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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76화 (76/442)

76화 거지 소년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목운요가 일어난 소리를 들은 금란이 문을 두드렸다.

“소저, 일어나셨나요? 들어가도 될는지요?”

“들어와요.”

계화주는 그리 독한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술을 처음 마셔 본 탓에 술 몇 잔에 곯아떨어진 것 같다. 다행히 하룻밤 푹 자고 났더니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소저,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진 총관님이 성상의 묵보에 관한 일로 두 번이나 찾아오셨어요. 아직 주무신다고 하니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일단 씻고 정신을 차려야겠어요.”

한데 탁자 위에 있는 낯선 꽃병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옥으로 만든 꽃병에 노란 계화꽃이 달린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그 시선을 깨달은 금란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육냥이 꽃병을 찾아 달라고 했어요. 소저께서 계화꽃을 무척 좋아하신다면서…….”

탁자로 다가가 계화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목운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확실히 좋아하죠. ……이걸 나중에 어머니 방에 놓도록 해요.”

“예, 소저.”

* * *

단장을 마친 목운요는 간단히 요기한 후, 금수원으로 향했다.

성상의 묵보 덕분에 불선루는 아침 일찍부터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외부에 더 이상 초대장을 보내지 않아도 될 만큼 가게 운영도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예약한 시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빈자리는 다른 손님에게 양도되기 때문에, 빈자리를 알선해 주는 대가로 푼돈을 손에 쥐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지금도 금수원 밖에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한 사내아이가 목운요 앞으로도 쪼르륵 달려오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소저, 오늘 예약은 꽉 차서 당장은 빈자리가 없는 것 같아요.”

난데없는 그 말에 목운요는 발걸음을 멈춘 채 아이를 살펴봤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는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빳빳하게 풀을 먹인 덕에 단정해 보였다.

목운요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아이는 겁을 집어먹은 듯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에 목운요는 아이를 안심시키듯 작게 웃어 주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나는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온 거니 괜찮단다.”

“아, 그렇군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이는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쪽 뺨에 수줍게 핀 볼우물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이니?”

목운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이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그냥 여기 있는 것뿐이에요.”

“이곳에?”

뒤에 있던 금란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부터 금수원 입구에서 발품을 팔고 있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가게 안에 빈자리를 발견하면 손님들한테 알려 주고 푼돈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안한 얼굴로 목운요를 쳐다봤다.

“제법인걸.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줬니?”

“누나가요.”

아이는 솔직하게 목운요에게 답했다.

그때 멀리서 달려오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목운요에게 고개를 숙이며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소저. 동생이 아직 어려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부디 용서해 주세요. 남아, 어서 소저에게 사과드려.”

“누나…….”

남아라고 불린 소년은 고개를 숙인 채 옷자락을 말아 쥐었다.

“죄, 죄송합니다…….”

“후후, 오해한 것 같네. 동생은 결례를 범한 게 아니라 날 도와주고 있었거든. 혹시 시간 되면 두 사람한테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목운요의 제안에 소녀는 즉각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괜찮아요. 소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저흰 이만…….”

“누나, 나 배고픈데…….”

소년이 소녀의 옷자락을 잡아다 끌며 속닥거렸다.

“조용히 해! 저흰 이만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소녀가 목운요에게 인사를 올린 뒤 소년을 끌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운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금란과 함께 금수원 안으로 들어갔다.

* * *

목운요가 왔다는 소식에 진 총관이 빠르게 달려 나왔다.

“소저, 오셨습니까? 그 편액 말입니다…….”

“네, 육냥이 조금 있다가 묵보를 가져올 거예요. 묵보를 필사해 편액으로 만들면 될 거예요.”

“예예! 경릉성에서 가장 유명한 표구사를 이미 찾아 놨습니다.”

“후후, 총관님이 어련히 잘 알아보셨겠죠.”

그 말에 진 총관은 자신이 성급하게 굴었다는 생각에 너털웃음만 터뜨렸다.

“소저, 성상의 편액을 구경하기 위해 평소보다 예약이 두 배나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엔 찻잎을 사고 싶다며 상인들이 여럿 찾아왔지요. 다관의 규모가 작아 예약석이나 찻잎을 제때 내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돈을 싸 들고 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건만, 내줄 물건이나 자리가 없으니 아쉽더라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월왕을 생각하면 진 총관으로서는 한 푼이 아쉬운 판이었다.

