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65화 (65/442)

65화 돌아온 사람들

“어서 들라고 하세요.”

기쁜 듯 외치는 목운요의 모습에 진 총관 역시 지난 보름 동안 이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육냥을 선두로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목운요에게 절을 올린 뒤 그녀의 앞에 조용히 섰다. 모두들 얼핏 봤을 때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목운요의 눈빛에 만족스러움이 담겼다.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 차를 내오세요.”

“예, 소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자리를 잡고선, 목운요와 진 총관에게 예의 바르게 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진 총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똑같은 이들이건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예전에는 아무리 환하게 웃어도 차갑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던 반면, 지금은 한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작하죠.”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두들 침착하게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윽한 향이 퍼지고 달그락 소리가 나던 것도 잠시, 차를 내놓은 이들이 잽싸게 두 손을 모은 채로 탁자 뒤로 물러섰다.

아직도 부족하긴 하지만, 목운요의 분위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따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딱딱 맞춰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저?”

평가가 궁금한 듯 다들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진 총관의 물음에 목운요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어요.”

“틀리다뇨?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다관을 찾는 손님들 중에서 차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열에 두 명도 안 될 겁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손님은 인맥을 쌓거나 체면치레를 위해 다관을 찾는 것뿐이죠. 우리만의 방식이나 분위기를 살리지 못한다면 다른 곳과 뭐가 다르겠어요?”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직접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소 창백한 표정에 평범한 옷을 걸쳤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시선이 쏠렸다. 분명히 똑같이 차를 끓여 내는 것인데도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은 자연스럽고 수려했다.

“그저 돈을 벌려고 다관을 차리는 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 스스로 깨달아야 해요. 확실히 예전보다 자세나 분위기가 좋아지긴 했지만, 이곳은 속세의 시름을 씻는 다관이에요. 손에 들고 있는 차가 주인공이니, 여러분 스스로 차에 녹아들어야 해요.”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윽한 차 향기와 함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마음이 편안한 와중에도 목운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맴돌았다.

목운요는 진 총관에게 차를 내주며 동작을 갈무리했다.

“손님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일부러 낮추거나 아양을 떨 필요는 없어요. 상대가 스스로 경계심을 풀고 여러분을 지기(知己)로 여겨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여러분 스스로 알아내야 해요.”

말로 가르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목운요 역시 정확한 답변을 들려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길이 든 것 같으니 부지런히 연습하는 수밖에.

목운요의 이야기에 위일과 운춘을 비롯한 이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런 그들을 목운요 역시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부지런히 연습하라고 당부한 뒤, 진 총관을 따라 앞뜰로 향했다.

“진회로 보냈던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 말고, 사실 진 총관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답니다.”

“무슨 일입니까?”

“다관을 조만간 열어야 할 것 같아서요.”

“후후,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으신가요?”

“아직이요. 며칠 고민해 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진 총관님께서는 다도 훈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저의 솜씨를 몇 번 본 터라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 좀 더 그럴듯하게 시중을 들 수 있도록 가르쳐 보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진 총관님만 믿을게요.”

“별말씀을요.”

* * *

월왕의 관저에 목운요가 보낸 서신이 두 통이나 도착했다.

서신을 읽는 월왕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변했다. 특히 하운방에서 일어난 일을 적은 서신을 쥐어 든 월왕의 손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시위 우항이 서신과 함께 전달된 상자를 가져왔다.

“주인님, 이것도 목 소저께서 보낸 거라 합니다.”

상자를 열어 본 월왕의 미간이 슬쩍 풀어졌다. 안에 든 것은 이만 냥이나 되는 은표였다.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척박한 월서의 땅에서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부황 때문에 호부(戶部)에서는 월서에 충분한 국고를 내주지 않았다. 군비(軍費)마저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곤란하던 참이었다.

위풍당당한 황자(皇子)가 관료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과연 몇이나 그 말을 믿어 줄까.

월왕의 눈에 자조 섞인 빛이 돌았다.

“우항, 제 것도 제대로 못 지킨다면 왕야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전언이다. 목운요가 경릉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우라고 해라. 하운방은 본 왕이 지킨다!”

“예, 주인님!”

