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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56화 (56/442)

56화 물러설 수 없는 싸움

머지않아 정 대인과 노부인을 향한 사람들의 눈빛이 맹렬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들의 이중적인 작태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그에 목운요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정씨 가문의 일을 만천하에 떠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열람이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선을 제압한 금 부인의 맹공은 계속 이어졌다.

“모두 살펴봐 주게. 정 부인이 울화병을 앓고 있는지 말이야.”

그러자 몇몇 의원들이 조심스레 정열람을 살펴봤다.

“눈빛이 이리 맑은데 어찌 울화병이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얼마 전에 소인이 정 부인을 진찰한 적이 있었는데, 몸이 약한 허하긴 했어도 울화병 같은 건 없었습니다.”

정 대인과 노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아, 끝장이로구나. 정씨 가문은 오늘로서 끝장이로구나!

금 부인은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거두더니,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 소저가 전수하려는 자수법은 오래전에 사라진 비침화수법으로, 소주성의 온씨(溫氏) 가문의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비기’이다. 그 귀한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는가?”

“비침화수법?!”

“비침화수법으로 만들어진 옷은 황실에 진상되었다던데……!”

그 비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모두의 눈길이 목운요에게 쏠렸다.

“비침화수법을 익힌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에 경릉성의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네. 그리되면 경릉성의 여인들은 어디로 시집을 가든 복덩이 대우를 받으며 떵떵거리고 살아갈 수 있겠지. 자네들은 저들의 헛소리를 믿고 절호의 기회를 버릴 셈인가?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을 테니 잘 생각해 보게!”

금 부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여인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달려 나왔다.

“금 부인, 부인께서 목 소저와 하운방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세요!”

“여러분, 이걸 봐 주세요. 하운방에서 며칠 동안 배워 만든 것입니다. 저희는 목 소저한테서 귀한 비기를 배우고 있는데, 대체 누가 그걸 요망한 짓이라고 한답니까? 대체 누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저희들의 명예를 더럽히려는 겁니까?”

“금 부인, 저희의 억울한 누명도 벗겨 주세요!”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는 여인들의 부탁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힘을 보탰다. 정씨 가문의 악행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크게 분노한 것이다.

“옳습니다! 금 부인께서 이번 일을 끝까지 밝혀 주십시오.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그 죗값을 치러야죠!”

민심이 돌아서자, 정 대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의 아내를 홱 밀쳐 냈다.

“모, 모두 이년이 한 말입니다! 하운방과 목 소저에게는 지금 당장 사죄하겠습니다. 금 부인, 제가 순간 정신이 나가서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 떠밀린 노부인은 자신이 희생양이 됐다는 생각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리, 제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게 모두 네년이 중간에서 이간질했기 때문이다! 네 말만 믿고 하운방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서 목 소저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거라!”

금 부인이 목운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찌하겠느냐는 금 부인의 뜻을 목운요가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놀란 뱀을 풀어 주면 언제든 자신을 물 수 있다. 정씨 가문이나 주고에 비하면 하운방은 여전히 약자다. 이들이 손을 잡고 자신을 은밀히 노린다면, 그때는 금 부인도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는 비록 일개 평민이지만 명예를 하늘보다 중하게 여기거든요.”

목운요는 금 부인 앞으로 걸어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절을 올렸다.

“부인께서 소녀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세요. 이번 사건을 낱낱이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목 소저, 내가 사과하지 않았나! 명예를 떨어뜨린 것에 대한 보상으로 만 냥을 주겠네!”

다급한 표정의 정 대인을 목운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금 부인, 소녀의 결백을 밝혀 주세요.”

그런 목운요를 쳐다보는 금 부인의 눈빛이 점점 밝게 타올랐다. 금 부인은 목운요가 언젠가는 크게 날아오를 거라고 확신했다.

“알았다. 순무 대인에게 이번 사건을 맡아 달라고 조 대인에게 말씀드려 보마.”

