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민심을 거스르다
“제가 그랬나요? 요새 정신없이 바빠서 그런지 제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건 그렇고, 담 공자께서 여기까지 직접 왕림해 주신 걸 보니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흥, 내 첩실을 빼돌려 놓고선 내게 왜 왔느냐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연기가 아주 일품이군!”
“공자의 첩실을 제가 뭐 하러 빼돌리겠습니까?”
그 말에 담팔왕은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듯했다.
“장난 그만 치고 채청을 내놔!”
“말씀하신 첩실의 이름이 채청인가요?”
“그래. 오늘 아침에 채청이 내 첩실이 되겠다며 매매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경릉성의 중매쟁이인 유 씨가 증인이다! 채청을 회안성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네가 사람을 시켜 빼돌리지 않았느냐?”
목운요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본 담팔왕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증인까지 있으니 천하의 목운요도 좀처럼 빠져나가기 어려울 거다.
“왜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지? 무고하게 남의 첩실을 가로챈 죄는 법률에 따라 팔 년 동안 유배되는 벌을 받게 되지. 목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면 아량을 베풀 생각도 있다!”
그 말에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담팔왕이라는 자가 누군진 모르겠으나, 경릉성에서 목운요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게다가 목운요가 남의 첩실을 빼돌렸다고 하는데, 그것도 좀처럼 납득이 되진 않았다. 다른 사내가 첩실을 빼돌렸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지만, 여인인 목 소저가 첩실을 뭐 하러 빼돌린단 말인가?
결국 많은 이들이 목운요의 편에 섰다.
“이보시오, 공자!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시구려. 목 소저가 어찌 밑도 끝도 없이 남의 첩실을 빼간단 말이오? 오해가 있는-”
“흥, 오해는 무슨 오해! 목운요의 부하인 육냥이라는 자가 내 하인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오? 여봐라, 두 사람을 데려와.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두 눈으로 직접 똑똑히 보라고 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것에 실린 사람들이 나타났다. 원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얻어맞는 두 사람은 불그죽죽 변한 얼굴로 연신 곡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놀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담팔왕은 분노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목운요, 기고만장해서 국법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 당장 채청을 내놔라. 안 그러면 당장 관아에 고발해서 네게 벌을 내려 달라 할 것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목운요를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목 소저, 일개 첩실 때문에 이게 다 무슨 소란이랍니까? 채청이라는 아이가 금수원에 있다면 내주십시오. 첩실로 들어가겠다고 매매 계약서를 썼다면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인데…….”
“충고 감사해요. 하지만 이 일은 저자의 말과는 다르답니다.”
“목운요, 일을 왜 자꾸 질질 끄는 거냐? 설마 내 첩실이 네 집에서 무슨 봉변이라고 당한 건 아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채청이 그러더군. 제 동생인 남아가 네게 결례를 범했다고. 설마 이 일로 앙심을 품고 채청과 남아를 잡아다 복수라도 할 셈이냐?”
“이보시오! 거 말씀이 너무 심한 거 같구려. 목 소저는 그럴 사람이 아니외다!”
“맞아요, 맞아! 목 소저가 선의를 베풀어 경릉성 여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왜 그런 험담을 늘어놓는 거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목운요, 어서 채청을 내놔라. 안 그러면 내가 직접 들어가서 찾을 테니!”
순간 진 총관의 지시에 금수원 사람들이 문을 막아섰다.
그에 담팔왕은 채청이 독약을 먹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목운요, 이렇게 한다고 네 죄를 덮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 내 이미 사람을 시켜 관아에 널 고발했다. 채청을 위해서라도 오늘 반드시 널 공당에 세울 것이다!”
그때, 인파가 갈라지면서 관복을 걸친 양 현령이 역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사람 목숨과 관련된 사건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 목 소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양 대인을 뵙습니다. 채청이라는 소저와 그 소저의 어린 동생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는데, 담 공자께서 제가 첩실을 빼돌렸다고 찾아오셨어요. 그것도 모자라 제가 사람을 해쳤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이야기를 몰고 가시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는 누구요? 왜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건가?”
“양 대인을 뵙습니다. 저는 채월각의 소가주인 담팔왕이라고 합니다. 제 첩실인 채청이 목운요에게 잡혀가 생사를 알 수 없기에 관아에 고발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양 대인께서 시시비비를 가려 주십시오.”
