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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55화 (55/442)

55화 진실 혹은 거짓

왕 의원의 말이 떨어지자, 사방이 떠들썩하게 변했다.

“왕 의원의 말이라면 틀림없지!”

“맞아. 왕 의원께서는 의술도 뛰어나시고, 무엇보다도 명성 자자한 일선당의 주인이시잖아. 그렇다는 건 목운요가 노부인을 모함했다는 건데?”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자신 쪽으로 기울자, 정 대인은 몰래 한숨을 돌렸다. 미리 대비해 두기를 잘한 것 같았다.

“훗, 앞으로 일선당에는 무서워서 못 가겠네요.”

목운요의 비웃음에 왕 의원이 매섭게 그녀를 째려봤다.

“아직 어린 것 같아 일일이 따질 생각은 없다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거라. 그리하면 널 용서해 달라고 두 분을 설득해 줄 테니.”

“훗, 그럼 왕 의원님. 정 부인께서 정말 울화병이 있는지 진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 예전에 이미 진찰한 적 있다. 장담하건대 분명 울화병을 앓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 그 증세가 특이해 시도 때도 없이 발작하더구나. 발작하지 않을 때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것 없지만, 한번 발작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판단할 수 없어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실 이 병에 대해서는 주 대인께서도 알고 계셨지만, 항상 정 부인의 뜻을 따라 주셨다. 보통 정성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하긴 어렵지.”

왕 의원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정 부인께서 남장을 즐기신 것도 병 때문이었던 건가?”

“주 대인께서 아내를 진심으로 아끼시나 보군. 울화병을 앓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혼을 취하하려 하다니……. 보통 사람 같았어 봐. 당장 이혼하고 내뺐을걸!”

그 모습에 목운요가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정 부인의 병은 하운방에 왔다 간 뒤에 생겼다고 노부인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요? 어찌 왕 의원님의 입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내 비록 정씨 가문과 친분이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양심에 거스르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 부인께선 오래전부터 병을 앓아 왔지만 줄곧 호전되고 있었지. 하지만 하운방에 갔다 온 뒤로 이혼하겠다고 소란을 피우신 걸 보면, 아무래도 무언가로부터 자극을 받은 게 분명하다.”

왕 의원의 말은 요란하기만 했던 노부인보다 효과적이었다. 그의 말에 하운방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왕 의원님의 그 양심이라는 것도 어느새 흑심으로 변한 것 같네요. 제 비록 일개 평민이지만, 목숨보다도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답니다. 근거도 없는 헛된 말로 절 모함하셨으니 어떻게 해서든 시시비비를 분명히 밝힐 겁니다! 경릉성에 의원님보다 의술도, 인품도 뛰어난 의원이 있다는 걸 아셨어야죠!”

그리고 그때였다.

“왕인(王仁), 네게 의원이라는 호칭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구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경릉성에서 제일…….”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에 왕 의원은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봤다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스, 스승님?! 스승님이 어, 어찌…….”

왕 의원의 스승?

백발성성한 노인이 약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오더니, 왕 의원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나를 따라 의술을 배운 지도 한참이거늘, 설마 예전에 배운 것들을 모두 버렸단 말이냐?”

“스승님……. 시, 실은…….”

왕 의원은 거의 애걸하는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노인은 쯧쯧 혀를 차더니, 이내 옆에 있는 노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부가 보기엔 여기 계신 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소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엉뚱한 소리 하지 마라! 안사람은 꽃처럼 귀한 딸을 넷이나 낳았는데,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니? 늙어서 눈이라도 먼 것이냐?!”

정 대인의 무례한 말에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정열람을 바라보았다.

“부인을 진맥한 적은 없지만, 안색을 보아하니 머리카락도 유난히 새카맣고 눈빛 또한 맑은 것이, 울화병을 앓고 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듯하구려.”

“이, 이……! 대체 뭐 하는 작자이길래 헛소리를 마구 지껄인단 말이냐? 내 당장 관아에 고발할 테다!”

정 대인은 시뻘게진 얼굴로 노인을 향해 연신 고함을 질러 댔다.

“대단치 않은 자이니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의원의 몸으로 이 말씀은 꼭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신수(腎水)가 크게 상해, 후사를 보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지금도 자주 화를 내면 중풍에 걸릴 수 있으니 모쪼록 조심을…….”

그 말에 정 대인은 당장이라도 입에 거품을 물 듯 분기탱천했다.

“하는 말마다 헛소리로구나! 네놈을 당장 관아에 고발할 테다. 여봐라, 이자를…… 커헉……!”

노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정 대인이 갑자기 컥컥거리더니 눈을 부릅떴다.

그에 노부인이 잽싸게 달려가 정 대인의 등을 연신 두드려 댔다.

