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빈털터리 월왕
“요아야, 어리지만 힘들게 살아온 아이들이잖니. 네가 도와주렴.”
마침 소청이 방으로 들어서며 아이들을 거들었다. 그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다.
“알았어요. 어머니 말씀대로 할게요. 대신 너희들 모두 나랑 매매 계약서를 써야 해. 그래야 나도 안심하고 너희를 곁에 둘 수 있을 테니까.”
“예, 예!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소저!”
목운요는 려아를 힐끗 쳐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매매 계약이라는 건 종신 계약이지만, 그 기한을 오 년으로 하자. 오 년이 지난 후엔 여기에 남아도 좋고, 떠나도 좋아. 너희 하고 싶은 대로 해.”
말을 마친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청의 손목을 잡았다.
“어머니, 바빠서 제대로 밥도 못 먹었어요. 저희 가서 뭣 좀 먹어요.”
“그래, 그러자꾸나.”
* * *
두 사람은 간단히 배를 채운 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청의 모습에 목운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기뻐서 말이야.”
소청의 얼굴에서 감격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남아를 구해 준 일로 어머니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목운요가 자연스레 남아의 일을 꺼냈다.
“어머니도 남아라는 아이가 마음에 드시는 거죠?”
“아니. 오늘 기분이 좋은 건 너 때문이란다.”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소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이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네가 그랬지. 꿈에서 네 일생을 다 봤다고. 혹 네가 힘겹게 노력한 것에 비해 나쁜 결말을 맞이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단다…….”
소청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오자, 목운요가 재빨리 다독였다.
“어머니도 모두 꿈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마도 천지신명님이 저를 가엽게 여겨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에서 미리 보여 주신 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 일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요아야, 내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게 정말 꿈이라면 네가 어찌 하룻밤 새에 어려운 자수법을 익히고, 다도와 의술에도 통달할 수 있었겠니? 무엇보다도 넌 내 소중한 아이다. 자식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그 말에 목운요는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어머니…….”
소청은 두 손을 내밀어 아이를 제 품에 꼭 안았다.
“소씨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네 착한 심성을 몽땅 불태우지 않을까 언제나 걱정했지. 하지만 지금 보니 마음을 놓아도 되겠구나.”
요아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목운요는 소청의 품에 기대 굵은 눈물을 주르륵 쏟아 냈다.
“어머니만 옆에 계시면 제가 증오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언제나 제 곁에 있어 주셔야 해요.”
“오냐. 언제나 네 곁을 지켜 주마. 그러니 너도 이거 하나는 약속해다오. 다른 사람을 위해 선행을 베풀진 못해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을 하진 않겠다고. 그래야 오래오래 우리 예쁜 딸 곁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님께 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말에 목운요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소청의 허리를 껴안았다.
“어머니가 있어서 정말 좋아요.”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소청의 눈빛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하여간 너도…….”
진실을 어머니한테 들키고 말았지만 당초 예상과 달리 목운요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소청에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 *
“소저, 진 총관님이 오셨습니다.”
목운요가 손에 쥐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았다.
“총관님을 화청(花廳)으로 모시세요. 그리고 제가 준비하라고 일렀던 물건을 준비해 주시고요.”
“예, 소저.”
목운요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밖으로 나갔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죄송해요, 총관님. 요 며칠 일이 바빠서 금수원에 간다는 게 그만……. 면목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나요?”
금란 등이 차를 올리자, 목운요는 모두 물러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목운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왕야의 신분을 알게 된 일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하셨을 테죠?”
“이해해 주십시오, 소저. 그 일은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아마 곧 회신이 도착할 겁니다.”
“그동안 왕야에게서 금수원을 빌려 다관을 연 일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왕야께서 선심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 왕야를 위해 저도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허, 겸손한 말씀입니다. 소저가 불선루를 연 것 또한 왕야에게는 큰 도움이 된답니다.”
앞으로 ‘한 가족’이 되면 일일이 따질 일도 없을 겁니다, 후후…….
그나저나 성가 놈이 왕야를 재촉하고 있기나 한 건지, 쯧! 하여간 평소에는 감 놔라 배 놔라 난리를 치면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도움이 안 된단 말이야. 다음에 만나면 욕이나 한바탕 쏟아 줘야겠다!
