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성상의 묵보
목운요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소매 안쪽에서 월왕이 놓고 간 비수를 꺼냈다.
“이 비수를 얻은 후 자세히 살펴보니 가장자리에 흐릿한 문양이 있는 걸 발견했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뭔지 잘 몰랐을 테지만, 이게 ‘월(鉞)’ 자라는 걸 금방 눈치챘답니다.”
그에 진 총관은 목운요가 건넨 비수를 받아 들곤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비수 옆에 월왕이 직접 새긴 문양이 보였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목 소저, 왕야의 신분을 눈치챘으니 어찌할 생각입니까?”
“제게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왕야께선 높으신 분이니 저 같은 일개 평민이야 그저 왕야께 잘 보이는 게 다인걸요.”
목운요의 대답에 진 총관은 좀처럼 그녀의 속내를 읽어 낼 수 없었다. 정씨 가문을 비롯해 경릉 동지와 선무사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린 그녀였다.
진 총관의 침묵이 이어지자, 목운요는 더 이상 그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참, 어머니께서 내일 추석이라며 괜찮으시면 식사 같이하지 않겠느냐고 여쭤보라 하셨어요. 진 총관님도 경릉성에서 혼자 지내시고, 위일과 운춘 등도 돌아갈 곳이 없으니 다 같이 모여서 명절을 보내는 게 어떨까요?”
“먼저 그리 말씀해 주시면 저야 좋지요.”
진 총관은 목운요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목운요가 왕야의 신분을 알게 된 데다 불선루를 매개로 왕야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테니, 소 부인과 미리 친분을 쌓아 두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목운요는 유난히 제 어머니를 챙기는 편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가서 어머니랑 음식을 만들어야겠어요.”
“조심히 가십시오, 소저.”
목운요가 자리를 떠나자, 진 총관은 부리나케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붓을 놀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서신을 최대한 빨리 보낼 방도를 고민했다. 지금처럼 서신을 서로 주고받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면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왕야께서 하운방을 지킬 방법을 찾아보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목운요는 하운방과 불선루를 위한 성상의 묵보를 받아 냈다.
쯧, 이리 보니 자신이 참으로 쓸모없는 늙은이처럼 느껴졌다.
* * *
이튿날 아침, 목운요는 일찍부터 단장에 서둘렀다. 순무부에서 사람이 온 터였다.
그의 안내를 따라 순무부로 향한 목운요가 순무 부인에게 살며시 절을 올렸다.
“부인을 뵙습니다.”
“후후, 우리 사이에 인사는 무슨? 어서 일어나거라. 하운방을 다시 짓는다고 들었다. 마침 하운방 주변의 몇몇 상점이 내 명의로 되어 있는데, 네게 주고 싶구나.”
“아닙니다, 부인! 그리 귀중한 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귀중하긴 뭐가 귀중해? 평소에도 큰돈을 벌던 곳이 아닌 데다, 네가 지어 준 옷 덕분에 나도 골치 아픈 문제가 사라졌는걸. 일찌감치 고맙다는 뜻을 전해야 했는데, 하운방을 새로 짓는다고 하니 선물로 주고 싶단다. 상점들을 부수고 새로 지어도 좋고, 아니면 옷만 내다 팔아도 좋다. 모두 네 마음대로 하렴.”
“하, 하지만……. 무슨 대가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인을 돕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후후, 금 부인이 네가 이런 아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이로구나. 내 솔직히 이야기하마. 네가 전수한 자수법으로 순무 대인과 나 또한 네 덕을 보았단다. 그러니 네가 이 선물을 받아 줘야 우리 마음이 편해질 듯하구나.”
때마침 금 부인이 당도했다는 시녀의 말에, 순무 부인이 바로 안으로 모시라고 일렀다.
“금 부인, 마침 잘 오셨어요. 이리 와서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벽창호를 구경해 보십시오!”
환한 미소로 맞이하는 순무 부인에게 금 부인은 살며시 절을 올렸다.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집문서와 땅문서를 본 금 부인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부인, 이 아이는 늘 이렇답니다. 부인께서 괜찮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운요야, 순부 부인께서 주시는 선물이니 감사히 받아 두도록 하렴. 그리 죄송스러우면 부인에게 옷을 더 지어 드리거라.”
“하, 하지만 제가 지은 옷을 어찌 몇 개나 되는 상점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네 옷도 비싸지 않니? 한 벌에 수천 냥이나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옷을 지어 드린다면 신세 지는 건 네가 아니라 순무 부인일지도 모르겠구나.”
금 부인의 농담에 순무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금 부인의 말씀이 옳다. 나중에는 네가 아니라 내가 신세를 질지도 모르지.”
