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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75화 (75/442)

75화 볼 빨간 소녀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소청은 또다시 대역무도한 말이 나오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요아야,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상한 말을 한 게 아니라 성상께 저희 모녀를 지켜 달라고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서 공공께서 제가 드린 차를 성상께 올렸다고 해요. 제가 드린 뇌물을 생각해서 잘 봐 달라고 부탁드린 거라고요.”

“성상께서는 천하를 가지셨는데 네 찻잎이 눈에 차기나 하시겠니?”

“그건 어머니가 잘 모르셔서 그래요. 황제라는 자리는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자리이기도 해요. 친아들조차 그 자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렇게 살 바에야 우리처럼 마음 편히 사는 게 차라리 낫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래도!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진 총관님 등을 모셔 오려무나.”

“예.”

묵보를 힐끔 쳐다보는 목운요의 눈매가 또다시 가볍게 휘어졌다. 그야말로 명필이었다. 기세 넘치고 엄격한 필체만 보더라도 누군가의 목숨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노련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귀 전 비천한 신분 탓에 황상을 뵐 기회는 없었지만, 그간의 성과를 보건대 명군(明君)이 분명했다.

그사이 진 총관이 위일과 운춘 등을 데리고 소택으로 향했다. 집 안 곳곳을 살피는 그의 눈빛이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반짝거렸다.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까지. 어디 하나 허툰 구석이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목 소저와 왕야의 성정은 한마디로 천양지차로구나.

왕야의 관저는 대부분 연무장으로 개조한 상태였다. 방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지만 냉랭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소택과 비교해 보니 왕야의 관저에서는 사람 사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총관님, 어서 안으로 오세요.”

“허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란이 다가와 음식상을 어디에 차릴지 목운요에게 물었다.

“날씨도 좋은데 정원에서 먹어요. 달구경도 할 겸. 어떠세요, 총관님?”

“소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잠시 뒤에 다 같이 달구경 해요!”

방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정원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시간 한번 정말 빠르다. 알게 모르게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착착 진행됐다.

일 년 뒤에 그녀는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서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 그때 소청오가 너무 놀라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 * *

옷을 갈아입고 정원에 들어서자, 금란과 금교가 목운요를 소청 옆으로 이끌었다.

“소저,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소청의 자리는 상석이었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편이었다. 그동안 금 부인의 영향으로 적어도 이런 상황에 맞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요아야, 네가 여기 앉으렴.”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소청의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이 자리는 어머니만 앉으실 수 있어요. 자리에 앉으시면 저희들이 술을 올릴게요!”

눈치 빠른 진 총관이 거들고 나섰다.

“암요, 암요! 그동안 부인께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첫 잔은 제가 올리겠습니다.”

“고생이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별 도움도 못 드렸는걸요.”

소청은 얼굴을 붉힌 채 극구 사양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소청 역시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동자, 목운요가 직접 지은 옷과 머리 장식까지 걸치자 우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런 소청을 바라보던 진 총관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목운요가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대체 누가 그러던가요?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하운방은 열지도 못했을 거예요.”

금란과 금교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고말고요! 소 부인께선 화 한 번 내지 않고 늘 친절히 가르쳐 주셨는걸요.”

“맞아요. 자수를 놓다가 손을 다치면 직접 연고도 발라 주시고.”

“저한테도 그러셨어요!”

함께한 시간이 길다 보니 모두들 소청과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에 소청은 크게 감동했다. 그동안 자신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조차 잊었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해 주는 마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첫 잔은 부인에게 올립니다. 소 부인, 항상 건강하세요!”

“원하시는 일 다 이뤄지시길 빌게요!”

“언제나 행복하세요!”

사람들이 앞다투어 축하 인사를 건네자, 소청은 감동 어린 표정으로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다 같이 건배해요! 앞으로 우리 모두 지금처럼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목운요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술은 소청이 준비한 계화주였다. 도수가 낮은 편이었지만, 한입에 마시자 배 속으로 홧홧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그럼 두 번째 잔은 목 소저에게 올립니다. 소저가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없었을 겁니다.”

진 총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그에 목운요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활짝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술잔이 몇 번 도는 사이,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목운요도 오늘만은 긴장을 풀고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셔 눈빛이 스르륵 풀렸다.

문득 소청오의 품 안으로 떨어뜨렸던 계화꽃이 떠올랐다. 불퉁한 기분이 든 그녀는 술병을 들고 금수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소청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요아야, 뭐 하려고?”

“으응……. 계화꽃을 꺾어다 드릴게요.”

“얼굴이 달아오른 걸 보니 술을 많이 마셨나 보구나.”

