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성상에게 올리는 답례
* * *
목운요가 사뿐히 걸어 들어와 공손히 절을 올렸다.
“대인들을 뵙습니다.”
장 순무 옆에 앉아 보고를 듣던 소청오는 자신도 모르고 찻잔을 쥔 손을 멈칫했다.
며칠 동안 쉬었던 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초췌했던 모습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색은 창백했고 얼굴도 야위어, 가뜩이나 크고 촉촉했던 눈망울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소청오는 목운요에게서 애써 시선을 거뒀지만, 아직도 그날 밤 자신의 팔 안에서 느껴지던 보드라운 감촉이 생생했다.
“소 대인?”
장 순무가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서릉에서 내려온 소식이라면 당연히 소 대인이 설명해야 옳기 때문이다.
소청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성상께서 지난번에 상을 이미 내리셨던 터라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소저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는 뜻이 내려왔습니다.”
목운요는 소청오 옆에 있는 중년의 사내를 살펴봤다. 단조로운 옷을 걸쳤지만 얼굴에 수염이 하나도 없는 데다, 음흉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척 봐도 내시가 분명했다. 경릉성에 성지를 전하러 내려온 것일 터.
상황을 파악한 목운요가 서릉 쪽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린 뒤에 소청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소 대인, 성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녀, 어머니를 모시고 경릉성에 처음 왔을 때 금 부인과 이곳 사람들의 보살핌 덕분에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중에 경릉성에 보탬이 되고자 그나마 할 줄 아는 자수법을 전수하기로 한 것뿐인데, 너무 과한 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실눈을 뜬 채 옆에 서 있는 서 공공(徐公公)을 곁눈질하면서, 소청오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제게는 돈 때문에 자수법을 전수하게 됐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경릉성에 보답하고 싶었다라……. 나이도 어린데 사람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군!
“목 소저와 같은 마음 씀씀이는 보기 드물게 귀하답니다. 하나 성상께서 상을 내리겠다고 약조하셨으니 편히 말씀해 보십시오.”
그 말에 목운요는 감격했다는 눈빛을 하더니 서릉 쪽을 향해 다시금 절을 올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녀 한 가지 바람이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목운요의 모습에 서 공공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바람이 무엇인지 편히 말해 보구려.”
보는 사람이 저절로 유쾌한 기분이 들 정도로 어린 소저의 두 눈은 기대감과 두근거림으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성상을 모시고 싶다는 이야기라도 꺼내고 싶어 저리 뜸을 들이나 싶던 서 공공은 호기심을 가지고 눈앞의 소저를 쳐다봤다.
머뭇거리던 목운요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황상의 묵보를 상으로 받고 싶습니다.”
그 말에 서 공공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가 잽싸게 평정을 되찾았다.
궁에서 살려면 느는 것이라고는 눈치밖에 없다. 제 눈앞에 있는 소저는 순진한 눈망울을 갖고 있었지만, 방금 전의 말은 무턱대고 꺼낸 이야기가 결코 아닐 것이다.
목운요에 관심을 보이는 서 공공을 소청오가 자세히 살폈다.
서 공공의 본명은 서립(徐笠)으로, 내시총관(內侍總管)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평소 실수 없는 일 처리 솜씨로 성상께서 총애하는 자라고 들었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접근했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아 다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한숨을 푹푹 쉬곤 했다.
그런 서 공공이 목운요를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하다니…….
서 공공은 목운요의 청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성상의 묵보가 갖고 싶다는 겐가?”
“예. 성상께서는 지엄하신 만인지상의 군자이자 진룡(眞龍)의 화신이시니, 그 묵보에도 진룡의 기운이 깃들어 있을 겁니다. 그거라면 저 같은 여인도 천복을 누리며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막만 한 얼굴로 생글거리는 목운요의 모습에 서 공공은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력 많은 노련한 관리도 이 아이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성상의 환심을 산다는 점은 다를 것 없지만, 진심이라고 생각될 만큼 간절함이 뚝뚝 묻어났다.
“소저의 바람이 그렇다면 그 말 그대로 성상께 말씀드리겠네.”
“감사합니다, 대인.”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는 눈앞의 사내를 잘만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목운요는 한 가지 청을 올렸다.
