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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77화 (77/442)

77화 도움의 손길

* * *

이튿날 아침, 금수원으로 향하던 목운요는 지난번에 본 거지 소년이 떠올랐는지 일부러 길을 돌아서 정문으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아이는 그곳에 있었다. 자신을 알아본 아이가 쭈뼛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소저를 뵙습니다.”

“오늘은 누나가 없네. 나랑 같이 안에 들어가서 뭐 좀 먹을래?”

삐쩍 마른 몸이지만 아이의 눈빛은 티 없이 맑았다. 기뻐하던 아이는 머뭇거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소저, 감사합니다. 하지만 누나가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없다고 했어요. 소저를 도운 적도 없는데 공짜로 얻어먹을 수야 없죠.”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고? 흐응, 재밌네.

“그러고 보니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어. 네가 끝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아는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말씀만 해 주세요. 키는 작지만 힘은 세다고요!”

남아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앙상한 팔목을 내밀었다. 하지만 제가 봐도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 후다닥 소매를 내리고는 부끄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한 볼우물에 목운요가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좋아, 날 따라와.”

남아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목운요를 따라 금수원으로 발을 디뎠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던 아이는 자신을 향한 목운요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황급히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죄, 죄송해요.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채청 누나가 말한 것처럼 멋진 곳이네요. 다른 분들도 꼭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요.”

말하는 내내, 남아는 차를 끓여 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훔쳐봤다.

고아라면서 예의를 갖춘 모습이라니. 채청이라는 소녀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런데 예의범절은 누나한테서 배운 거야?”

“네, 예의를 지켜야 살아도 의미가 있는 거라고 누나가 그랬어요. 그저 배를 채우는 데만 매달리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면서요.”

“누나가 참 멋지네.”

어린 데다 몸집도 작은 탓에 걸음이 느렸지만, 남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되도록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구곡교를 건너는 순간, 목운요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정원은 항상 관리가 필요하단다. 적어도 서너 명이 있어야 할 거야. 그리고 차를 끓이는 다구도 날마다 닦아야 하지. 그 일에는 최소 대여섯 명이 필요할 거야. 으음, 화초도 손질해 줘야 하는데……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전부 다 할 수 있어요! 대신 채청 누나한테는 다구를 씻는 일을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다구를 관리하는 일은 쉽잖아. 그런데 왜 네가 아니라 채청한테 시키라는 거야? 너보다 나이도 많고 힘도 셀 텐데?”

“아모가 얻어맞고 온 뒤로 누나가 날마다 빨랫감을 모아다 빨아서 돈을 벌고 있어요. 거기에 할머니랑 려아까지 돌봐야 해서……. 그래서 여기선 좀 덜 힘든 일을 했으면 해서요.”

그 말에 금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어린 나이에 철이 너무 빨리 들어 버린 듯했다.

목운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남아를 아직 개방하지 않은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일단 이 길부터 깨끗이 쓸도록 해. 얼마나 잘 치우는지 보고 널 쓸지 말지 결정할 테니까.”

“네, 당장 할게요!”

금란은 남아에게 빗자루를 찾아다 준 뒤 목운요를 따라 옆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소저,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마음이 참으로 곱지 않아요? 저런 아이와 같이 지내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요.”

남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길을 깨끗이 쓸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길가 양쪽의 화단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운요는 금란에게 자수와 실을 가져다 달라고 한 뒤 정자에서 미인도를 짓기 시작했다.

한 시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남아가 다가왔다. 목운요가 수를 놓는 모습에 아이는 그 옆에 조용히 서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숨소리마저 억누르는 남아에 목운요는 소씨 가문에서 보낸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자신 역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한 채 살얼음판을 걷듯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 쓴 거니?”

“네, 소저.”

멀리서 봐도 길이 유난히 깨끗했다. 양쪽 화단도 나름 손질한 티가 났다.

“금란, 데리고 가서 손 씻을 물을 내주고 먹을 것도 챙겨 주세요.”

먹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배 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울렸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남아는 금란에게 손목이 잡혀 끌려갔다.

손을 씻고 오자, 탁자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졌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향긋한 향기에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목운요가 남아에게 접시를 밀어 주었다.