“어머니한테 가져다드리려고 꺾은 계화꽃을 기분 나쁜 녀석이 가져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다시 꺾어다 드릴게요.”

“괜찮단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소청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두 달 뒤면 아이도 열네 살이 된다. 앳된 분위기는 점점 사라지고, 꽃봉오리 같은 싱그러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이 술기운에 발갛게 물들자, 아리따운 꽃망울을 연상시켰다.

“어머니는 절 사랑하지 않으시는 거죠?”

갑작스레 아이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자, 소청은 재빨리 금란을 불렀다.

“요아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으니 방으로 데려다주세요.”

“예, 부인.”

금란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향하던 목운요는 계화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금란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전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모처럼 쉬는 날인데 동생이랑 수다도 떨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요.”

“혼자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얌전히 잘 테니 걱정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금란은 목운요를 방으로 데려다준 뒤 조심스레 문밖으로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자, 목운요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곤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뛰어내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주인님!”

그때, 놀란 육냥이 목운요를 잡으려 잽싸게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가 더 빨랐다. 높이가 높지 않아 위험하진 않았지만, 술에 취해 있던 탓에 바닥에 착지하면서 발을 헛디뎠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자, 육냥이 바로 이상을 감지했다.

“혹 다치셨습니까?”

육냥은 제 느린 발을 원망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주인님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에 목운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어머니한테 들키면 안 돼.”

뺨을 붉게 물들인 채 싱글거리는 목운요를 육냥이 재빨리 훑었다.

“취하신 겁니까?”

“취하긴 누가! 어머니한테 금수원의 계화꽃을 꺾어다 드릴 거야.”

“해가 졌으니 지금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머릿속이 온통 계화꽃으로 가득 찬 목운요에게 육냥의 충고가 먹힐 리 만무했다.

“무서우면 여기서 기다려. 얼른 갔다 올 테니까.”

술기운에 붉게 물든 얼굴로 목운요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달빛을 품은 장미보다 요염했다.

휘영청 뜬 보름달 아래에서 목운요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육냥은 목운요가 술에 취했다는 걸 확신하곤, 빠르게 창문을 뛰어넘어 목운요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 부축했다.

그렇게 계화나무밭에 도착했을 무렵, 육냥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계화꽃을 발견한 목운요가 낮에 그랬던 것처럼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려고 했다.

그 모습에 육냥은 깜짝 놀라 목운요를 말렸다.

“주인님, 어떤 걸 꺾어 드릴까요? 제가 꺾어다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육냥에게서 벗어날 수 없자, 목운요의 눈썹이 구겨졌다.

“육냥, 나 나무에 올라가고 싶어. 날 안고 올라가 줘.”

새하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목운요의 모습에 육냥은 뭔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주인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육냥은 목운요를 품에 안은 채 나뭇가지에 앉혀 주었다.

굵은 나뭇가지에 앉은 목운요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를 찾은 듯 힘껏 꺾어 들더니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육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쁘지?”

백옥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움켜쥔 계화꽃은 무척 고왔다.

눈앞의 절경을 육냥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그럼 이걸 어머니한테 가져다드려야겠다. 아까 꺾은 건 그냥 잊어버려야지.”

말을 마친 목운요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리려는 듯 발을 버둥거리자, 육냥이 황급히 막아섰다.

“조심하십시오!”

“후후, 예전에는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걸핏하면 혼이 났었지. 그런데 나랑 지내면서 말도 늘고 말이야, 그놈이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걸!”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육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이라니?

“취하셨습니다.”

“아니, 나 완전 멀쩡하거든…….”

목운요는 고개를 들고는 나뭇가지 끝에 걸린 달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달빛 아래 비친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녁 구름 걷히니 맑고 찬 기운이 가득한데, 은하수가 소리 없이 달 옆을 흐르네. 이 생, 이 밤이 오랫동안 좋을 수는 없으리니- 밝은 달아, 내년에는 어디서 너를 보겠는가.(暮雲收盡溢清寒, 銀漢無聲轉玉盤. 此生此夜不長好, 明月明年何處看.)”

내년 이맘때쯤엔 자신은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여유롭게 달빛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겠지…….

목운요의 아련한 표정에 육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곳의 풍경이 마음에 들면 내년에도 보러 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후후, 주사단계(朱砂丹桂)라는 품종은 피처럼 붉은 꽃망울을 지닌 계화꽃인데, 무척 아름답다고 들었어. 내일 이 나무를 베고 주사단계를 심도록 해.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붉은 계화를 보고 싶으니까…….”

소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복수의 서막이 펼쳐질 것이다. 보름달 아래 붉게 물든 계화꽃이 분위기를 돋우는 데는 제격이겠지.

“예,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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