“대인, 마침 내일 저의 다관이 개업하는 날이랍니다. 제가 직접 덖은 찻잎이 있는데, 이것을 성상께 올려도 될까요? 보잘것없는 선물이지만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어 준비한 것이니 꼭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서 공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상이 내리는 상을 받는 사람은 수두룩하게 봐 왔지만, 답례하고 싶다는 이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목운요는 눈을 내리깐 채 불안한 듯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소인이 가장 잘하는 게 자수인데, 지금은 손을 다쳐서 성상께 병풍을 만들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 둔 찻잎으로나마 제 마음을 전해 드리고 싶어서…….”
“솔직히 말해서 성상께서 드시는 음식은 복잡한 심사를 거쳐야 하는지라, 아쉽지만 궁에는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듯하구려.”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던 목운요가 이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대인께 드려도 될까요? 대인께서 서릉에 가져가서 드셔 주세요. 그렇게라도 하면 서릉에 제 마음이 전해질까 싶어서요.”
“후후, 마침 나도 차를 좋아하니 소저가 직접 덖은 차를 마시게 되어 기쁘구려.”
소저의 그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귀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내일 소녀의 다관이 문을 여는데, 열심히 장사해서 불선루(不羨樓)의 이름을 전국에 알릴 거랍니다. 서릉에도 가게를 차리게 되면 성상을 향해 감사의 절을 올리겠습니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소청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불선루? 다관의 이름이 불선루인 겁니까? 그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된 거죠?”
“다관이 들어설 정원 안에 육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류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다성(茶聖)께서 이르시기를, ‘황금으로 된 술병이 부럽지 않고, 백옥으로 된 술잔이 부럽지 않네. 아침에 문안받는 것이 부럽지 않고, 저녁에 누대에 오르는 것이 부럽지 않네. 천 번, 만 번 부러운 것은 서강의 물이니, 이미 경릉성 아래로 흘러왔구나.(不羨黃金罍, 不羨白玉杯. 不羨朝入省, 不羨暮入台. 千羨萬羨西江水, 曾向竟凌城下來.)’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래서 불선루라는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안에서 차를 공짜로 맛볼 수 있도록 준비할 생각이랍니다.”
목운요의 설명에 서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구미가 당겼다.
어린 소저가 귀한 차를 구비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목운요가 들려준 불선루의 취지가 마음에 들어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선루라……. 좋은 이름이구려. 내일 다관이 개장이라고 하니 한번 가 봐도 되겠소?”
“대인께서 와 주신다면 불선루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죠. 소인이 직접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후후, 그럼 그렇게 합시다.”
“예, 내일 오전 사시(巳时, 오전 9시에서 11시)에 꼭 들러 주세요!”
* * *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온 목운요가 금 부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부인, 잘 말씀드렸어요. 부인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저리도 기뻐하는 걸 보니 일이 순조롭게 풀린 것 같아 금 부인도 덩달아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잘되었으면 좋겠구나.”
목운요의 하운방이 성상의 묵보를 받게 된다면 그 누구도 하운방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사시에 다관을 열 생각이니 부인께서도 꼭 참석해 주세요.”
“드디어 문을 여는구나. 당연히 가서 축하해 줘야지. 드디어 네가 끓여 주는 차를 맛보게 되는구나. 하지만 네 손이…….”
“괜찮아요. 이제 딱지도 많이 사라졌는걸요.”
천지신명께서 지금처럼만 보우해 주신다면 손목 하나 잘려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럼 다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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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원으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목운요의 모습에 진 총관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잔뜩 긴장했다.
이내 목운요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된 진 총관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 서 공공이라는 분이 여기에 차를 마시러 오고 싶다고 하셨단 겁니까?”
“예, 얼굴이 희고 수염은 없으신 분인데, 목소리가 좀 가느신 편이었어요. 뭐랄까, 분위기가 좀 특이했는데 서릉에서 오신 내시 대인 같더라고요.”
진 총관은 월왕의 사람인지라, 그의 정체를 서 공공이 알아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불편하면 일찌감치 피해도 된다는 뜻을 넌지시 전하려 일부러 이야기를 꺼낸 거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진 총관이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봤다.
“소저, 시기를 참으로 잘 고르셨습니다. 운이 따르면 불선루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리지 않는 진 총관에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서 엿보였다.
하긴, 누구한테나 그 정체를 들킨다면야 더 이상 경릉성에서 활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내일 손님이 많다면, 오십 명으로는 제대로 된 차를 대접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왕야에게 인재를 더 뽑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목 소저가 말하는 다도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
진 총관의 말에 목운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