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돌아온 정열람
정열람에게 약을 발라 주기 위해 옷을 들춘 목운요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야말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동안 무척 혹독한 시간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상처를 치료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어느 정도 치료를 마치자, 금란이 흰죽과 간단한 채소 요리를 들고 왔다.
목운요는 정열람 앞에 음식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 굶으셨다고 들었어요. 소화하는 데 부담이 되지 않게 부드러운 죽으로 요기하세요. 그리고 서재 안쪽에 잠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오늘 밤만 여기서 쉬세요. 내일 부인께서 지내실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정열람을 보며 목운요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문밖에 서 있던 금란과 금교가 목운요를 보곤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저, 정 총관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몸에 난 상처는 금방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찌 치료해야 할지……. 금교, 여기 남아서 부인을 챙겨 주세요.”
“예, 소저.”
* * *
이튿날, 소청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금란이 후다닥 달려왔다.
“소저, 정 총관님을 데리러 가겠다며 여의각에서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통해 정열람의 사연을 알게 된 소청이 그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요아야, 부인을 그런 생지옥에 돌려보내선 절대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확실히 처리할게요.”
대문 쪽을 힐긋 본 목운요가 금란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금란, 조금 있다가 금 부인이 오실 텐데 여의각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야 해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 * *
여의각의 주인은 마흔 살 남짓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었다. 화려한 외모와 옷차림을 보니 젊은 시절에 한가락 했을 것 같았다.
상대는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목 소저께서 경릉성 여인들에게 자수법을 전수한다는 이야기는 저희처럼 비천한 자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답니다. 비루한 신분 탓에 자수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게 아쉽지만, 소저를 크게 존경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령을 위반할 수는 있는 것은 아니죠. 매매 계약서를 쓴 이상 내 사람인데, 어찌 함부로 빼앗아 간단 말입니까?”
“그쪽이 여의각의 주인인가 보네요?”
“예.”
“본인 입으로 법령을 먼저 꺼냈으니 이야기하는 게 훨씬 수월하겠네요. 금란, 당초 정열람이 우리 하운방과 쓴 계약서를 가져다 보여 주세요.”
“계, 계약서?”
여의각 주인은 금란의 손에 들린 계약서를 보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열람이 하운방과 계약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젯밤에 그냥 만 냥을 받고 넘겼을 것이다.
이게 다 목운요한테서 한몫 단단히 뜯어낼 수 있다고 부추긴 정 대인과 노부인 탓이었다!
그제야 후회가 든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갑자기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뺏기다니,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차라리 여기서 혀를 깨물고 죽으렵니다!”
방금 전까지 또박또박 말대꾸하던 상대가 갑자기 생떼를 부리자, 목운요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한편 금수원에서 갑자기 곡소리가 나는 것도 모자라 정열람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불선루에 들어가려고 대기하던 이들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미 경릉성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정씨 가문에서 정열람을 여의각에 팔다니!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목운요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얼마를 주고 정열람을 샀는지 저와는 상관없어요. 계약서에 적힌 날짜가 되지 않았으니 정열람은 아직 하운방의 총관입니다! 이 일로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관아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거예요!”
여의각에 팔리기 전에 쓴 계약서가 자신의 손에 있으니, 시비를 가린다면 자신이 이길 것이 분명했다.
“목 소저, 소저는 옷 한 벌로 수천 냥을 버니 몸을 팔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연히 모를 거예요. 만 냥을 벌려면 우리가 손님을 몇 명이나 받아야 하는지 알아요? 정열람을 우리 가게의 간판으로 쓰려고 했는데, 남의 가게 사람을 막무가내로 빼 가면 우린 뭐 먹고 살라는 건가요? 게다가 유곽에 있던 사람을 하운방의 총관으로 삼는다면 누가 자수법을 배우러 오-”
“닥쳐라!”
서릿발 같은 외침에 여의각 주인은 입을 다물었다.
은홍의 손을 잡은 금 부인이 인파를 가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여의각의 주인이 깜짝 놀라더니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렸다.
목운요도 빠르게 달려가서 금 부인을 부축하며 화낼 것 없다는 눈짓을 보냈다.