“그런가요? 그보다 강남은 더위가 슬슬 물러가는 것 같은데, 월서는 무척 춥겠죠?”
“그렇답니다. 월서는 원체 척박하고 추운 땅이라 벌써 서리가 내렸다고 합니다.”
월서를 가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그곳이 얼마나 혹독한 땅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지금이라면 견딜 만하지만, 두 달만 지나면 몸속의 피가 굳을 정도로 끔찍한 추위가 찾아온다.
목운요는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월서의 상황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평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은 진 총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말이죠. 한 가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생강이랑 쌀가루를 섞어서 볶은 건데,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면 추위를 쫓을 수 있죠. 다만 너무 평범한 것이라서 왕야께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실까 걱정이네요.”
“그런 것이 있단 말입니까? 제가 맛봐도 될까요?”
“금란, 제가 준비해 달라던 걸 가져오세요.”
목운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쟁반을 든 금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릇 한가운데에는 누런 쌀가루 덩어리가 보였다. 얼핏 보니 파, 생강 조각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목운요가 그릇에 뜨거운 물을 붓더니, 은수저로 살며시 저었다. 얼마 뒤 쌀가루 덩어리가 풀어지며 죽처럼 되직하게 변했다.
진 총관은 그릇을 들어 맛을 보았다. 짭짤한 쌀가루에서 생강 맛이 적당히 느껴졌다. 한 입 들이켜자 온몸에서 온기가 퍼져 나갔다.
“소저, 이것의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월서에서 왕야를 오랫동안 모셨다. 이 차 한 잔이라면 그 혹독한 곳에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재료가 들어간 건 아니에요. 다만 손이 좀 많이 가는 것뿐이죠. 재료를 말렸다가 볶아야 하거든요. 사실 가격만 놓고 보면 크게 비싸지도 않아서, 장사꾼들이 겨울에 장사하러 다닐 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답니다. 설마 들어 보신 적 없는 건가요?”
“허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황궁에선 이런 것들을 접할 일이 없었죠. 월서로 간 뒤에야 추위가 뭔지, 배고픔이 뭔지 알았지요. 왕야께서도 화로의 탄불 하나 마음껏 쓰지 못하신답니다. 게다가 매달 조정에서 내려 주는 군량으로는 얼마 먹지도 못합니다. 이제는 그 군량마저 깎는다고 하니…….”
진 총관의 설명에 목운요는 놀란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회귀 전의 월왕은 금군을 장악한 채 황성을 호위하고 있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른 그가 월서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위풍당당한 황자, 그것도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생계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니…….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며 웃어넘겼을 거다.
진 총관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께선 열네 살 때 처음 월서로 가시게 되었답니다. 그해 중병에 걸려 하마터면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죠. 왕야께서는 세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계시지만, 겨울만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지라……. 왕야를 모시는 저희 같은 이들은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것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목 소저가 옆에 계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이걸 월서로 보내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 진 총관이 월왕에게 은자를 서둘러 보낸 것도 설마 이 때문이었던 걸까? 정말 돈이 없어서?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요. 월왕께 보낼 생강차부터 준비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소저. 제가 도울 일이 있거든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먼저 금수원으로 돌아가서 왕야께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네!”
진 총관은 생강차를 그냥 두고 가기가 아까웠는지 잔에 든 채로 들고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목운요의 입가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월서의 환경이 좋지 못하다는 건 믿는다. 하지만 진 총관의 말처럼 결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거다. 먹을 것조차 없다면서 세력을 키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사실이 무엇이든 자신과는 상관없다. 그저 이번 기회를 통해 월왕이 자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훗날 그가 승승장구할 때 그의 세를 빌리는 것이 한결 쉬워질 테니 말이다.
목운요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육냥에게 방으로 들어오라 일렀다.
“육냥, 네 수하 중에 장사에 소질이 있는 자가 있을까?”
“네, 제명(齊名)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좋아, 이걸 건네줘. 생강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품목을 적은 건데, 은자로 하면 대략 얼마일지 계산해서 올리라고 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