“차 덖는 기술을 가진 전문가를 구해 제이, 제삼의 불선루를 세우는 것도 좋겠네요. 불선루의 규모가 나날이 커지게 되면 다른 곳에 분점을 세울 수도 있을 거예요.”

목운요의 설명에 진 총관이 제 이마를 탁 하고 쳤다.

“머리가 굳었나 봅니다.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생각도 못 하다니……. 못난 꼴을 보여 민망하네요.”

“후후, 마음이 급해서 잠시 생각이 나지 않으신 것뿐인데요, 뭐. 하지만 앞으로는 옥석을 가리는 일에 매달리셔야 할 거예요. 분점을 세우다 보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쓸 만하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요. 규모를 키우는 데만 급급해 명성에 먹칠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쓸 만한 사람들을 엄선해 둘 테니 소저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후, 좋아요. 이제부터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하늘에서 돈이 쏟아지겠네요.”

진 총관이 물러가자, 목운요는 육냥을 불러 방금 만난 아이들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소저, 그 아이들한테 왜 관심을 보이시는 거예요?”

어느 곳이든 동냥해서 먹고사는 거지가 어디 한둘이던가? 서릉에도 그럴진대 하물며 경릉성이야…….

금란의 질문에 목운요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왠지 흥미가 생기네요. 쓸 만하면 살길을 찾아 줄 생각이에요. 힘들이지 않고 쓸 만한 사람을 찾아낸다면 일석이조잖아요.”

“하긴, 거지라고는 하지만 그중에는 분명 괜찮은 아이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여태껏 남의 도움만 받고 산 터라 먹고살 길을 마련해 줘도 제 발로 걷어차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당장 쓰겠다는 건 아니에요. 정말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옥석을 잘 골라야 하겠죠.”

불선루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운방이 다시 문을 열게 되면 큰돈이 굴러오게 될 거다. 그때를 대비해 다른 곳에서 제이, 제삼의 하운방과 불선루를 열려면 실력 있는 후임자를 미리 길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목운요는 육냥에게 일을 맡긴 뒤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이 돼서야 육냥이 돌아왔다.

“말씀하신 소년과 소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유국(慈幼局) 출신이라고 합니다.”

“자유국?”

“예. 경릉성의 고아, 과부, 노인을 돌보는 곳으로, 소녀의 이름은 채청(采青), 소년의 이름은 남아라고 합니다. 며칠 전부터 금수원 밖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답니다. 채청이라는 아이는 자수법을 배운 적이 있는데, 자유국에서 지내는 다른 아이가 사고를 당하자 그 아이를 보살펴야 한다며 침방에 발길을 끊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네. 좀 더 알아보도록 해.”

“혹시…… 사람이 필요하신 겁니까? 쓸 만한 자들을 찾아 놨으니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에 육냥에게 돈을 건넨 후 목운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육냥이 쓸 만한 사람들을 찾았다는 건가?

“믿을 만해?”

“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육냥에게 목운요가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육냥, 그러고 보니 네 진짜 이름도 여태 알려 주지 않았잖아. 예전에 무슨 일을 했던 거야?”

목운요가 육냥의 됨됨이를 믿는 것은, 회귀 전 생에서 그가 진왕을 보필하며 보여 준 충성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육냥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목운요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혔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주인님을 배신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생각 없이 가볍게 물어본 것뿐인데 육냥은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 것은 되레 목운요 쪽이었다. 육냥의 눈빛이 이상하리만치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널 못 믿었다면 어머니나 내 목숨을 너한테 맡겼을 리 없잖아. 일어나. 이야기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기억 안 난다고 거짓말은 왜 해?”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걸 보니 순간 화가 났다.

“이젠 내 명령도 안 듣겠다는 거야?”

가시 돋친 말에 육냥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당황한 빛으로 역력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전 다만…….”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라고 하잖아. 널 안 믿었다면 일찌감치 쫓아냈을 거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건데 이렇게 나오니까 오히려 수상하다고.”

가뜩이나 말재주가 없는 육냥인데, 목운요한테 타박까지 듣자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잔뜩 굳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운요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아는데 그런 사람을 상대로 화낸들 무엇하랴?

“일어나.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나도 묻지 않을게.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진 총관의 동향을 살펴봐 줘. 나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해 두는 편이 좋겠어.”

지금은 월왕과 손을 잡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예, 주인님.”

“네 사람들한테 말해 둬. 샅샅이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쨌든 들키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확실히 말해 두겠습니다.”

“응, 나가 봐.”

육냥이 나간 후 목운요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육냥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지금 모습대로 계속 있어 줬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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