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궁지에 몰린 하운방
“어이쿠, 그런 말이 어디 있답니까? 물처럼 막힘없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는군요.”
목운요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셔 보라는 자세를 취했다. 진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의 뚜껑을 열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다완 한가운데 놓인 찻잎에서 투영한 옥빛 차탕이 배어나고 있었다. 은은한 차향과 함께 한 줄기 김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노을에 물든 구름을 연상시켰다.
그는 천천히 다탁을 들어 올리며 다완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찻잎이 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 꽃을 떠올리게 했다.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한 모금 마시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도 차 좀 마셔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마신 게 모두 엉터리였나 봅니다. 이런 차는 난생처음 마셔 봅니다.”
“과찬이세요. 다관의 손님들을 위한 눈요기로 장난을 쳐 본 것뿐이랍니다.”
“목 소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런 실력을 두고 장난이라뇨?! 사람들만 잘 가르치면 다관은 금세 인기를 끌게 될 겁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도는 대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 건가요?”
“심심할 때 괜히 이것저것 만져 봤을 뿐이에요. 변변치 못한 재주라 부끄럽습니다.”
그 말에 진 총관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목운요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랍고 영특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반면 눈을 내리깐 채 다구를 바라보던 목운요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정에서의 입지가 여의치 않자, 진왕의 초조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목운요는 한참의 연구 끝에 지금과 같은 자신만의 다도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 * *
하운방으로 돌아온 목운요의 눈에 주부(周府)의 표식이 찍힌 마차가 한 대 보였다. 이 시간에 여기 올 만한 주부의 사람이라면 선무사 주고밖에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정열람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 대인, 이제 저흰 남남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람아, 내가 잘못했다. 부디 날 용서해다오. 나와 함께 돌아가자꾸나.”
“이혼 증서가 며칠 전에 내려왔으니 더 이상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주 대인께서는 제 이름을 더럽히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 주세요.”
목운요의 기척을 눈치챈 정열람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가씨, 오셨군요. 이자는 당장 내보내겠습니다.”
목운요는 정열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위로 올라가려던 순간, 뒤에서 분기탱천한 주고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운요! 어린 계집년이 나와 부인 사이를 갈라놓았구나. 네 악독한 짓을 내가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목운요가 뒤돌아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주고를 응시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더니,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절 비방하는 건 군자답지 못한 짓 같네요.”
“흥,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런 부인이 하운방에 몇 번 들락거리는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게 네 탓이 아니면 누구 탓이란 말이냐!”
영악한 것 같으니라고! 주고가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에 정열람이 소란을 피운 일로 오랫동안 쌓아 왔던 명성이 크게 훼손됐다. 알고 있는 연줄을 죄다 동원해 이혼을 막으려 했지만, 금씨 가문에서 미리 손을 쓴 바람에 그동안의 노력도 물거품으로 변하고 말았다.
금 부인과 목운요가 돈독한 관계라는 것은 경릉성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을 목운요가 뒤에서 꾸몄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만하세요!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이불을 덮고 잤는데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요! 하긴, 그동안 제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으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 리 없겠죠. 계속 소란을 피운다면 관아에 고발할 거예요. 그 죄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선무사 대인께서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 그건……. 람아, 내게 어찌 이리 매정하게 구는 것이냐?”
“매정하다고요? 매정한 사람으로 따지면 저는 선무사 대인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답니다.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 같네요. 앞으로 대인께서 누구를 품에 안고, 누구와 같은 이불을 덮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사십시오!”
“그, 그게 지금 무슨 뜻이냐?”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고를 향해 정열람이 콧방귀를 뀌더니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주 대인, 그만 가 주세요!”
그에 주고는 마음을 정한 듯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람아, 내가 잘못했다. 정말 잘못했다. 못난 나를 용서해다오. 부디 한 번만 기회를 줘! 이혼 증서는 내 어떻게 해서든 취하하마.”
놀란 정열람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주고와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그가 얼마나 오만한 인물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한데 그런 그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이었다.
