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87화 (87/442)

87화 수작

* * *

육냥의 휘하에 있는 자는 일솜씨가 꽤 뛰어난 듯했다. 그는 대량의 양식을 저렴하게 구입한 뒤 진 총관이 말한 별장으로 보냈다.

곳간 가득 쌓인 포대 자루를 보고 있자니 진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은 주변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월서로 양식을 보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목운요가 찻잎을 덖는 데 쓸 즙을 만든다고 하자, 누구도 감히 의심을 하지 않았다.

목운요는 마차에서 내린 뒤 별장 주변의 경치를 살폈다. 금수원처럼 멋진 곳일 줄 알았더니, 주변은 온통 논밭뿐이었다. 드문드문 농가가 있는 모습은 한적하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었다.

목운요가 온 것을 확인한 진 총관이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목 소저, 오셨습니까?”

“진 총관님을 뵙습니다. 양식은 제대로 온 건가요?”

“별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시작할까요?”

양식을 곱게 빻은 뒤 채소, 생강을 넣고 바짝 굽는 과정을 지켜보던 목운요는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목 소저, 여기까지 와서 작업을 일일이 챙겨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생강차를 만들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족히 두 시진이나 걸렸다. 내내 서 있느라 자신도 다리가 쑤셔 오는데, 어린 소저야 오죽하겠는가?

“괜찮습니다. 서둘러 만드느라 주의 사항을 지키지 않으면 득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엄격히 관리하라 이르겠습니다.”

그 후로도 목운요는 두 번 더 별장을 찾아 완성된 생강차를 확인했다. 별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하운방을 돌보기 시작했다.

한데 뜻밖에도 정열람이 자수법 수업에 자신을 써 달라는 뜻을 전해 왔다.

잠시 고민하던 목운요는 흔쾌히 승낙했다. 다만 정열람이 아직도 유언비어 때문에 시달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인, 세상 물정 모르고 함부로 구는 자가 있으면 그냥 쫓아 버리세요. 자수법을 배우러 왔다면서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면 상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에 담긴 배려를 정열람이 모를 리 없었다.

“고마워요, 소저.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되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정열람의 옅은 미소에 목운요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한때 붉은 태양처럼 뜨거웠던 정 부인을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줌의 재로 사라질지, 뜨거운 불길에서 다시 태어날 것인지는 오롯이 정열람의 선택에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황상의 묵보를 모사해 제작한 편액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장인 수십 명이 달라붙어 완성된 정교한 모습에 목운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란스레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불선루의 편액이 위풍당당하게 문 앞을 장식했다. 현판식을 보러 경릉성 백성 중 절반이 불선루에 몰려들 정도였다.

목운요는 황상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름 동안의 불선루 수익으로 양식을 사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환호성과 칭찬이 터져 나왔다.

그사이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이 지나자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소청이 따라 나와 옥빛의 두봉(斗篷, 소매가 없는 망토 형태의 외투)을 걸쳐 줬다.

연한 옥빛 덕분에 목운요의 피부가 유난히 희게 보였다. 티 하나 없이 백옥처럼 고운 아이의 얼굴에 소청은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어서 다녀오렴. 내 대신 금 부인께 안부 전해 드리고.”

“예, 걱정하지 마세요. 얼른 다녀올게요.”

목운요는 소청의 손을 꼭 쥔 채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아침, 금 부인이 조부에 들러 달라며 사람을 보내왔다. 시녀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급한 일인 듯하여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선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조부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은홍의 모습이 보였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은홍마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목운요는 한걸음에 안채로 달려갔다.

방 안에서는 창백한 표정의 금 부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조 대인이 초조한 듯 지키고 있었다.

목운요는 재빨리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조 대인을 뵙…….”

“목 소저, 인사는 됐고 어서 부인을 봐주시오!”

그 말에 목운요는 곧장 금 부인에게 달려들어 맥을 짚었다.

그러자 금 부인이 눈을 뜨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운요야, 배 속의 아이는 무사한 거니? 아이를 지키는 걸 도와준다고 내게 약조했던 걸 기억하지? 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제발 아이만은…….”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금 부인이 고개를 떨구자, 옷자락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서 있던 조운년은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부인, 그 아이의 말은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조운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홍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르신, 부인! 왕 이낭(王姨娘, 이낭은 첩을 가리키는 말로 본처와 구분해서 부르는 호칭이다.)이 정원 입구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 말에 금 부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조운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모습이 초췌하여 나리를 뵐 형편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시는 게 좋을 듯하네요.”

