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86화 (86/442)

86화 이상한 월왕

마침 소청이 갓 만든 요리를 가지고 나타나자, 금 부인은 재빨리 수저를 들었다.

소청은 금 부인 옆에 앉아 다정하게 시중을 들기도 하고 한결 편안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이내 두 사람은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를 놓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목운요가 어린 시절에 말썽을 부렸던 일을 소청이 들려주자, 금 부인이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목운요가 민망한 듯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떠나려 하니, 금 부인과 소청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놀렸다.

간신히 두 사람한테서 빠져나온 목운요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옅어진 것을 본 금란이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저, 왜 그러셔요? 방금 무척 즐거워 보이셨는데…….”

“그냥, 어머니가 안쓰러워서요.”

애써 편안한 척하지만 어머니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고 금 부인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안다. 금 부인을 대하는 데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노심초사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들려준 꿈이 모두 진짜라고 믿는 어머니는 조만간 소씨 가문에 돌아가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좀 더 주도면밀하고 대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안쓰럽다뇨?”

“말해도 모를 거예요. 오늘 저녁은 어머니를 위해 제가 직접 차릴게요. 금란은 주방에 가서 재료를 준비해 주세요.”

하나 안쓰럽다고 해서 어머니의 변화를 막을 생각은 없다. 그 누구도 어머니를 무시하지 못하게 남몰래 그 뒤를 지키면서 어머니를 응원할 생각이었다.

* * *

월서 월왕부.

서재의 등불은 한밤중에도 환히 타고 있었다.

월왕은 손에 든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목운요가 자신의 신분을 눈치챌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알게 됐으니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그때, 성 공공이 월왕 옆에 뜨거운 차를 내려놓았다.

“왕야, 그 서신은 이미 여러 번 읽으신 것 같은데, 경릉성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요?”

서신을 받은 후 왕야는 탁자에 올려 두곤 틈틈이 읽곤 했다. 하도 여러 번 읽어서 그 내용을 줄줄 외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다.”

서신을 접어 든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혹 자네 눈에도 내 남다른 신분 때문에 내가 달리 보이는가?”

그 말에 성 공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소신이 왕야를 모신 지도 한참 됐지요. 왕야께서 황자든 평범한 백성이든 제게는 그저 주인님일 뿐, 어찌 다르게 보이겠습니까?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신 겝니까?”

왕야께서 목 소저를 신경 쓰는 게 분명하다. 어떤 의미의 신경이든 일단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면 좋은 거겠지…….

대답을 들은 월왕의 미간이 슬며시 구겨졌다. 자신도 뭘 걱정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진 총관의 서신을 읽고 난 뒤부터 심란한 기분을 좀처럼 수습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제 정체를 알게 된 목운요는 과연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두려움? 아니면 경멸? 어쩌면 전혀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월왕의 눈빛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성 공공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슬쩍 운을 뗐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왕야를 마음에 둔 사람이라면 신분이 무엇이든 한결같이 왕야를 대할 테니까요.”

그 말에도 월왕의 미간은 여전히 구겨진 상태였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채 책상 위에 펼쳐진 공문을 처리해 나갔다.

성 공공도 말을 아낀 채 방문을 나섰다.

* * *

그 후 며칠이 지난 뒤에도 월왕의 표정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보다 못한 성 공공이 우항을 찾았다.

“목 소저가 왕야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더냐?”

목운요와 왕야?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우항이 잽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야께선 목 소저를 항상 서재에서 만나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주위를 다 물리신 터라 저도 알지 못합니다.”

“쯧,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안 되는 건 우의랑 똑같구나. 하여간 식충이 같으니라고…….”

“엇? 성 공공, 저를 부르셨습니까?”

때마침 우의가 재빨리 다가오더니 성 공공 앞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돌렸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네요. 경릉성에서 왔더니 도통 적응이 안 됩니다.”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아, 진 총관께서 제게 서신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반드시 왕야의 손에 직접 가져다드려야 한다면서요.”

“진가 놈의 서신이라고? 내게 보낸 것도 있는 게야?”

우의가 품에서 두 통의 서신을 꺼냈다. 다급하게 썼는지 서신에는 수신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잠시 진 총관의 말을 떠올리던 우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 총관님께서 서신을 왕야의 손에 직접 드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성 공공에게 드리라는 말씀은 없으셨어요.”

