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경고
* * *
이튿날 이른 아침, 금란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저, 정 총관님께서 떠나셨어요.”
머리를 빗던 목운요는 멈칫하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내려가서 먼저 식사하세요.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까요.”
“……예, 소저.”
정 총관이 떠났다는 소식에 하운방 사람들은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하지만 침체되었던 분위기도 잠시, 금교가 밖에서 이런저런 소식을 듣고 와서 이야기를 펼쳐 들었다.
“오늘 노부인이 장 순무한테 그간의 일을 다 실토했답니다. 정 대인은 예전부터 부모 잃은 고아 소녀를 데려다가 팔아넘기고 이윤을 취했는데, 사람들은 정 대인이 포주(男鸨)라는 것도 모르고 불쌍한 소녀들을 맡기고는…… 켁켁…….”
말하는 도중에 사레가 걸렸는지 금교가 할딱거리자, 금란이 물을 따라 줬다.
“그러고는?”
“하아, 고마워.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 그러다 정 대인이 큰딸인 정열금(丁悅錦)을 열네 살 나이에 당시 칠품관 지현(官縣)인 유(劉) 대인과 혼례를 올리게 했고, 이 일로 재미를 보자 정열심과 정열람을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 거죠. 원래 정열심은 경릉 동지와 짝을 맺어 줄 생각이었는데, 당시에 동지 대인이 관직을 받지 못하자, 정 대인께서 정열심을 선무사 대인과 연결시켜 줬대요. 그 와중에 경릉 동지 대인이 승진하면서 일이 꼬이게 된 거죠. 결국 정열심은 경릉 동지에게 시집을 갔지만요.”
금교는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 내더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런 뒤에는?”
“그런 뒤에는, 정열심과 선무사 대인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선무사 대인이 그녀의 동생인 정열람과 혼례를 올리기로 했답니다. 그러다 정열심과 선무사 대인이 정을 나누는 걸 정 총관님이 목격하면서 이 사달이 난 거래요.”
“경릉 동지 부인과 선무사 대인이? 그렇게 은밀한 일이 어떻게 밖으로 알려진 거지?”
소청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정씨 가문의 하인들이 퍼트리고 다니고 있어요. 이번 사건이 터지고 정씨 가문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죄다 쫓겨났거든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정씨 가문의 막내딸인 정열녕(丁悅寧)은 선위사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는데, 이번 일로 파투가 났답니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그나저나 정 총관에 관한 소식은 못 들었니?”
“누가 정씨 가문으로 돌아간 정 총관님을 봤다고 합니다. 정 대인이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데, 그 때문이 아닐지…….”
장부를 넘기던 목운요의 손이 멈칫했다. 역시나 정열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마음도 잠시, 하운방에 손님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은홍이었다.
“은홍 언니,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하운방에 와 주지 않아서 걱정했다고요. 잘 지내셨어요?”
“목 소저를 뵙습니다. 그동안 부인께서 바쁘신 데다 저도 시간을 낼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 그보다 소저를 불러오라는 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저도 마침 부인께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지금 가면 되겠네요.”
“예, 마차가 문 앞에 대기 중이니 어서 가시죠.”
* * *
오랜만에 조부를 찾은 목운요는 인사를 올렸다.
“부인을 뵙습니다.”
“어서 오너라. 바쁜 사람 오라고 해서 곤란한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바쁜 건 제가 아니라 부인이시죠. 저야 남는 게 시간이랍니다.”
“후후후, 하여간 여전하구나. 차라도 한잔 마시렴.”
차를 가져온 은홍을 물린 뒤, 금 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운요야, 오늘 널 오라고 한 건 너와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란다. 연말이 되면 성상께 세의(歲儀, 한 해를 보내는 연말에 선사하는 물건)를 올려야 하는데, 네 의견이 듣고 싶어 불렀다.”
“제 의견이라뇨? 세의에 대해 제가 뭘 알겠어요. 작은 침방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걸요.”
“어찌 그리 말하는 게야? 총명한 데다 세심한 너라면 분명 좋은 생각이 있을 텐데. 그리고 이번 기회를 빌려 너도 얼굴을 내비치는 게 좋지 않겠니? 혹시 알아? 성상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셔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큰 상을 내리실지.”