“부, 부인……!”

정 대인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더니 이내 풀썩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리!”

노부인이 정 대인을 부축하며 왕 의원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했다.

“의원님, 제발 나리를 구해 주십시오!”

왕 의원의 스승은 정 대인의 상태를 살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풍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까 기절한 뒤에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 또 쓰러졌으니…… 화타(華佗)가 와도 고치지 못할 것이오.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잘 돌봐 드리십시오. 정성껏 돌보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리!”

노부인이 서러운 울음을 토해 냈지만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죗값을 치른 거라며 쾌재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 * *

기세 좋게 나타났던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경릉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정씨 가문의 네 딸 모두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목운요를 입을 모아 칭찬했다.

이 일이 있은 후, 하운방에는 자수법을 배우고 싶다는 여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목운요는 이들을 전부 받아들였다. 목운요한테서 직접 기술을 전수받은 이들의 몸값은 순식간에 몇 곱절씩 뛸 정도였다.

한편 속으로 애만 태우며 조운년을 부러워하는 게 다였던 장 순무는 정씨 가문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그는 정씨 가문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받아 든 장 순무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생각했는데, 캐면 캘수록 정씨 가문의 악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 것이다.

* * *

목운요가 조용히 정열람의 방문을 두드렸다.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정열람과 따로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이 또한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곧 방 안에서 정열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간 목운요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 제가 여기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부인께 사과드리고 싶어서랍니다. 하운방을 지키기 위해 부인의 기분도 생각하지 않고 이런 일을 저질러서 죄송해요.”

살포시 눈을 내리깐 정열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부인의 허락을 구해서 위해서랍니다. 이걸 봐 주시겠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운요가 탁자에 책자를 올려놓았다.

정열람이 책자를 펴자, 자신을 주제로 만들어진 미인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림 속 여인은 화려한 색상의 치마를 걸치고 있었는데, 유약하기만 한 다른 여인들과 달리 말을 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생기 가득한 눈빛, 찬란한 미소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게 나인가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이런 얼굴이 아니랍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부인께선 아직 젊으시고 미모 또한 빼어나신걸요.”

목운요는 입술을 슬쩍 깨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절 원망하시겠죠? 맞는 말이에요. 제가 부덕한 탓에…….”

미리 제작했던 책자를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내 보인 건, 정열람이 우울했던 과거를 모두 잊고 환하게 웃으며 살아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열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정씨 가문의 일은 더 이상 나와는 무관해요. 아가씨는 사실을 밝힌 것뿐이죠.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은걸요. 안 그랬다면 언제까지 속고만 살았어야 했을지…….”

목운요가 쓴웃음을 지으며 차마 상대가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부인의 한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테죠.”

정열람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며칠 뒤에 이곳을 떠날 생각이에요…….”

“그러지 마세요, 부인. 원하는 만큼 이곳에 머무셔도 됩니다. 이리 나가시면 제 마음이 편치 못할 거예요.”

목운요의 눈빛에 짙은 슬픔이 묻어났다.

자신의 만류에도 정열람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본인 스스로 납득하지 않는 한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정열람의 그런 성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목운요는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 책자는 제가 부인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실 때 돌아오세요. 부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말을 마친 목운요가 오백 냥을 꺼냈다.

“여인 혼자 밖에 있다 보면 위험할 때가 많죠. 그동안 하운방의 총관으로 일해 주신 품삯이에요.”

그제야 정열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뇨, 이건 너무 많아요.”

“가져가세요, 부인. 이 돈을 종잣돈 삼아 자리 잡고 난 뒤에 갚으시면 돼요. 그동안 저와의 정을 생각해서 더 이상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정씨 가문이 흔들리게 된 게 목운요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열람은 요 며칠 좀처럼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다.

한데 그런 자신을 이해한다며 돈까지 챙겨 주는 목운요의 모습에, 정열람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목운요가 떠나자 정열람은 탁자 위에 놓인 은표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온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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