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생강차를 보내 준 소저
* * *
그 후 목운요는 두문불출한 채 세의를 준비하는 데만 매달렸다.
그런 목운요를 금 부인이 두어 번 찾아왔다. 빠른 속도에 놀란 금 부인은 더 이상 방문하지 않고 이따금 사람을 시켜 선물만 보내곤 했다. 때로는 머리 장식, 때로는 간단한 주전부리를 보내기도 했는데, 목운요는 거절하지 않고 금란에게 잘 받아 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보름 뒤, 진 총관이 월왕의 답장을 전해 주었다.
뻣뻣해진 손목과 손가락을 풀며 목운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빨리 답장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진 총관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 미소가 평소보다 유난히 빛나 보였다.
그의 미소에 목운요는 어리둥절해하며 서신을 펼쳤다.
서신에는 ‘알겠다.’ 딱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월왕은 말이 짧은 편인 것 같다.
목운요는 미간을 구긴 채로 진 총관에게 서신을 보여 줬다.
“그러니까…… 알겠다고 하셨는데, 월왕 전하께서 뭘 아신다는 건가요?”
휘둥그레 뜬 눈과 달리, 진 총관은 속으로 성가 놈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고 있었다.
대체 성가 놈은 옆에서 뭘 하길래! 왕야께서도 목 소저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달랑 세 글자라니?! 이거라면 왕야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귀신도 모를 거다!
진 총관의 표정이 푸르죽죽해지자, 그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할 생각이 없던 목운요가 애써 입을 열었다.
“월왕께 자세한 내용을 묻는 서신을 써야겠네요. 서신이 도착할 쯤이면 생강차도 월서에 전해졌을 겁니다.”
진 총관은 식은땀을 연신 닦아 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목 소저의 성품이 고와서 다행이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반응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 왔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성가 놈에게 당장 서신을 보내야겠다. 목 소저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 고운 마음씨와 총명함에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인데, 왕야께서는 그 흔하디흔한 공치사도 할 줄 모른단 말인가!
* * *
월왕이 갑자기 재채기를 하자, 마침 그 앞에서 정황을 보고 중이던 성 공공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왕야, 요새 날이 부쩍 추워졌으니 든든히 입고 다니셔야 합니다. 마침 진가 놈이 여우 가죽으로 만든 피풍의를 두 벌 보내왔습니다. 이걸 걸치시면 왕야의 위엄이 한껏 드러날 겝니다. 사람을 시켜 말려 둘 테니 내일부터 입도록 하십시오.”
월왕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또다시 보름이 지났을 무렵, 찻잎이 월서에 도착했다.
시위들은 마당 한가운데에 커다란 포대 자루를 하나씩 내렸다. 우항은 그중 하나를 꺼내 월왕이 보는 앞에서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는 습기를 막기 위해 두꺼운 천이 둘러져 있었다. 천을 걷어 내자 향긋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코를 벌름거리더니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월서에서는 식량을 구하는 게 어려워 겨울이 되면 시위들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다.
생강차 향기를 맡자, 모두의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연신 새어 나왔다.
월왕은 생강차를 한 줌 쥐더니 슬쩍 문질러 보았다. 그 눈빛은 평소처럼 여전히 차가웠지만 미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때 성 공공이 잽싸게 그릇을 준비해 왔다. 목운요의 업적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시위들의 손에 그릇을 하나씩 쥐여 줬다.
“왕야, 저희들도 맛을 봐도 되겠습니까?”
허락을 구하는 말투와 달리 그의 손은 이미 그릇 가득 찻잎을 담고 있었다.
월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곧 마음 급한 몇몇 사람들이 차 가루를 입에 바로 털어 넣었다.
“우왓, 이거 엄청 맛있잖아!”
평범한 찻잎인 줄 알았더니, 누르스름한 쌀가루 안에는 말려 구운 채소와 고깃덩이가 들어 있었다. 그냥 가루째 먹어도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그들은 조금만 더 달라며 성 공공에게 눈을 빛냈다.
“목 소저가 멀리서 어렵사리 보낸 것이다. 너희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애당초 먹지 말라고 하는 건데…….”
“성 공공, 너무하십니다. 평소에 저희가 얼마나 잘해 드리는데 겨우 이 정도 먹은 것 가지고 타박이십니까!”
“그나저나 목 소저라는 분은 누군가요?”
성 공공이 여인의 이름을 꺼내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쓸데없는 소리. 알아야 할 때가 되면 어련히 알까! 그리고 이건 그냥 가루째 먹는 게 아니라 뜨거운 물을 부어야 더 맛있다고. 물을 끓여 오라고 했으니 잘 개어서 먹어들 보게.”
“감사합니다, 성 공공.”
모두들 호기심을 누른 채 그릇을 들고 기다렸다.
잠시 뒤, 뜨거운 물을 붓자 더욱 진한 향기가 올라왔다. 구워 말린 생강과 채소가 뜨거운 물에 서서히 퍼지면서 더 진한 향을 내뿜었고, 딱딱했던 고기도 씹기 좋을 만큼 쫄깃해졌다.
