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다시 만난 소청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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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운요가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진 총관은 금수원 담장에 비밀 출입문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이렇게 하면 멀리 정문을 빙 돌아올 필요 없이, 언제든지 쉽게 금수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목운요는 인파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오솔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곧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혀 주는 계화 향기가 그녀를 반기었다.
고개를 들자, 담장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푸른 잎사귀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꽃봉오리가 앙증맞아 보여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되었다.
한편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소청오가 서성이고 있었다.
사실 성상의 묵보를 호송하는 이번 황명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됐다. 하지만 소청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다녀오겠노라 대답했다.
본인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원인을 곰곰이 따져 봤지만 끝내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휘하의 호위가 성상의 묵보를 가지고 순무부에 간 사이, 그는 금수원에 들러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다리에 오르자, 그날 난간에 손을 드리운 채 희미하게 웃던 목운요가 떠올랐다. 심란한 기분이 든 탓에 소청오는 인파가 드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무성한 갈대밭을 돌아 나오는 순간, 맞은편에서 계화꽃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목운요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담장 위로 삐죽 솟은 계화를 매만지고 있었다.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소청오가 금수원을 찾았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목운요는 여전히 꽃봉오리를 매만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금란과 금교가 바구니를 들고 뒤따라왔다.
“저희가 꽃을 꺾을 테니 소저께서는 아래서 기다리세요.”
하지만 그녀는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바구니를 들었다.
“예전엔 아버지랑 둘이서 물고기도 잡고, 나무에 올라가서 새 둥지도 털었는데…….”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던 아버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할머니 이 씨에 대한 증오심에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그리 애틋한 기분은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 못지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란과 금교는 목운요의 울적해하는 모습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운요는 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침 그다지 높지 않은 위치에 어여쁜 꽃봉오리가 보이자, 그녀가 굵은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소저!”
잽싸게 나무를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에 금란과 금교가 깜짝 놀라 나무 아래로 달려왔다. 그녀들은 얼른 내려오라며 수선을 피웠다.
“소저, 소저! 얼른 내려오세요. 떨어지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요!”
한편 나무 위에서 자리를 잡은 목운요는 긴장한 표정의 금란과 금교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웃고 난 뒤에 고개를 들자, 계화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란 꽃봉오리가 바람에 흔들거릴 때마다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목운요의 눈가가 휘어졌다. 계화를 원 없이 구경한 뒤에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다.
소청오는 금란과 금교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리자,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어 계수나무밭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던진 계수나무 가지가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소청오! 저자가 왜 여기에?!’
놀란 목운요가 고개를 숙인 순간, 나무 위를 쳐다보던 소청오와 시선이 얽혔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소청오는 눈부신 햇살을 등진 채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목운요의 모습을 보곤 눈도, 마음도 멀고 말았다. 계수나무 아래서, 그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난생처음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청오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금란과 금교는 재빨리 절을 올린 뒤 나무에서 내려오는 목운요를 부축하러 달려갔다.
목운요는 치맛자락을 정리한 뒤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소 대인을 뵙습니다. 서릉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나요? 어찌 금수원에 계신 거죠?”
“목 소저, 잘 지내셨습니까? 성상께서 하사하신 묵보를 제가 호송해 왔답니다.”
그 이야기에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성상께서 정말 제 청을 들어주신 건가요? 성상의 묵보는 지금 어디 있나요? 당장 받을 수 있나요?”
“금군의 호위가 순무부에 묵보를 가져다 놓았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순무부에서 사람을 보낼 겁니다.”
“후후, 내일이 마침 추석인데 잘됐네요. 금란, 금교! 얼른 어머니께 돌아가죠. 아, 소 대인. 이곳은 아직 외부에 개방되지 않았는데 차를 드시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셔야 할 거예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까요?”
“괜찮습니다. 저도 다른 볼일이 있어서…….”
“예, 그럼 안녕히 가세요!”
말을 마친 목운요가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소청오가 금수원을 나서자 시종이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대인, 대인이 오셨다는 소식에 장 순무께서 연회에 참석해 달라며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거절하도록 해라. 먼 길을 오느라 고단하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예, 대인!”