그 말에 양 현령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죄를 지었으면 국법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지. 목 소저, 자세히 말해 보게.”
양 현령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건 조사에 나서자, 구경꾼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담팔왕은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목운요가 사람을 보내 채청과 아모를 끌고 가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는 손짓, 발짓도 아끼지 않았다.
중매쟁이 유 씨도 지원에 나섰다. 그는 채청이 담팔왕의 첩실로 들어가겠다는 매매 계약서에 확실히 지장을 찍었다고 증언했다.
여기에 흠씬 두들겨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담팔왕의 하인들마저 입을 모으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양 현령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목 소저, 담팔왕의 말이 사실인가?”
“자세한 사정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차라리 채청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라고?!”
담팔왕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의 계획대로라면 채청은 이미 독약을 먹었어야 하는데…….
목운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왜 그러시나요? 채청이 멀쩡하다고 하니 꽤나 실망하셨나 보네요.”
“누, 누가! 네가 채청을 뒤에서 협박했을까 싶어서…….”
“담 공자의 말씀대로라면 공자님과 채청 소저는 애틋한 사이가 아닙니까? 채청 소저가 정인에게 불리한 말을 할 리 없겠죠. 금교, 가서 채청 소저를 모셔 오세요.”
“예, 소저.”
* * *
금교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채청이 양 현령을 보곤 공손히 절을 올렸다.
“양 대인을 뵙습니다.”
멀쩡한 채청의 모습에 담팔왕은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저 어린 것이 자신을 배신한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려아라는 아이도 죽은 목숨이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담팔왕이 무서웠는지 채청이 목운요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에 양 현령은 어떻게 된 사정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채청, 네 의지로 담팔왕의 첩실이 되겠다고 했느냐?”
“아니에요! 담팔왕이 제게 흑심을 품고선 죄 없는 동생들을 마구잡이로 때렸어요. 다행히 동생인 남아가 목 소저와 친분이 있어, 담팔왕이 저를 겁탈하는 사이에 목 소저한테 달려와 도움을 청한 거예요. 양 대인, 부디 굽어살펴서 목 소저의 명예를 되찾아 주세요!”
‘저년이……!’
담팔왕은 속으로 이를 악문 채 매매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양 대인, 이건 채청의 지장이 찍힌 매매 계약서입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십시오.”
이거라면 채청도, 목운요도 잡아넣을 수 있을 거다. 이래 봬도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양 현령은 매매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확실히 지장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채청, 매매 계약서를 쓰고도 어찌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냐?”
담팔왕을 향한 채청의 눈빛이 분노로 타올랐다.
“담팔왕, 이 양심도 없는 놈! 양 대인, 손을 다쳐서 지장을 찍을 수도 없는데 제가 어찌 매매 계약서를 쓸 수 있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채청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였다. 손에는 피딱지가 잔뜩 맺혀 있어서 지장을 찍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그 모습에 담팔왕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운요, 네년이 채청한테 바람을 넣은 거로구나! 아침만 해도 멀쩡했던 손이 지장을 찍을 수 없을 만큼 다치다니. 대체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네년들의 얄팍한 속임수에 양 대인께서 넘어가실 듯싶으냐! 양 대인, 의원을 불러다가 상처를 살펴봐 주십시오. 채청의 손에 난 상처는 분명 새로 난 상처일 겁니다. 그렇다면 저년들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담팔왕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목운요가 이렇게 큰 약점을 남길 줄이야. 의원들이 와서 상처를 살펴보면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반격에 당황하는 목운요의 표정이 꽤나 궁금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목운요는 물론 채청조차 유달리 침착해 보였다.
양 현령이 오작에게 채청의 손에 난 상처를 살펴보도록 했다.
“대인, 채청 손에 난 상처는 화상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손을 다친 지 이미 대엿새는 된 듯합니다.”
“마, 말도 안 돼!”
담팔왕이 앞으로 달려가 채청의 손을 낚아채 힘껏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상처 자국이 지워질 리 만무했다.
놀란 채청이 손을 빼선 담팔왕의 뺨을 후려쳤다.
짝!
“더러운 손 치워! 양 대인, 부디 제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사실 채청의 상처 자국은 목운요의 작품이었다. 내심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작마저 속여 넘길 수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담팔왕,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목운요의 눈빛을 본 담팔왕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목운요가 친 장난에 놀아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영악한 것,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