조운년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목운요가 있는지라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조운년이 나중에 다시 들르겠다며 대답한 뒤 방을 나섰다.

그러자 은홍이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바깥 상황을 보고했다.

“부인, 왕 이낭이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나가시자 뭔가를 이야기하려다가 걷어차였답니다.”

금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니 은홍이 밖으로 나가 방문을 지켰다.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자,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부인,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방금 금 부인의 맥을 짚어 보니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창백한 표정으로 제 손을 꼭 움켜쥐는 모습에 일단 말을 아끼기로 한 것이다.

금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수건으로 눈물 자국을 꼼꼼히 닦았다.

“운요야,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끌어들여서 미안하구나. 근래 내가 대인과 잘 지내는 게 못마땅했는지 이낭이 조 대인 앞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단다. 그 일로 대인께서 내게 거리를 두셔서, 그 불화의 씨를 당장 뽑지 않으면 훗날 큰 화가 될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이렇게 하였단다.”

“부인만 무시하시면 됐어요. 저에게 미안하실 게 뭐랍니까?”

목운요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조운년이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게 아내인 금 부인 덕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운년이 부인을 잘 얻어서 성공한 거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퍼져 나갔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가 담긴 말을 건넸다면 부부 금슬에 금이 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참, 오늘 널 부른 건 이 일 말고도 한 가지 상의할 게 있어서란다. 성상의 세의에 관한 일을 대인께 말씀드렸단다. 대인을 통해 이 소식을 들으신 순무께서 크게 감동하셨다며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구나. 경릉성 각지에서 오복(五福, 장수·재물·건강·덕망·고종면)을 가진 어르신들을 모아 ‘만수무강’이라는 글자를 쓰게 한 뒤, 수를 놓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그 배경이 되어 줄 작품이 아무래도 커야 좋을 듯한데……. 할 수 있겠느냐?”

목운요는 골똘한 표정을 짓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작품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하지만 장 순무께서 좋은 의견을 주셨으니 밤낮없이 부지런히 완성하는 수밖에요. 작품은 길이 구 척, 높이 오 척이 어떨까요? 황상의 위엄을 드러내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의미와도 맞아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다만 네가 힘들까 걱정이로구나.”

겸연쩍어하는 금 부인을 향해 목운요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성상께서 상을 내려 주셔서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는데, 이렇게나마 보답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

어디 그뿐이랴?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소씨 가문을 또다시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당초 성상의 생신 때 소씨 가문에서 진상한 금수강산 병풍은 그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어 하마터면 멸문지화를 불러올 뻔했다. 아마도 소씨 가문은 자수로 만든 것이라면 질색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더더욱 자수 작품을 진상할 생각이었다. 성상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그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할 거다.

설사 성상께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일로 성상께서 지난번 소씨 가문이 진상했던 피에 물든 병풍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소씨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면 얼마간의 수고야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돼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갈무리한 채 목운요는 금 부인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줬다.

“그런데 부인,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홑몸도 아니신데 쓰면 안 되는 훈향까지 피우시는 건 좀…….”

목운요의 말에 금 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훈향이라니? 지난번 네가 들쩍지근한 향료는 쓰지 말라고 해서 이후로 한 번도 훈향을 쓰지 않았는데.”

“하지만 분명 방문을 열었을 때 말리화(茉莉花) 향이 났는데. 약 냄새도 조금 섞여 있고…….”

“……이낭이구나. 말리화를 좋아해 늘 곁에 두고 다니지. 아침에 내게 용서를 구하러 왔다가 쫓겨났었는데 네가 아마 그 향을 맡았나 보구나. 혹시 그 훈향에 들어 있는 게 내게 해로운 것이냐?”

“보통 사람은 맡아도 아무렇지 않지만 부인께선 회임하신 터라 아무래도 피하는 편이 좋죠.”

“흥, 평소 그것들의 작태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더니 날 가마니로 봐도 유분수지! 예전에는 후사를 잇지 못해서 딱히 상대하지 않았는데, 그게 화근이었나 보구나. 조씨 가문의 본처인 내게 맞선 것도 모자라 내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까지 더러운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처음 보는 금 보인의 서슬 퍼런 눈빛에 목운요가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금 부인은 아차 하며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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