더 이상 사양하는 건 결례라는 생각에 목운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옷은 앞으로 제가 책임질게요. 앞으로 어여쁜 옷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후후,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목운요가 집문서와 땅문서를 받아 들자, 순무 부인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으니 그만 앞뜰로 갑시다. 운요는 묵보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할 테니 말이죠.”
“사실 어젯밤에도 두근거려서 밤새 뜬눈으로 보냈답니다.”
“후후, 앞으로는 날마다 성상의 필묵을 볼 수 있을 테니 마음껏 푹 잘 수 있겠구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목운요의 모습에 순무 부인과 금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지난번 성상께서 하사하신 상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앞뜰에 향안을 세운 뒤 성은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그러자 소청오가 묵보 두 필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목운요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청오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소 대인.”
소청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표정이 지난번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목 소저, 소저의 찻잎을 성상께 올렸다는 말을 서 공공께서 꼭 전해 주라 하셨습니다.”
“와아, 정말이요?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서 공공의 말과 성상의 묵보도 모두 전했으니 저는 그만 서릉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장 순무가 깜짝 놀랐다.
“소 대인, 오늘이 마침 추석이니 순무부에서 하루 쉬었다가 가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장 대인의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서릉에서 처리할 일이 많아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을 듯합니다.”
소청오의 단호한 대답에 장 순무도 더 이상 잡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준비한 선물과 음식을 건넸다.
“소 대인, 공무를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간단히 요기할 것을 준비했으니 돌아가시는 길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 대인.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에 오른 소청오가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자, 말이 불안한 듯 뒷걸음질 쳤다. 목운요를 돌아보는 그의 깊은 눈동자가 잔뜩 흐려져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 눈빛의 정체를 목운요가 확인도 하기 전에, 소청오는 뿌연 흙먼지를 남긴 채 멀리 사라졌다.
순식간에 경릉성을 빠져나온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삐를 당긴 채 성문을 되돌아봤다.
“대인, 하룻밤 묵고 가라던 순무의 청을 어찌 거절하신 건지요?”
“아무리 이곳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해도 서릉의 것만 못하지. 순간의 흥미에 이끌려 평생 여기서 썩을 생각이냐? 쓸데없는 짓을 하기 전에 미리 몸을 빼는 게 낫다.”
그의 표정이 혼란스럽게 변한 것도 잠시,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가자!”
* * *
장 순무와 순무 부인은 목운요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권했지만, 집에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대답에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오늘 같은 명절에 식구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장 순무는 호위들을 불러 목운요를 금수원까지 안전히 호송하라고 지시했다.
진 총관은 위일과 운춘 등과 함께 금수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목운요가 묵보와 함께 오자 공손히 바닥에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성상의 묵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그중에는 불선루의 단골들도 있었는데, 불선루에서 차를 마셨다는 자랑스러움이 그들의 얼굴에서 묻어났다.
평민인 목운요가 성상으로부터 묵보를 받았다는 소식은, 경릉성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백성들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워했다.
이로 인해 하운방과 불선루는 경릉성을 대표하는 명소로 누구도 함부로 그 자리를 넘볼 수 없게 됐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거리의 인파도 한산해졌다. 목운요는 묵보를 집으로 가지고 와서 소청에게 자세히 보여 줬다.
묵보를 확인한 소청은 뛸 듯이 놀랐다.
“성상의 묵보를 이리 함부로 다뤄서야 쓰겠니? 금수원에 가서 보면 될 것을, 뭐 하러 집까지 가져온 거야?”
“뭐 어때요? 성상께서 제게 주신 거니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걸요. 성상께서도 그리 꽉 막힌 분은 아니실 거예요.”
그 말에 소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묵보를 조심스레 살펴봤다.
“성상께서 손수 쓰신 묵보라서 그런지 달라 보이는구나. 이걸 보렴. 위엄과 권세가 절로 느껴지지 않니? 이런 게 용의 기운이라는 건가 보구나!”
“쿡쿡, 성상께서 쓰신 글자에 용의 기운이 담겨 있는 거면 성상의 몸에는 용의 비늘이 자라는 건가요?”
“얘가, 어디서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소청은 두 손을 가지런히 합장을 한 채 절을 올렸다.
“아이가 철이 없어 한 말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요아야, 너도 어서 잘못했다고 절을 올려야지!”
보기 드물게 잔뜩 굳은 소청의 모습에 목운요는 묵보 앞으로 걸어가서 절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 어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영민하고 용맹한 분이시라면 진왕과 소씨 가문을 단단히 벌해 주세요. 그들이야말로 나라를 갉아먹는 쥐새끼들이니까요. 제가 드린 차도 마셨다니 꼭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