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68화 (68/442)

68화 그윽한 연꽃향

* * *

정자 안에는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주변에 둘러앉으니 왠지 모르게 경계심이 사라지고 느긋한 기분이 들었다. 그 덕분에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가 한결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탁자 위에 일렬로 펼쳐진 다구를 향해 여러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새하얀 다구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였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소청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목 소저, 다구의 문양은 눈앞에 보이는 지금의 풍경을 보고 그려 넣은 겁니까?”

“예, 맞아요. 변변치 않은 재주라 부끄럽네요.”

“변변치 않다뇨? 세심하게 빚은 다구 위에 연꽃을 정성껏 그려 넣다니, 절로 감탄이 나오는군요.”

“과찬이세요, 소 대인.”

이내 차를 끓이는 목운요의 모습에 소청오는 점차 마음을 뺏겼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모두들 이곳을 찾은 저마다의 이유를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윽한 차 향기가 퍼지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운요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절을 올린 뒤, 각자에게 찻잔을 올렸다.

별생각 없이 찻잔을 받아 든 소청오는 찻잔의 뚜껑을 젖힌 순간, 그 안에 펼쳐진 절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백옥처럼 새하얀 찻잔에 펼쳐진 찻잎이 한 송이 연꽃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잔 속에 피어난 연꽃은 곧 날아가는 새 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두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찻잔만 떠받치고 있었다.

“차는 식기 전에 드시는 것이 좋답니다.”

목운요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입 안을 적시는 향긋한 연꽃 내음에 온몸 가득 만족감이 들었다.

장 순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자신도 지금 제 손에 들려 있는 차가 쉽게 맛볼 수 없는 귀한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 소저, 지금 마시는 차의 이름이 무엇이오? 무척 귀한 것 같은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연꽃향이 퍼지는 게 꼭 입 안에 연꽃을 물고 있는 것 같구려.”

“그리 귀한 차는 아니랍니다, 장 대인. 올해 채취한 찻잎을 잘 말리고 덖은 뒤에, 연잎과 연꽃에 맺힌 이슬을 넣고 끓여 낸 것입니다.”

“소저가 직접 만든 것이란 말이오?”

“네. 제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데 진한 차는 너무 써서……. 그래서 찻잎을 직접 골라 덖은 것입니다. 입맛에 맞으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서 공공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내게 찻잎을 주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 꼭 지켜 주시구려, 목 소저. 서릉에 올라갈 때 꼭 가져갈 테니.”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제가 가진 찻잎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기뻐하는 목운요의 말에 소청오는 왠지 모르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목 소저,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설마 빈손으로 가야 하는 건지요?”

“허허허, 하지만 소 대인은 평소 용정차(龍井茶)를 즐겨 마시지 않소이까? 그러니 이 차는 내게 양보하시구려.”

서 공공의 말이 떨어지기 목운요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 대인께서 용정차를 좋아하신다면 최고급 찻잎을 사 드리겠습니다.”

그에 서운한 기분은 한결 커져만 졌다.

“괜찮습니다. 제가 어찌 소저께 그런 부탁을 하겠습니까? 그저 식구들한테도 귀한 차를 맛보여 주고 싶어서 한 말이랍니다.”

그 말에 목운요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소청오는 제 식구를 누구보다도 위한다. 잠시 집을 비울 때에도 항상 선물을 들고 돌아오곤 했다.

특히 큰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진주, 비단 등 귀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의 목운요를 보며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소청오는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저것이 소저가 말한 불선루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불선루를 쳐다보던 서 공공이 편액이 빠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예, 잘 보셨습니다. 멋진 편액을 걸고 싶은데 좀처럼 마음에 드는 필체를 찾기 어렵네요.”

살짝 한숨을 쉰 목운요가 서 공공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그에게서 반응이 없자, 별생각 없이 한 말처럼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며 빈 찻잔을 채웠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해도 어느 정도 마시면 덤덤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목운요의 차는 어찌 된 영문인지 차를 마실수록 다시 맛보고 싶다는 여운이 들었다.

차를 다 마시자, 목운요가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갔다. 발길 닿는 곳마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경관이 펼쳐졌다. 장장 한 시진에 걸쳐 정원을 둘러봤지만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만 서릉으로 돌아가야겠군.”

“들러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대인.”

“그보다 소저. 차라리 다관을 서릉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소? 그리하면 소저의 차를 매일 맛볼 수 있을 텐데.”

“열심히 노력해서 꼭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목운요가 준비한 찻잎을 받아 든 서 공공의 사람들이 금수원을 나섰다.

마차에 오르려던 서 공공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불선루의 편액에 어울릴 만한 필체를 정 찾지 못하겠거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보게.”