금 부인은 그 손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웃음기 어린 눈빛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여의각 주인을 향할 때는 다시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정열람과 하운방의 계약이 먼저라면 분명 하운방의 사람이다. 헛돈을 쓴 게 아깝거든 정열람을 판 사람을 찾아가서 따질 일이지, 여기서 웬 소란이란 말이냐! 또다시 여기서 소란을 피우고 하운방 총관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금 부인이 여의각 문을 닫게 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예, 예!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썩 꺼져라!”
“가, 감사합니다!”
여의각 주인이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목운요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방금 일 때문에 놀랐나 싶어 금 부인이 목운요를 다독였다.
“여의각 주인의 말에 신경 쓸 것 없어. 잠시 소문이 돌지 모르겠지만 하운방에 별다른 영향은 없을 테니.”
이를 목운요라고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일이 생각과 달리 의외로 복잡하게 흘러갈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의각 주인이 무턱대고 자신을 찾아와 소란을 피웠을 리 없다.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소청이 금 부인을 안으로 모시고 가는 동안, 목운요는 육냥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무래도 수상해. 육냥, 정 대인과 노부인의 행방을 찾아봐.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이랑 만났는지 알아내도록 해.”
“예.”
그 모습에 금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여의각 주인은 바보가 아니에요. 정 부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만 냥이나 주고 사람을 살 리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육냥이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해요.”
하운방이나 불선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언제라도 공격받을 수 있다. 혹 채월각 쪽에서 자신을 향해 또다시 칼끝을 겨눴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 *
육냥은 며칠 동안 조사에 나섰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에 목운요는 여유롭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제까지고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상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하운방과 불선루 일을 관리하던 그녀는 휴식도 취할 겸 금란과 금교를 데리고 오랜만에 밖으로 나섰다.
커다란 거리에 들어서자, 가게가 거리 곳곳에 세워진 채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이 추석이네요?”
“네. 소저께서 아무 말도 없으시길래 추석을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추석에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인데, 왜 싫어하겠어요?”
하언촌에서 살 때는 추석 때마다 아버지와 성 곳곳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추석이 되면 아이들은 손에 토끼 모양의 등을 들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주신 토끼 등보다 멋진 건 본 적이 없었다.
“소저, 토끼 등 좋아하세요? 제가 하나 사 드릴까요?”
멍하니 토끼 등을 쳐다보는 모습에 금란이 입을 열자, 목운요가 됐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더 이상 열세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토끼 등을 든다고 해도 걱정 없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만들어 준 토끼 등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금란은 그런 목운요에게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착잡함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한…….
목운요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뚱뚱한 체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뒤로는 하인들로 보이는 장정 여럿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손가락이 잘린 자도 있었다.
뚱뚱한 사내는 예전에 목운요한테 혼쭐이 났던 채월각의 도련님인 담팔왕이었다.
목운요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는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이년, 드디어 보는구나! 감히 춘수방 사람이라고 날 속여? 네년을 찾으려고 서릉을 쥐 잡듯 뒤졌는데. 날 농락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 주마!”
* * *
지난 시절이 떠오른 탓인지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별 재미가 없자, 목운요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아이의 모습에 소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제대로 놀 거라고 하더니,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니?”
“어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그냥 왔어요.”
“후후, 하여간. 내일이 마침 추석이니 계화 꿀로 만든 떡과 월병을 만들어 주마.”
소청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며 갓난아이 어르듯 가볍게 속삭였다.
목운요는 그런 소청의 팔에 매달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가서 계화꽃을 꺾어 올게요!”
“사금에게 사다 달라고 할 거란다. 이맘때는 쉽게 계화를 구할 수 있으니 괜한 고생할 필요 없어.”
두 사람만 먹을 정도의 양이라면 조금만 사도 충분할 것이다.
“아니에요. 제가 꺾어 드릴게요. 금수원에 계수나무가 있어요. 마침 시간도 남고 하니 제가 가서 가장 예쁜 꽃을 따 올게요. 그걸로 떡을 만들어 주세요.”
“그건 손님들 보라고 정성껏 기른 건데 그 꽃을 꺾겠다니……. 그냥 후딱 가서 사 오면 되는데.”
“아니에요. 가장 예쁜 꽃은 손님이 아니라 어머니가 받으셔야죠. 얼른 갔다 올 테니 기다리세요!”
치맛자락을 쥐고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에 소청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금란과 금교에게 쫓아가라고 일렀다.
“요아가 다치지 않도록 얼른 가서 도와줘요.”
“예,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