“이혼 증서는 조정의 허가를 받은 것인데 어찌 무를 수 있단 말입니까?”
꼬리를 내린 주고를 보며 목운요는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만 해도 기세등등했었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무릎까지 꿇은 것일까? 오만한 주고가 태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기대에 부푼 표정의 주고를 보며 정열람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이혼 증서는 제가 쓰고, 주 대인께서 서명한 뒤 상부에 올리셨죠. 그때 제정신이 아니라서 헛소리를 했다고 둘러댈 생각입니까?”
“람아, 난 그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니……. 아가씨, 육냥에게 이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세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자, 육냥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고를 끌고 나갔다.
대문이 닫히자 정열람이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에 애지중지했었는데, 지금 보니 마차가 아니라 똥차였나 봅니다. 게다가 구린내를 풀풀 풍기는…….”
“이제라도 아셨으니 지나간 일로 괴로워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히 깨달았으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요.”
숨통을 꽉 누르던 뭔가를 덜어 낸 듯, 깊은 한숨을 내뱉은 정열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해 보였다.
하지만 목운요는 일이 여기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고의 태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래층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란이 허겁지겁 문을 두드린 뒤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저, 빨리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정 대인과 그 부인께서 오셨는데, 정 총관님이 울화병에 걸려 정신이 온전치 못해 그런 것이라며, 집으로 데려간다고 하십니다!”
목운요는 미간을 크게 찌푸리더니 빠르게 옷을 갖춰 입곤 금란을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금 부인에게 하운방으로 와 달라는 기별을 넣으세요. 잠깐, 정 총관님이 울화병에 걸렸다고요?”
“예, 노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그럼 금 부인께 이쪽으로 오실 때 의원 열 명도 데려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정씨 가문에서 울화병 운운하며 농간을 부린다면 의원을 대동하는 편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 소저.”
* * *
“람아, 이 불쌍한 것……. 네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단 말이냐?”
정열람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충격과 슬픔에 정열람은 자꾸만 주저앉고 싶었다.
“어머니야말로 절 벼랑 끝으로 떨어뜨리려 하세요?”
정열심이 자신 몰래 남편과 사통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하운방에 몰려와 자신이 울화병이 걸렸다며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다니……. 한마디로 자신더러 죽으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때, 계단에서 내려오는 목운요를 발견한 노부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운요, 내 착한 딸이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냐?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네년을 관아에 고발할 테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나 저들은 정열람이 걱정돼서 온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의 목표는 자신, 어쩌면 하운방일 것이다.
요란한 소리에 아래층으로 내려온 소청은 눈앞의 상황을 살피더니 목운요 곁에 나란히 섰다.
“정 대인, 노부인. 무슨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말로 해결하면 될 일을 어찌 화부터 내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노부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소청에게 코웃음을 날렸다.
“하운방이 경릉성에서 왜 난리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늙은 여우가 어린 여우를 앞세워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나 보구나!”
경릉성에 온 뒤로 누구한테서도 악의 섞인 소리를 듣지 않은 소청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향해 악담을 쏟아 내는 노부인을 보니, 지난 시절 이 씨에게 당했던 일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온몸을 부르르 떠는 게 보이자, 목운요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부인을 바라봤다.
시커먼 아이의 눈동자에 노부인은 움찔하더니 슬슬 뒷걸음질 쳤다.
“흥, 독한 호랑이도 제 새끼는 안 잡아먹는다고 하던데, 제가 오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분을 뵈었네요. 따님이 울화병에 걸려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동네가 떠나가라 외치는 저의가 궁금하군요. 그리 말해야 정 대인과 노부인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요?”
“전에는 멀쩡했던 아이가 하운방에 들른 뒤로 갑자기 이혼을 하겠다며 날뛰었다. 그것도 모자라 사위가 데리러 가자 제 손으로 얼굴을 망가뜨렸지. 네년이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 없다!”
구경꾼들은 노부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주 대인 때문에 정 부인이 얼굴을 다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노부인의 말대로라면 정 부인이 스스로 얼굴을 망가뜨렸다는 건데, 대체 누구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