말에 오르려던 순간, 아직도 손에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푸른 나뭇잎과 통통하게 물이 오른 꽃봉오리가 앙증맞게 달려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대인?”
시종의 부름에 소청오가 미간을 구기며 나뭇가지를 홱 하고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잽싸게 말에 올라 자리를 벗어났다.
* * *
소청오의 등장으로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목운요는 성상의 선물을 떠올리고는 불쾌한 존재를 새카맣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머니, 편액이 도착했대요!”
“편액? 황상께서 내리셨다는 묵보 말이니?”
“맞아요. 내일 순무부에서 가져오면 돼요.”
소청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 안을 끊임없이 서성였다.
“정말 잘됐구나, 잘됐어! 마침 내일이 추석이니 제대로 축하를 해야겠구나.”
“좋아요! 참, 진 총관님한테도 얼른 말씀드려야겠어요. 은근 기다리고 계시던 눈치였는데!”
“후후, 그래. 어서 가 보려무나. 그보다 운요야. 진 총관님을 뵙거든 내일 다 같이 모여서 밥이나 같이 드시지 않겠느냐고 여쭤보거라. 총관님께선 경릉성에서 가족 없이 혼자 지내신다고 하던데……. 이참에 다 같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소청의 제안에 목운요가 대찬성이라며 활짝 웃어 보였다.
“역시 어머니세요! 내일 불선루도 일찍 문을 닫을 테니 다 같이 모여서 맛난 밥도 먹고 즐겁게 놀아요!”
“그래, 그럼 난 가서 준비하마.”
신이 난 소청은 사금 등을 불러 음식 준비에 나섰다. 꽤 많은 사람에게 해 먹일 음식을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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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총관은 성상으로부터 묵보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오오,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황상의 편액이라면 누가 감히 불선루를 건드리겠는가?
운만 따라 준다면 왕야가 불선루를 발판 삼아 강남 곳곳에 감시자를 심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사야에게 서신을 써야겠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사야가 먼 곳에 계시니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요?”
“그럼요. 월서에 보내는 것이니 최소 보름은 걸린답…….”
목운요의 기습 질문에 진 총관은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크흠……. 그러니까 그게, 주인님께서 장사 때문에 월서에 가신 터라…….”
말을 하면 할수록 수습이 되기는커녕 꼬이는 분위기가 되자, 진 총관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월서는 춥고 산세가 험한 변방의 땅이라고 들었어요. 만년설이 쌓여 있을 만큼 혹독한 땅이라서 초목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하던데, 그런 곳에 장사할 만한 것이 있나요?”
“주인님이 하시는 일은 저도 잘 알지 못하여…….”
“진 총관님, 이제 불선루에 성상의 묵보를 내걸고 나면 그 위세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사야의 신분을 모르고 뜻에 맞지 않는 일을 벌인다면 불선루에 해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사야는 서릉 사람으로, 나라의 봉록을 먹은 조상님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꽤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소 대인한테 여쭤봤지만 서릉에 영씨 성을 가진 가문 중 장사를 크게 하는 이는 없다고 하셨는걸요.”
“소 대인이라면…… 소청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라 서릉에 대해 다 안다고 할 수는 없…….”
“이번에 성상의 묵보를 경릉성으로 호송해 주신 분이 바로 소 대인이에요. 총관님,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소 대인을 찾아가서 사야의 초상화를 보여 드릴 거예요.”
“앗,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성상의 생신을 축하하러 서릉에 올라갔던 왕야를 소청오가 봤었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 준다면 분명 큰 사달이 날 것이다.
“제가 그리하기 전에 총관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목운요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진 총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총명한 소저께선 이미 눈치채고 계신 것 같군요.”
월왕의 신분을 밝히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신도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진 총관의 물음에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야에게선 남다른 풍모가 느껴졌어요. 또한 영씨라는 성씨, 네 번째라는 의미의 ‘사’, 거기에 월서에 계시다는 총관님의 말을 종합해 볼 때…… 사야는 월왕 전하가 아니신가요?”
진 총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총명하시군요. 예, 사야께선 월왕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