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거짓 선행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주변의 웅성거림에 정열람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목운요를 볼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 제발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갈 곳이 없어서 제 스스로 하운방에 온 것뿐이에요. 공연한 말로 애먼 사람 모함하지 마세요.”
“모함? 당장 너희를 봐라. 너희 내외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런데 네가 하운방에 갔다 온 뒤로 갑자기 이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경릉성에서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야.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 대인이 네게 못 할 짓을 했다고 여기더구나.”
“그 사람이 제게 못 할 짓을 했다는 건 두 분도 잘 아시지 않아요?”
“주 대인은 평소 다정한 성격인 데다 우리 늙은이들도 정성으로 모셨다. 게다가 첩실 하나 두지 않을 정도로 너를 아끼지 않았니? 내 사위지만 뭐 하나 트집 잡을 게 없는데, 대체 넌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그동안 혹시 사위가 네게 섭섭한 일을 했더라도 다 지나간 일이니 그만 잊고 둘이서 백년해로하거라.”
“전 안 돌아가요!”
주고의 추악한 모습을 알게 된 이상, 그와 백년해로하기는커녕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그러자 노부인이 분노의 화살을 목운요에게 겨눴다.
“이게 모두 네년들이 사람을 홀린 탓이다! 내 딸 인생을 망친 것도 모자라 경릉성의 여인들을 모두 죄악에 빠뜨리려 하다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네 마음대로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부인은 몰려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보시오, 하운방의 자수법을 배우기 위해 아내와 여식을 보내는 일을 당장 그만두시오! 안 그랬다가는 갑자기 이혼을 하자고 날뛰거나 억지를 부릴 수 있으니 말이오.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말고 내 말 명심하시구려!”
“어머니!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제발!”
평소에도 어머니는 제멋대로인 성격이었지만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하운방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는 의도가 확실히 느껴졌다.
“내 말이 틀리기라도 했단 말이니? 누구보다도 착했던 내 딸이 갑자기 이렇게 변한 게 하운방 때문이 아니라면 누구 탓이란 말이냐?”
정열람은 더 이상 목운요를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모두 제 탓이에요…….”
“아뇨, 부인 탓이 아니라 저랑 하운방이 미운털이 박혀서 그런 것뿐이에요.”
그제야 목운요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꼭 정열람의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하운방의 문제를 들고 계속 소란을 피울 것이 분명했다.
노부인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하운방에서 반딧불을 꾀어내는 옷을 지었다고 하던데, 이게 여우가 부리는 속임수가 아니면 뭐란 말이니?”
그에 목운요가 노부인을 담담히 쳐다봤다.
“제가 아무리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어디 부인만 하겠습니까?”
“이년, 그 말이 무슨 뜻이냐?”
“제 말을 못 알아들으신 건가요? 정씨 가문은 상업을 기반으로 짧은 시간 안에 경릉성에서 명성을 떨치며 두각을 드러냈지요. 큰 따님께선 서릉으로 시집가셨다죠? 비록 오품 관리지만 성상을 모시고 있으니, 그 신분을 평범하다 볼 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둘째 따님인 정열심도 오품 경릉 동지, 셋째 따님인 정열람도 오품 선무사 대인과 혼례를 올렸죠. 듣자 하니 막내 따님도 선위사(宣慰使) 가문과 혼담이 오간다던데, 따님들이 다들 한자리씩 차지하셨네요.”
순간 노부인의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거야 우리 가문에서 쌓은 공덕(功德) 때문이 아니더냐? 천지신명께서 내려 주신 복을 네년처럼 속이 시커먼 것이 알 턱이 있나!”
“후후후, 그러게 말이에요. 그 많은 공덕을 쌓았는데 천지신명께서는 어찌 가문의 대를 끊어 버리신 건지 말입니다.”
목운요의 말에 노부인의 안색이 홱 변하더니 악다구니를 쓰기 시작했다.
“이년!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네년의 요망한 주둥이를 내 당장……!”
그에 목운요가 노부인 앞으로 걸어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스윽 훑어 내렸다.
“노부인, 지금이라도 사과할 기회를 드리죠. 제 어머니와 하운방에 사과하면 빠져나갈 기회를 드릴게요.”
“허, 나이도 어린 게 큰소리만 치는구나. 경릉성에서 이름 좀 알려졌다고 해서 우리 가문에 맞서겠다는 거냐?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더니.”
목운요는 한숨을 내쉬더니 정열람을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제가 하려는 말 때문에 또다시 상처를 입으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자신의 부모지만 정열람은 두 사람에게 완전히 실망한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목운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열람의 동의를 받은 목운요는 서늘한 눈빛으로 노부인을 바라봤다.