훅 하고 밀려든 한기에 우항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 *

한편 자신의 서신으로 월왕이 각오를 다지게 될 거라고 목운요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관의 이름을 고민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소청이 제비집으로 끓인 죽을 가져올 때까지 목운요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쯧쯧, 좀 쉬엄쉬엄하렴. 머리 좀 식히다 보면 좋은 생각이 날지도 모르잖니.”

목운요가 소청 곁에 바짝 붙어선 코를 벌름거렸다.

“킁킁, 제비집으로 쑨 죽이에요? 역시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게 최고예요.”

“개코가 따로 없구나, 후후. 네 덕분에 이 나이에 시집살이라니……. 입맛이 없어도 정성껏 끓인 것이니 먹어 보렴.”

“역시 절 가장 예뻐해 주시는 건 어머니뿐이에요. 어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목운요가 소청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

이내 딸아이가 죽을 다 먹는 것을 확인한 소청이 빨리 잠자리에 들라며 재촉했다.

“다관 이름에 대해선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정 생각나지 않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

“네, 그럼 어머니만 믿고 잘게요.”

딸아이가 자리에 눕자 소청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얼마 뒤, 목운요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책을 들곤 창가로 향했다.

육냥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창밖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책장을 넘기던 목운요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육냥과 눈을 마주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육냥, 날 놀라게 해서 죽일 셈이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낭패한 표정의 육냥을 향해 목운요는 가슴을 팡팡 쳐 댔다.

“다행히 간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네. 그나저나 진회 쪽 상황은 문제없었고?”

“예.”

육냥의 시선이 흰 붕대가 둘러진 목운요의 손에 머물렀다.

“다치신 겁니까?”

“별거 아냐. 그냥 좀 긁힌 거야. 거의 다 나았어.”

목운요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육냥은 그런 목운요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할 때면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난처한 마음에 경공술을 써서 재빨리 정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목운요는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공을 할 줄 알면 정말 편할 것 같다. 육냥한테 호신술이라도 조금 가르쳐 달라고 해 볼까? 그러면 적어도 위험할 때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테니.

그건 그렇고, 보름 정도 못 본 사이에 육냥이 말이 는 것 같은데…….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성상께서 서신을 내려보내셨다는 이야기에 금 부인이 목운요를 불렀다.

“상처는 괜찮은 거니?”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이젠 거의 다 나았어요. 저보단 부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신데, 근래 많이 바쁘셨나 봐요. 회임하셨으니 항상 조심하시는 게 좋아요.”

자신도 아픈데 제 안부를 챙기는 것을 보니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그동안 목운요를 위해 열심히 발품을 팔았던 게 보람차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근 들어서 입덧이 심해 그런가 보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보다 성상께서 경릉성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는 진노하셔서 경릉 동지와 선무사를 서릉으로 압송해 죄를 물으신다고 하더구나. 또한 네게 상을 내리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보렴.”

목운요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갖고 싶은 거요?”

“후후, 그렇단다.”

그에 목운요는 마음속으로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이 날 돕고 계시구나!

“부인, 저 생각났어요.”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

성상께서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조하시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성상의 화를 사서 뼈도 못 추릴 터. 그리 생각이 드니 목운요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내심 걱정이 앞섰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떡거렸다.

“사실 예전부터 갖고 싶은 게 있었는데, 저한테는 사치라고 생각했거든요. 오늘 그 꿈을 이룰 기회가 온 것 같아요.”

철부지 아이처럼 장난을 치는 건 아닌지 애가 닳은 금 부인이 일단 말해 보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면 바로잡아 주면 될 것이다.

“성상에게 하운방이라고 적힌 묵보(墨寶, 보배가 될 법한 좋은 글씨)를 받고 싶어요. 침방을 다시 열면 편액으로 걸게요. 그리하면 누구도 하운방에 손대지 못할 거예요!”

“네가 혹 엉뚱한 말을 꺼낼까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나보다 한 수 위로구나.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소 대인께서 널 만나러 오실 테니 그때 말씀드리도록 하렴.”

그리고 그때였다.

“부인, 나리께서 목 소저를 대청으로 모시고 오라 하십니다.”

“알았다.”

은홍의 말에 금 부인은 목운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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