“아뇨, 부인. 제게 그런 일은 어울리지 않아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다. 자신의 목적은 이미 이뤘으니 격랑에 몸을 던질 이유는 없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목운요는 작은 미소를 띤 채 작게 절을 올렸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다. 아무래도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번 일로 정 대인과 노부인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정열심은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는 처지가 된 건 알고 있지? 이번 사건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순무 대인께서 성상께 보고드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뒤에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성상의 뜻이 담긴 황명이 내려온다고 하니, 그때까지 너도 몸을 사리는 편이 좋을 거다.”
금 부인의 말에 목운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신 겁니까, 부인?”
“그런 건 아니다만, 경릉 동지가 정열심을 내치지 않고 여전히 총애한다고 하더구나. 이 일로 꽤나 마음이 상한 듯해.”
그 말에 목운요는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경릉 동지로선, 이 일로 벼슬길에 지장을 받는다면 결코 곱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목운요가 자신의 뜻을 이해한 듯하자, 금 부인은 내심 마음이 놓였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하운방은 내가 지켜 줄 것이고, 조 대인께서도 단단히 지켜보고 계시니까. 다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너와 네 어머니 모두 조심해서 나쁠 게 없겠지.”
“감사합니다, 부인. 부인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에 금 부인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 * *
하운방으로 돌아온 목운요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본 소청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덜컥 겁부터 났다.
“요아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어머니, 오늘 금 부인께서 절 부르시더니 정씨 가문 쪽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목운요는 어머니가 좀 더 경계를 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말했다.
“정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숨겨 왔던 일을 파헤치는 바람에 그쪽 사람들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지. 설마 그래서 우리한테 앙심을 품었다는 거니? 아아, 이를 어쩌면 좋담? 혹 도망이라도 쳐야 한다든가…….”
놀란 소청의 손목을 목운요가 가만히 움켜쥐었다.
“경릉성을 떠나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금 부인께서 저희를 지켜 주시겠다고 약조하셨거든요. 다만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있을 테니, 그럴 때는 저희가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외출하실 때도 꼭 육냥을 데리고 가세요.”
“알겠다. 나야 거의 외출하지 않지만, 넌 금수원에 종종 가곤 하니 너야말로 조심하렴. 경호할 사람을 더 붙이는 건 어떻겠니? 육냥 혼자서는 다 챙길 수 없을 텐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제가 이따가 육냥한테 사람을 알아보라고 말해 놓을게요. 적당한 사람을 구해다가 호위를 맡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상의할 일이 있어요. 원래는 정 총관님께 귀부인들의 접대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그만두셔서……. 그래서 어머니께서 하운방을 맡아 주셨으면 해요.”
“아, 아냐……. 내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어머니, 지금의 하운방은 예전의 하운방이 아니에요. 누구도 함부로 하운방에서 소란을 피우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소씨 가문에서 저희를 찾아내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높은 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몰라요.”
입술을 깨문 소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선 물러설 순 없었다.
당초 정열람을 통해서 어머니가 서서히 바뀌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열람을 대신할 마땅한 인물이 보이지 않으니 어머니 혼자서 일어날 수 있게 등 떠미는 수밖엔 없었다.
소씨 가문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잔혹한 자들이다. 어머니가 강해지지 않는다면 그저 당하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어머니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아야, 어미가 용기를 내 보마.”
이 한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소청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원체 겁이 많았다. 하언촌에서도 시어머니가 아이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다면 결코 반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제안을 수락한 것은 그저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모성 때문이었다. 절대로 아이의 발목을 잡는 어미가 되고 싶진 않았다.
목운요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그 결정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녀는 어머니의 품에 폭 안겨 들었다.
* * *
이튿날, 목운요는 금수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다도를 가르쳤다. 진 총관이 넌지시 언질을 준 것인지, 위일과 운춘 등은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극히 공손한 자세를 취해 왔다.
정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진 총관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진 총관님께서 매번 이리 반갑게 맞아 주시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어이쿠,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사야께서 소저의 지시를 따르라고 당부하셨는걸요. 소저께 저희들이 필요 없을까 봐 오히려 걱정이랍니다, 허허.”
월왕의 정체를 몰랐다면 진 총관이 주인에게 꽤나 신뢰를 받고 있는 시종이라고 여기는 게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 총관은 월왕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측근이었다.
그런 진 총관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솔직히 말해서 적응이 되지 않았다.
목운요는 위일, 운춘 등을 찾지 않고 진 총관에게 볼일이 있다는 뜻을 밝혔다.
“진 총관님, 사실 오늘은 총관님께 도움을 청하러 온 거예요.”
“무슨 일인지 분부만 하십시오.”
“시녀 몇 명을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급적이면 무예를 갖춘 사람들로요.”
“무예를 할 줄 아는 시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