“노부인께서는 제 어머니와 하운방에 사과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건가요?”
“나더러 사과를 하라고?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이냐? 여시 같은 네년들한테 내가 왜 사과를 해?”
한낱 계집애일 뿐이다. 거친 욕설로 겁박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경릉성 사람들, 내 말 잘 듣게! 여기 하운방은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가 사는 여우굴이네! 경릉성 여인들에게 사람 홀리는 요망한 짓이나 가르칠 뿐이지!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하루빨리 이곳에서 도망치는 게 좋을 게야!”
노부인의 외침은 마차에서 내리던 금 부인의 귓가에도 박혀 들었다. 목운요가 하려는 일은 경릉성을 위한 일이 분명한데도, 노부인은 교묘한 말로 민심을 흐리고 있었다. 금 부인은 차오르는 분노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한편 목운요는 노부인의 도발에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본다고 하더니, 정씨 가문에서 하운방을 비난할 자격이 있던가요?”
“경릉성에서 우리 정씨 가문의 선행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지금 한 말을 제대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안 그러면 네년을 감방에 처넣고 말 테니!”
노부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명성을 가지고 감히 정씨 가문을 공격하려 들어? 그동안 경릉성에서 명성을 쌓으려고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성싶으냐?
실제로 사람들의 반응도 노부인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하긴, 겨울만 되면 정씨 가문에서 죽을 쒀서 가난한 사람들한테 공짜로 나눠 줬잖아. 나도 한 번은 신세 진 적이 있는걸.”
“어디 그뿐이야? 묘당을 수리하는 데 큰돈을 내기도 했지.”
“도로를 닦는 데도 돈을 냈다고 하던데…….”
목운요를 향한 사람들의 눈빛에 점점 의구심이 차올랐다.
그에 노부인의 입가가 위로 활짝 휘어졌다.
“자, 목운요. 그럼 말해 보거라. 대체 우리 가문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이다!”
“맞아요. 노부인의 말씀처럼 정씨 가문에서는 많은 선행을 베푸셨죠. 그런데 그 선행을 베푸는 데 필요한 돈을 어디서 난 거죠? 정씨 가문은 어떻게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거죠? 정씨 가문의 여인들은 어떻게 명문가와 혼인을 맺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노부인께서는 직접 낳지도 않은 딸을, 그것도 넷이나 되는 딸을 어디서 데려오신 건가요?”
연거푸 질문을 쏟아 낸 목운요는 마지막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순간 노부인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친 노부인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에 놀란 것은 비단 노부인뿐이 아니었다. 정열람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목운요를 쳐다봤다.
“아가씨……. 그,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인가요?”
“죄송해요, 정 총관님. 하지만 하운방을 위해서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어요.”
“……방금 그 말이 사실인가요?”
정열람은 눈앞이 크게 휘청거렸다. 자신한테만 모진 부모님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한데 그게 모두 자신이 친딸이 아니어서 그랬다는 건가?
목이 졸린 거위처럼 노부인은 꺽꺽거리는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렸다.
“닥쳐라, 이년! 어디서 그 더러운 주둥이로 사람을 모함하는 것이냐!”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경험 많은 산파를 불러 확인하면 될 것 같네요. 제가 의술을 조금 아는데, 아무리 봐도 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으신 적이 없어 보여요. 그렇다면 넷이나 되는 따님들은 어디서 데려오신 건가요?”
“다, 닥쳐라! 모두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이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이 뭘 안다고 사람을 모욕하느냐!”
“목소리만 크다고 다가 아니랍니다. 부인께서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시니,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산파든 의원이든 불러 보면 어떨까요? 선행을 베푼다는 정씨 가문에서 불쌍한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세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삼다니……. 개나 고양이도 오랫동안 곁에 두면 정이 드는 법인데, 두 분께서 그리 매정한 분들인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허, 헛소리 마라!”
“제 말이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노부인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겠죠.”
노부인이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옆에서 보다 못한 정 대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 요망한 것, 이 지경이 되고도 아직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오냐, 네 말대로 여기서 시시비비를 가려 보자꾸나. 그래, 왕 의원이 여기 있었군. 자네가 와서 우리 가문의 결백을 밝혀 주게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약상자를 짊어지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 의원은 경릉성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일선당(一善堂)의 주인이지. 자네라면 믿을 수 있을 테니 어서 살펴봐 주게!”
왕 의원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에 기대감이 어렸다.
“아이를 낳은 여인은 골반이 벌어지고 몸의 형태가 조금 틀어지게 된답니다. 게다가 노부인께서는 넷이나 되는 따님을 낳지 않으셨습니까? 척 봐도 노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으신 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