확실히 봉투를 보니 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에는 자신에게 보내는 서신이 없나 보다.

“알았다. 왕야께선 지금 서재에 계시니 어서 가져다드려라.”

“예.”

두 통의 서신을 받아 든 월왕은 그 무게를 헤아려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서신을 펼쳐 든 월왕의 미간이 크게 꿈틀거렸다.

* * *

그 시각, 경릉성.

진 총관은 밝은 얼굴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든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떤 진 총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월서에 서신이 당도했겠구나. 성가 놈이 내 서신을 봤나 모르겠네.”

열심히 협력하라는 뜻에서, 성가 놈에게 왕야에 대한 목 소저의 절절한 마음을 서신에 잔뜩 적어 보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왕야에 대한 걱정이 깊어 목 소저도 생강차 조제법을 생각해 낸 게 아니겠는가? 목 소저가 왕야를 생각해 정성껏 만든 따뜻한 생강차보다 그녀의 마음을 보여 줄 더 확실한 물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왕야께서 어서 빨리 목 소저와 마음을 같이하셔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도 마음을 놓을 수 있으련만…….”

* * *

월왕부. 밥상을 든 성 공공이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왕야…….”

서신에 뭔가를 쓰려던 월왕은 성 공공의 부름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어찌나 힘껏 쥐었는지 붓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꺾어진 붓을 보며 성 공공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왕야, 온종일 서재에만 계셨으니 뭐라도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다.”

미간이 구겨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무척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월왕이었다. 초조하면서도 불안해 보이지만 언뜻 들뜬 표정 같기도 했다.

진가 놈이 서신에 대체 뭐라고 썼기에 왕야께서 감정을 드러내신단 말인가?

월왕이 다시 새 붓을 꺼내 든 순간, 성 공공이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왕야, 진가 놈이 어떤 서신을 보낸 겁니까?”

뚜욱!

먹 한 번 묻히지 못한 붓이 또다시 두 동강 났다. 월왕은 무표정하게 손에 든 붓을 집어 던졌다.

“이 붓은 누가 사 온 거지? 손에 쥐기만 해도 부러지는 게, 어디서 이런 싸구려를……. 그자의 한 달 치 녹봉을 깎거라! 상은 거기에 두고 그만 나가고.”

“예.”

서재를 나온 성 공공이 월왕의 말을 전해 주자, 우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붓을 사 왔을 때 손에 쥐기 편하다며 왕야께서 칭찬해 주셨는데, 어찌 소인의 녹봉을 깎으라 하셨답니까?!”

얼마 안 되지만 조금씩 돈을 불려 가는 재미를 알게 된 우항이었다. 앞으로 근사한 반려를 맞이하기 위해 부지런히 돈을 모을 생각이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흥, 왕야께서 좋다면 좋은 거고, 싫다면 싫은 거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우의한테 한 수 배워 둬!”

“하지만 아깐 우의더러 식충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우의가 아니라 자네를 말한 거네!”

말을 마친 성 공공은 뒷짐을 진 채 자리를 떠나며, 방금 본 왕야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스멀스멀 웃음꽃이 피었다. 후후, 그래. 그리된 거로구나! 조만간 월왕부를 손봐 둬야겠다. 어쩌면 새로운 여주인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목 소저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여주인이 되기에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무슨 상관이랴? 일단 혼례부터 올리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일 테니 말이다.

* * *

이튿날 아침, 월왕은 우항과 우의를 불러들였다.

“우의. 한 통은 진 총관, 나머지 한 통은…… 목 소저에게 전해라. 되도록 빨리.”

“예, 왕야. 그런데 진 총관이 보낸 찻잎은 어찌할까요?”

먹을 것이 귀한 월서에서는 배에 ‘기름칠’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차라는 것은 마실수록 물배만 찰 뿐이었다. 차라리 차 말고 양식을 보내 주는 편이…….

순간 월왕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지더니 우항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차가 어때서? 본왕은 차를 보내 준 것이 마음에 드는구나!”

우항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예를 갖춰 대답했다.

“예, 소신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에 월왕의 눈에 서린 한기가 서서히 사라지더니, 그가 우항에게 물러가라고 일렀다.

우항 등을 모두 물린 뒤에야 월왕은 진 총관이 보낸 서신을 탁자 서랍에 조심스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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