그에 목운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장 순무와 조운년은 슬쩍 웃음을 짓더니, 서립과 소청오를 배웅했다. 목운요의 개업 선물을 더 챙겨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차가 출발하려던 순간, 소청오가 갑자기 차창을 열어젖힌 채 목운요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고개를 든 목운요의 모습이 그의 깊은 눈망울에 들어왔다. 보기 좋게 휘어진 눈매와 입매로 목운요가 공손히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이내 마부의 채찍과 함께 바퀴가 덜컹거리며 구르기 시작했다. 목운요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소청오는 차창을 닫았다.

서립의 입에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모두들 서릉에 천하의 인재가 모였다고 하지만, 경릉성 같은 곳에도 천하에 이름을 날릴 만한 재주를 지닌 인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외모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 또한 비상하다. 서 공공처럼 사람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마저 능히 속여 넘길 수 있다니…….

서 공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목운요가 정말 못 알아들었을까? 소청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손님들을 배웅한 목운요는 온몸의 긴장이 풀렸지만 얼굴의 미소만은 유지했다.

진 총관은 운춘에게 차를 끓이라고 한 뒤 목운요에게 막 따른 차를 건넸다.

“소저, 배웅은 잘하셨나요?”

“예, 덕분에.”

“후후, 잘됐군요.”

“그보다 금 부인 등을 대접할 생각인데, 찬 체질을 지닌 분들이 계셔서 꽃차나 과실 차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순무 부인께서는 단것을 즐겨 드시지 않으니 짭짤한 다과를 준비하는 게 좋겠네요. 헷갈리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할 거예요.”

“예, 그리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진 총관이 나가자, 목운요는 몸에 걸고 있던 향낭을 떼어 금란에게 건넸다.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게 화로에 넣고 태워 버려요.”

“예, 소저.”

금란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은 채 지시대로 향낭을 들고 나갔다.

목운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가볍게 문질렀다.

서립에게 호감을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찻잎과 찻물을 준비한다고 해도 차와 물에 불과할 뿐이다. 상대가 속세의 시름 따위 잊고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도록 하려면 별도의 수단이 필요했다.

들킬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성과를 얻으려면 기꺼이 감수할 만한 일이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돌아간다면 훗날 서릉에서 목표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만한 인연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 *

한 시진 정도 지나자, 금 부인이 순무 부인을 모시고 금수원을 찾았다.

두 부인을 비롯해 여러 부인들이 왔다는 이야기에 목운요가 사람들을 이끌고 맞이하러 나갔다.

흰옷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인사를 올리자, 깜짝 놀란 부인들이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목운요를 대하는 순무 부인의 태도는 한결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운요는 경릉성 여인들에게는 큰 은인이었다. 성상께서도 상을 내리셨으니 친분을 쌓아 두어 나쁠 게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독한 관계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른 부인들 역시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예전 같으면 목운요가 자신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목운요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신세가 됐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찾아온 부인들이 여럿인 터라 목운요가 일일이 차를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순무 부인과 금 부인만 특별히 대접했다간 다른 부인들의 질투를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를 생각해 낸 목운요는 부인들을 데리고 소상죽원(瀟湘竹苑)으로 향했다. 부인들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그녀가 위일과 운춘 등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일렀다.

목운요가 부인들 앞에 나서 가볍게 절을 올린 뒤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불선루만의 다도를 부인들에게 선보이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인사를 마친 그녀가 물러서자, 오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인사를 받은 적은 없었기에 부인들은 괜스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오십여 명의 이들이 차를 끓이기 시작하자, 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신선처럼 한없이 여유롭고 기품이 흘렀다.

이들의 손길 아래에서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차를 끓이는 동안 부인들은 눈앞의 풍경에 넋이 나간 눈치였다.

사람들이 차를 올린 뒤 공손히 물러나자, 금 부인이 자신도 모르게 자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앞으로 여기 말고 다른 다관은 가지 않으련다.”

이 정도 규모와 볼거리라면 다른 다관 따윈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게요.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기분이라 흐뭇하네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부인들이 앞다투어 칭찬을 늘어놓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부인들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든든하네요.”

목운요의 겸손한 대답에 부인들이 기특한 미소를 지었다. 장사가 안되면 직접 손님들을 데리고 오겠다는 미담까지 오가며, 소상죽원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덕담을 주고받고 난 뒤 부인들이 저마다 찻잔을 들고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차를 좋아하지 않는 부인들도 있었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차를 마시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목운요가 특별히 과실 차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목운요가 그리 길지 않은 기간 안에 경릉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섬세한 마음 씀씀이 덕분이리라.

한바탕 칭찬이 쏟아지고 난 뒤.

목운요는 부인들에게 잘 말려 둔 장미꽃 봉오리를 챙겨 줬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부인들의 입가에선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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