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지나친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
“못난 꼴을 보였구나.”
“괜찮습니다. 제 아이를 지키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이라는 것은 모두 같을 테니까요. 제 어머니도 연약한 분이시지만 절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셨죠. 하물며 부인 같으신 분이야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다만 이 일 때문에 몸이 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
금 부인은 목운요의 손을 꼭 쥐더니 기특하다는 듯 툭툭 두드렸다.
“내 아이가 널 반만 닮아도 좋으련만.”
“그리 말씀하시지만, 그저 건강하기만 해도 더 이상 바라실 것이 없을걸요. 아무리 울고 보채도 다 귀여워 보일 테니 말입니다.”
그에 금 부인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내가 네 어머니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이가 태어나도 널 예뻐해 줄 테니.”
금 부인의 안색이 풀어진 것을 확인한 목운요가 장난스레 고개를 저었다.
“하아, 이놈의 인기란…….”
“요것이!”
목운요와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마음의 화도 어느새 가라앉은 것 같다.
금 부인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목운요가 그제야 작별 인사를 올렸다.
은홍의 안내로 조부의 대문을 나선 목운요는 마차에 올라 은홍을 불러 세웠다.
“은홍 언니, 부인께 한가하실 때 조 대인의 향낭을 만들어 보시라고 전해 주세요.”
갑작스러운 말에 은홍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목운요를 태운 마차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안채로 돌아온 은홍은 왕 이낭이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돌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코웃음을 날린 채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 왕 이낭을 이렇게 놓아주실 생각입니까?”
침상에 기댄 금 부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한낱 첩실이 아니더냐. 따끔하게 가르칠 방법이야 많지만, 내가 직접 나섰다간 대인께서 홑몸도 아닌 이가 매정하다고 여기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이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실지도…….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구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안채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한 남자를 놓고 여인네들이 벌이는 신경전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숨통을 막히게 했다.
왕 이낭은 여러 첩실 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축에 속했다. 제 손을 직접 더럽힐 가치조차 없는.
“참, 부인. 한가하실 때 어르신께 드릴 향낭을 만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목 소저가 언질을 주었습니다.”
“어르신께?”
은홍의 말을 곱씹던 금 부인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똑똑하기도 하지. 은홍, 가서 실과 옷감을 내오거라. 어르신께 드릴 향낭을 만들어야겠다.”
왕 이낭은 평소 훈향을 지니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그런 왕 이낭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것은 필경 조운년일 것이다.
누군가가 조운년에게 수작을 부린다면 자신으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 만든 향낭을 차고 다니지 못하게 제 손으로 만든 향낭을 건넨다면 이쪽도 걱정을 덜 수 있으리라.
“예, 부인.”
* * *
집으로 돌아오자, 소청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목운요는 금란 등에게 물러가라고 한 뒤, 소청에게 조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쯧쯧, 집집마다 말 못 할 고민거리는 하나씩 있다고 하더니……. 금 부인은 언제나 밝아 보이셔서 그런 걱정은 없는 줄 알았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금 부인은 보통 분이 아니니 안채에서 일어나는 일 같은 건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래, 알았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네 생일이구나. 이번 생일이 지나면 너도 만 열네 살이 되니, 한두 해 지나면 출가시켜야겠구나.”
소청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가녀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출가라는 말에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진왕을 떠올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조소를 참으며 소청의 팔을 잡은 그녀가 어리광을 피웠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평생 시집 안 갈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평생 나랑 살 테냐?”
“당연하죠. 평생 어머니를 모실 거예요. 설마 어머니는 저랑 사는 게 싫으신 거예요?”
“혼기가 찼으면 출가하는 게 당연하지. 마음에 둔 사람이 생기면 내가 재촉하기도 전에 시집가겠다고 난리 칠걸.”
“누가요? 전 온종일 집에 있어도 심심하지 않은데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절 내보시면 안 돼요, 절대!”
제 팔을 흔드는 아이 때문에 소청의 몸이 휘청거렸다.
“후후! 알았다, 알았어! 내보내지 않으마. 평생 나랑 살자꾸나.”
소청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제 아이가 너무 예쁘고 곱다는 걸 천지신명께서도 아시나 보다. 그래서 일찌감치 제게서 남편을 데려가고 십 년 넘게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아야 했나 보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줘야 한다더니…….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그동안 힘든 세월을 보냈으니 이제는 그 복을 누려도 될 것이다.
* * *
소청과 한바탕 수다를 떤 뒤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세의를 떠올리며 수를 놓기 시작했다.
한데 몇 땀 놓기도 전에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뜻밖의 아픔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붉은 핏방울이 손가락 끝에 맺힌 걸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진왕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삼황자(三皇子) 영군진(寧君晋).
그의 어머니 진비(珍妃)는 선황을 모시던 궁녀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린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아들을 낳아 비(妃)로 봉해졌다. 이 일로 그녀는 많은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를 샀다.