“나, 나리!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정 대인은 숨을 쉬기는커녕 오히려 숨통이 막히는지 헉헉거렸다. 급기야 고개를 쳐든 정 대인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정 대인이 중풍에 걸려 경기를 일으켰어!”

“그럼 저 노의원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거야?”

“틀림없어…….”

한편 정열람은 놀라서 달려왔다가 노부인의 손에 홱 밀려났다. 그녀를 보는 노부인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 천한 것! 네년 때문에 나리께서 이리되셨는데 어디에 그 더러운 손을 대는 게야!”

노의원이 약상자에서 은침(銀針)을 꺼내 비켜 달라고 해도 역시나 소용없었다.

“걱정해 주는 척할 필요 없소! 왕 의원! 왕 의원이 좀 살펴봐 주시구려.”

여러 사람의 시선 속에 왕 의원은 식은땀을 닦으며 맥을 짚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정 대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뒤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노인은 왕 의원에게 비키라는 듯 손짓한 뒤 손에 쥐고 있던 은침으로 정 대인을 두어 번 찔렀다. 곧 정 대인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크게 탄성을 질렀다.

“오오, 역시 스승의 솜씨에 비할 바가 아니구먼.”

“왕 의원이 한 말은 죄다 가짜였다 보군.”

“왕 의원은 정씨 가문에 매수당한 게 분명해. 그래서 선무사 부인을 모욕하고 하운방을 모함하려고 나타난 거였어.”

목운요는 인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금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 부인은 서늘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앞으로 나섰다.

“하운방에서 소란을 피운 게 두 분이시오?”

차가운 말투에 노부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정씨 가문 또한 꽤나 알아주는 집안이었지만, 재력이나 명성 그 어떤 면에서도 조부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금 부인을 뵙습니다.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 그저…….”

“방금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도 거짓말을 늘어놓을 셈인가! 여기 하운방에 장소를 빌려준 것도 나고, 하운방의 옷도 내가 가장 먼저 입었지. 하운 미인책에서 실린 최초의 미인도 역시 나였네. 자네 말대로라면 나도 목운요의 요망한 짓에 속아 넘어갔다는 건데.”

“아, 아닙니다.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저…….”

노부인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명명백백히 가려야 할 것이야! 의원 한 명으로 부족하다면 의원을 더 불러오면 되겠나? 여봐라, 가서 근처의 의원들을 모두 모셔 오너라!”

금 부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의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더니, 얼마 뒤 의원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경릉성에서 실력 있다고 평가받는 의원들이었다.

그러자 새하얗게 질린 노부인이 금 부인에게 애걸하다시피 사정했다.

“부인, 어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씨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신단 말입니까?”

“목 소저는 좋은 마음에서 경릉성의 여인들에게 자수법을 전수하겠다고 했네. 그런 소저의 명예를 더럽히고 이름에 먹칠하려던 건 자네이지 않은가.”

위풍당당한 정씨 가문이 저 계집년보다 못하단 말인가? 금 부인의 말에 노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인, 목운요는 제 딸을 꼬드겨 선무사와 이혼시킨 것도 모자라 부모 형제와 의절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이번 기회에 목운요가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낱낱이 밝혀내야, 저처럼 귀한 딸을 잃는 불쌍한 어미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정열람이 왜 이혼한 것인지는 나보다 부인께서 더 잘 알지 않는가? 설마하니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내 입으로 자초지종을 줄줄 읊어야 노부인과 선무사가 안심을 하시겠소?”

금 부인의 말투에 서서히 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 대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부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체 높은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운방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기회를 엿보는 게 나을 것이다.

“정 대인, 기다리십시오. 시시비비를 가릴지 말지는 정 대인이 아니라 하운방과 목 소저가 결정할 일 같군요!”

금 부인의 호령이 떨어지자 정 대인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기필코 정씨 가문과 척을 지시겠다는 겁니까?”

“정씨 가문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다만 경릉성 백성에게 한 가지 사실을 똑똑히 알려 주고 싶을 뿐이랍니다. 모두를 위해 선의를 베푼 사람은 모욕을 당하는 게 아니라, 합당한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걸요!”

금 부인은 하인들이 데려온 의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 계신 의원들은 경릉성에서 의술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분들입니다. 어렵사리 모셨으니 노부인께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의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로를 난감하게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노부인께선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듯합니다.”

“저는 부인과(婦人科) 전공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 대인을 보면 기력이 크게 상하신 것 같군요.”

“소인 역시 노부인의 출산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 대인의 몸 상태를 보니 후사를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의원들이 각자의 소견을 밝히니, 정 대인과 노부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특히 정 대인은 넋이라도 나간 듯 헛소리하지 말라며,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목운요와 정씨 가문 중 누구의 말이 거짓이었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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