입으로 후후 불며 한입 들이켜자, 온몸 가득 훈훈함과 포만감이 몰려왔다!
성 공공은 월왕에게도 한 그릇 건넸다.
“왕야께서도 드셔 보시겠습니까?”
월왕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차 쪽으로 걸어가 다른 포대 자루를 살폈다. 자루를 열어젖히자,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진 나무 상자가 보였다. 상자 위에는 ‘월왕 전하 친전(親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후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생강차를 들이켠 성 공공이 월왕 곁으로 슬쩍 다가왔다. 상자에 적힌 필체에 그의 눈가가 활짝 휘어졌다.
“왕야, 상자에 든 것은 목 소저가 왕야를 위해 준비한 것 같군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열어 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모두들 두 그릇째로군.”
그에 잽싸게 고개를 돌린 성 공공이 손을 크게 내저었다.
“손에 든 거 내려놔, 당장! 이, 이게…… 우항! 많이 담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퍼 담으니 물을 부어도 안 저어지지!”
모두가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에 월왕은 나무 상자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상자를 여니, 생강차의 복용법, 보존법 등을 자세히 적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아까 본 것과는 다른 생강차가 들어 있었다.
성 공공은 뜨거운 물과 그릇, 젓가락을 올린 뒤 눈웃음만 남긴 채 조용히 물러갔다.
그릇 안에 생강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시위들이 마셨던 것보다 훨씬 진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의 얼굴에서 어느새 편안한 표정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생강차를 천천히 음미한 후 월왕은 탁자에 앉아 답장을 써 내려갔다.
* * *
강남 금수원. 진 총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의를 쳐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나? 방금 했던 말 다, 다시 해 봐!”
“왜 이리 놀라십니까? 서신을 왕야에게 가져다드리라고 하셔서 모두 전해 드렸는데요.”
“왕야에게 직접 전해 드리라고 했지, 두 통 모두 드리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마음 같아서는 우의의 엉덩이를 차 주고 싶었다.
우의에게 전한 서신 중 한 통은 성가 놈에게 보낸 것으로, 목 소저가 왕야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내용을 은근슬쩍 흘렸다. 그래야 성가 놈이 왕야에게 목 소저와 가깝게 지내라고 폭풍 잔소리를 쏟아부을 거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왕야께서 보셨다면 역효과를 내는 건 아닐지 조바심이 났다.
자신을 불구대천의 원수 바라보는 듯한 진 총관의 형형한 눈빛에 우의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제, 제 탓이 아닙니다. 총관께서 서신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내…… 내가 이름을 안 적었다고?”
“예,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우의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자, 진 총관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왕야께서 알겠다고 쓰신 게 바로 그 답이로구나!
그럼 목 소저가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고 알고 계시는 건가? 아아, 왕야. 그것은 그러니까 사실이 아니옵고……. 이를 어쩐단 말이냐?!
처음 보는 진 총관의 표정에 우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총관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힘없이 우의를 향하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서신을 모두 드린 후에 왕야의 표정이 어떻던가?”
“왕야의 표정 말입니까? 왕야를 오래 모셨으니 총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왕야께는 별다른 표정이라는 게 없다는 것을요.”
그에 기대 어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 총관이 우의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쯧, 쓸모없기는! 우항이나 네놈이나 똑같구나.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도움이!”
“쓸모없다뇨? 성 공공께서 절 얼마나 칭찬해 주셨는데…….”
“그거야 성가 놈이 늙어서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러지. 정신 사납게 굴지 말고 얼른 가!”
우의는 코를 문지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생강차가 대체 어떤 것인지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릉성과 월서를 오가느라 바빠 맛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야말로 반드시 먹고 말겠노라 다짐했다.
우의가 떠난 뒤, 진 총관의 입에서는 연신 탄식이 쏟아졌다.
“하아, 침착해, 침착……. 이 일은 길게 보고 움직여야지, 조급하게 굴어선 안 될 것이야.”
* * *
한동안 목운요는 세의를 마련하는 데만 매달렸다. 힘든 일이었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이후로는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식사를 마친 목운요에게 진 총관이 찾아왔다. 날이 추워 진 총관은 두툼한 옷과 모자를 걸친 채였다.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미소로 그가 입을 열었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총관님. 금란, 차를 부탁해요.”
진 총관은 따끈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곤 감탄을 터뜨렸다.
“분명 똑같은 물을 끓여서 우린 차인데, 여기서 끓인 차는 어찌 맛이 그리 좋은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후후, 차를 끓이는 솜씨가 그새 늘었나 보네요. 나중에 저도 금란이 끓여 주는 차를 마셔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관님.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금란은 작게 미소 지은 채 정중히 인사를 올린 뒤 물러갔다. 그녀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금란을 보며 진 총관은 목운요의 안목에 탄복했다. 반년 전,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금란과 지금의 금란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그제야 진 총관은 오늘 찾아온 이유를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