삼황자는 빼어난 외모와 다정한 성격으로 조정에서 큰 총애를 받았으나, 명문가의 규수들은 그의 어머니가 궁녀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데 그런 황자가 소리 소문 없이 소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를 손에 넣고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자로 떠오를 줄 누가 알았으랴.
회귀 전 일찍 생을 마감한 탓에 누가 황위를 계승했는지 모르는 것이 원통할 뿐이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좀 더 확실한 대책을 세웠을 텐데…….
“소저, 어쩌다 손을 다치신 거예요!”
죽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오던 금란이 목운요를 향해 외쳤다.
금란의 말에 목운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에서는 더 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 조부에서의 사건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때의 일이 떠올랐나 보다. 자신을 대하는 소씨 큰 아가씨의 모습은 왕 이낭을 대하는 금 부인의 것과 같았다.
이번 생에서는 다신 누구의 첩실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큰 아가씨를 진왕부에 곱게 보내 드린 뒤, 위선으로 가득 찬 두 사람이 한데 굴러먹다가 어떤 꼴이 될지 구경할 생각이었다.
* * *
며칠 뒤.
목운요는 조부를 찾아 금 부인과 세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가 연못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목운요의 시선이 연못에 머물자, 은홍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제 왕 이낭과 주(周) 이낭이 한바탕 붙었는데, 주 이낭이 화를 참지 못하고 왕 이낭을 밀쳐 버렸습니다. 하필 떨어진 곳이 연못 한가운데라서…… 왕 이낭이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답니다. 이에 부인께서 연못이 위험하다고 느끼셨는지 사람을 시켜 연못을 정리하라고 하셨어요. 빈틈없이 연못을 몽땅 메우라고…….”
목운요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인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셨으려고요.”
* * *
며칠 동안 부지런히 조부를 찾은 끝에 시안이 정해졌다. 장 순무 쪽에서 준비한 글자도 속속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이 시작됐다.
황상에게 올릴 귀한 선물에 한 치의 흠도 있어선 안 된다는 금 부인의 의견에 따라 대부분의 작업은 목운요가 직접 책임지고, 나머지를 하운방의 사람들이 돕도록 했다.
마침 이들 모두가 경릉성 출신이라 경릉성의 여인들을 대표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소청은 글자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눈치였다.
“요아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구나.”
옆에서 소청을 돕던 금란 등도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소저. 장 순무께서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연말까지 남은 시간도 얼마 안 되는데, 보름이나 앞당겨 세의를 올리고 싶다니…….”
“다들 왜 그리 걱정이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소청은 앞으로 아이가 고생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상했다. 그녀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쯧, 하여간 너도……. 앞으로 내가 먹을 것을 챙겨 줄 테니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세의를 완성하는 데만 매달리도록 하렴.”
“헤헤, 감사합니다. 어머니.”
* * *
목운요가 세의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진 총관이 약재를 잔뜩 사서 보내왔다. 상자를 열자, 수염과 뿌리까지 온전히 갖춘 인삼이 들어 있었다.
“전 그저 세의를 준비하는 일을 돕는 것뿐인데 이렇게 귀한 걸 주시다뇨?”
족히 백 년 묵은 인삼 같았다. 먹으면 힘이 불끈불끈 날 만큼 정기가 느껴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저!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무려 지엄한 황상께 올릴 세의이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어린 목운요가 대단하다고 느껴지면서도 왠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운방과 불선루를 위해 목 소저는 혼자서 많은 짐을 지고 걸어왔을 것이다. 이제는 황상의 세의를 위해 한동안 이 일에만 매달려야 할 것이다.
그런 그녀를 도울 재주가 없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몸보신에 도움 되는 약이나 음식을 챙기는 게 고작이었다.
“후후, 총관님께서 불선루를 잘 이끌어 주신 덕분에 매달 큰돈을 벌고 있으니 고단한 줄도 모르겠네요.”
“소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보낸 자들이 소주와 양주 등지에 자리를 잡았으니, 조만간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신선한 찻잎을 딸 수 있는 기간이 몇 달 뿐이라 아쉬울 따름입니다. 겨울이 되면 차를 덖을 수 없을 테니…….”
요새 돈 세는 재미가 들린 진 총관은 날마다 신선한 찻잎을 딸 수 없는 게 꽤나 원통한 듯했다.
“돈이야 벌면 벌수록 좋지만, 지금 당장 할 일이 태산이잖아요?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한다고,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씩 천천히 하면 되겠죠.”
어떤 일이든 조급하게 굴면 안 된다. 한 수라도 잘못 두면 지금껏 쏟아부었던 수고가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진 총관도 모르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지요. 소저 말씀대로 지금은 내실을 다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반년 전만 해도 수만 냥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날마다 제 손을 거치는 돈만 해도 수만, 수십만 냥이었다.
지나친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 그 교훈을 다시 새기는 진 총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