 부인은 목운요의 손등을 두드리며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그러자 목운요가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올린 뒤 물러갔다.

안채에서 대기 중이던 소청은 딸에게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요아야, 어떻게 되고 있니?”

금 부인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아이가 손님을 맞이하러 나섰다가 책을 잡히는 건 아닌지 초조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구나. 길시가 거의 다 된 것 같으니 어서 옷을 갈아입으렴.”

소청이 빨간색 비단 치마를 집어 들어 건넸다. 목운요는 비단 치마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더니 머뭇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만 일 년이 됐지만, 그래도 이렇게 요란한 옷은 입고 싶지 않아요.”

아이의 말에 소청의 손이 멈칫하더니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라에서 효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긴 하지만, 민가라면 일년상을 치러도 충분해.”

“아뇨. 그래도 규율이 엄한 가문이라면 손가락질받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연보라색으로 입는 게 좋겠어요. 금 부인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예요.”

“……알았다. 네 뜻대로 하렴. 네 아버지께서 이런 네 마음을 아시면 분명 감격하셨을 텐데…….”

여보, 하늘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면 우리 요아가 꼭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지켜 줘요.

목운요는 옷을 갈아입고선 신중히 머리 장식을 골랐다. 매무새를 막 정리하자, 서두르라는 금 부인의 말씀이 있었다고 사금이 알려 왔다.

“어머니, 준비되셨으면 가시죠.”

대청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목운요가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호위 하나가 급하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조 대인, 보고드립니다. 장 순무와 그 부인께서 문밖에 당도하셨습니다.”

“내가 직접 가서 뵙겠다.”

이 소식에 화색을 띤 건 조운년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순무 내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은 터라 두 사람의 등장을 모두가 반가워했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연회는 충분히 참가한 보람이 있었다.

조운년의 안내로 순무 내외가 금세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들 인사를 건넸다.

순무 부인은 친근한 미소를 띤 채 금 부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운요는 나도 참 좋아하는 아이예요. 착하고 효성이 지극한 아이를 딸로 맞이하다니, 복도 많으십니다.”

“그렇네요. 그래서 그런지 자다가도 웃음이 나온답니다. 오늘 결연식에 부인께서 와 주신 것만도 정말 영광입니다. 체면 불고하고 요아에게 상을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네요.”

“후후, 부탁이라뇨? 당연히 챙겨야 할 것을요. 그렇지 않아도 미리 준비해 왔답니다.”

“요아를 대신해 부인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요아에게 부인께 차를 올리라 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내 조운년이 목운요를 들이라고 일렀다.

모두의 시선 속에서 목운요가 소청과 함께 서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운요는 구름무늬가 들어간 연하늘색 상의에, 연둣빛 자수가 들어간 보랏빛 치마를 걸친 채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풀거리는 비단 치마 위로 덧대어진 얇은 천이 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소녀 운요, 순무 대인과 순무 부인을 뵙습니다. 의부님과 의모님께도 인사 올립니다.”

목운요를 살피는 조운년의 눈빛이 만족스럽다는 듯 빛났다.

“요아야, 일어나거라.”

금 부인도 소청을 데리고 장 순무와 순무 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순무 부인은 소청을 일으켜 세우며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소 부인, 일어나세요! 오늘은 두 사람이 주인공이니 내일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십시다.”

“감사합니다, 순무 부인.”

결연식이라고 해서 그리 복잡한 예식은 아니었다.

목운요가 조운년과 금 부인을 향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한 뒤 차를 올리자, 두 사람이 찻잔을 건네받고는 한 모금 마셨다.

뒤이어 미리 준비해 둔 쟁반에 덮여 있는 붉은 천을 젖히니, 황금으로 만든 그릇과 수저, 장수를 기원하는 백세쇄(百歲鎖)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운년은 그것들을 목운요의 손에 건네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넌 나와 부인의 의녀이다. 나와 네 의모 모두 네가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기도하마.”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을 보며 목운요는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의부님, 의모님께 감사의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의부님, 의모님. 저도 두 분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합니다.”

금란과 금교가 각각 쟁반을 든 채 걸어 들어왔다.

쟁반 안에 담긴 걸 확인한 금 부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왔다.

“정말이지, 너란 아이는……. 곧 있으면 새해라서 급하게 날을 잡았는데, 기껏해야 네댓새 동안 이걸 준비했단 말이니?”

목운요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조운년과 금 부인을 위해 직접 지은 옷이었다. 옷에 새겨진 자수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목운요의 솜씨가 훌륭하다고 해도 요 며칠 밤을 지새웠을 것이 분명했다.

순무 부인이 부럽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렇게 효심이 지극하다니……. 두 사람, 정말 복도 많습니다. 이따가 연회에서 이것으로 갈아입고 오세요. 구경이라도 실컷 하게 말입니다.”

금 부인은 목운요를 한껏 치켜세워 주고 싶은 마음에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경릉성 곳곳에 죽을 나눠 주기 위한 막사가 세워졌다.

진 총관은 불선루 문을 닫은 뒤 위일, 운춘 등과 함께 거리로 나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운방의 사람들도 힘을 보탰다. 죽을 끓이는 이도 있었고 침방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천을 나눠 주는 이도 있었다.

높이 쌓인 곡식 자루의 등장에 경릉성 전체가 들썩거렸다.

이전에도 죽을 쒀서 베푸는 이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흉내 내는 데만 그쳤을 뿐이었다. 선심을 베푼다며 멀건 죽을 쒀서 거지들한테 나눠 주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에 그릇과 수저를 든 사람들이 죽을 받으러 앞다퉈 달려왔다.

이내 사람들은 솥 안에 끓고 있는 죽을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커다란 주걱으로 죽을 휘저을 때마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퍼져 나왔다. 찹쌀, 율무, 연꽃씨, 백합, 붉은 대추, 좁쌀, 호두, 콩…… 대충 세어 봐도 십여 가지의 재료가 들어 있었다.

진 총관은 가장 먼저 죽을 받으러 온 노인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그릇 가득 죽을 담아 주었다.

“천천히 드시구려. 먹다가 부족하거든 더 받으러 와도 되니.”

“어이쿠, 이렇게 많이…….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늙어서 많이 먹지도 못해 오늘 끼니는 이걸로 충분합니다.”

진 총관이 옆에 있던 나무통에서 한가득 설탕을 담아 노인의 그릇에 뿌려 줬다.

“맛있게 드시구려.”

“감사합니다, 총관님. 감사합니다, 금 부인, 목 소저!”

앞서 노인이 감사 인사를 건넨 탓일까? 죽을 받으러 줄을 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금 부인과 목 소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말도 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조차 더듬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모습에 진 총관은 괜스레 콧등이 시큰거렸다.

죽을 받은 사람들이 구석에 선 채로 죽을 먹자, 삽시간에 거리 곳곳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죽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따뜻한 죽 한 사발에 경릉성 전체가 따뜻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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