“앉아서 먹어. 청소해 준 대가로 준비한 거니까 공짜는 아닌 셈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어도 돼.”

남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옷에 손을 슥슥 문질렀다.

먹음직스러운 음식도 음식이지만, 음식이 담긴 접시마저 여간 비싸 보였다. 괜히 자신이 만졌다가 깨는 건 아닌지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을 팔아도 저런 접시 하나 사지 못할 것이다.

이에 남아가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자, 목운요가 그 앞으로 먹을 것을 덜어 주었다.

“먹어 보렴.”

침을 꿀꺽꿀꺽 삼키면서도 남아는 힘들게 고개를 치켜들어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 이거 집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아모가 상처가 심해서 온몸이 불덩이예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채청 누나가 걱정이 많아요. 이런 걸 먹으면 나을지도 몰라서…….”

“이건 너 먹어. 이따 집에 갈 때 금란한테 먹을 걸 싸 주라고 할 테니까.”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남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딴에는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아이인지라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입 안으로 음식을 잔뜩 쑤셔 넣었다.

금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따뜻한 물을 따라 주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아무도 안 빼앗아 먹는다.”

게걸스레 음식을 집어삼키던 남아의 눈가가 순간 발갛게 물들었다. 남아는 손으로 눈가를 비비더니 어렵사리 입에 있던 음식을 꿀꺽 삼켰다.

“감사합니다, 소저. 절 불쌍하게 여겨서 일부러 일을 시키고 먹을 것도 내주셨다는 거 알아요. 길만 쓴 것뿐인데, 그것도 한참이나 걸려서……. 그 정도로는 이런 걸 죽었다 깨어나도 먹지 못할 거예요……. 소저는 좋은 사람이니 분명 복 받으실 거예요.”

남아의 말에 금란은 콧등이 시큰거렸다.

목운요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다른 접시를 밀어 줄 뿐이었다.

“일단 먹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일수록 철이 빨리 든다고 하던가. 배고픔이 뭔지,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뭔지 남보다 먼저 알게 되면 철이 안 들고 싶어도 들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비운 남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너무 많이 먹는다고 소저가 마음을 바꾸면 어떡하지?!

“저, 저기…… 평소에는 이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하루에 밥 한 끼만 먹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흐윽…… 그러니까 일할 기회를 주세요, 흐으윽…….”

채청 누나 말처럼 식탐을 부리는 게 아니었는데…….

그렁그렁한 남아의 눈을 목운요가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직 어리지만 하루에 한 끼 먹고 어떻게 버티겠니? 내일도 청소를 도와줄래? 옷을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 매일 청소를 도와주면 품삯으로 두 끼 식사와 다섯 푼을 줄게.”

남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곤 목운요를 향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소저!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깨끗한 옷과 맛난 밥, 거기에 돈까지 벌 수 있다니. 이런 날이 자신에게 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내 금란이 먹을 것을 싸 가지고 오자,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내일 가게 문을 열 때 오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소저!”

금란은 아이에게 보따리를 내주며 손짓했다.

“이리 와. 내가 데려다줄게.”

“고마워요, 누나.”

남아가 미안한 듯 고개를 들자, 금란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남아의 얼굴이 푹 익은 홍시처럼 달아올랐다.

목운요는 진 총관에게 정원을 돌봐 줄 사람을 구한 것 같다고 했다. 남아의 이야기를 들은 진 총관은 연신 칭찬을 늘어놓으며 몰래 돌봐 주겠다고 대답했다.

* * *

하지만 이튿날 아침, 남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저, 두 번이나 내다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금란의 이야기에 목운요는 채청이라는 소녀가 떠올랐다. 의심이 많은 그 아이가 남아에게 가지 말라고 한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장부를 넘기던 손을 멈추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정말 오기 싫어서인지 육냥에게 알아보라고 해요.”

“예, 소저.”

남아라는 소년이 금란 역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소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로 소저가 앞으로 출입을 금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한데 금란이 방문을 나서기 전, 금교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금교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하아, 하아……. 소저. 남아, 남아가 왔습니다. 문 앞에 무릎 꿇은 채 울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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