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52화 (52/442)

52화 월왕에게 보낸 서신

* * *

서신을 받아 든 시위 우항은 어안이 벙벙했다. 목운요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가져가서 월왕에게 보여 주려던 찰나, 부리나케 뛰어오는 성 공공의 모습이 보였다.

제 손에 들린 서신을 발견한 성 공공이 한 떨기 꽃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시커멓고 비쩍 마른 데다, 기괴한 애꾸눈의 사내가 말이다.

“성 공공, 이걸 주인님께 보여 드리…….”

“아아, 역시 그거로군. 내가 왕야께 직접 가져다드리지.”

성 공공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안 그래도 진가 놈이 보낸 서신을 통해 경릉성의 동향은 대충 파악해, ‘귀인’의 서신이 당도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신을 받아 볼 주인님의 반응이 어떠할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왕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성 공공?”

성 공공이 서재 안으로 들어오자 월왕이 고개를 들었다.

성 공공은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재빨리 건넸다.

“오늘 경릉성의 진가 놈한테서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왕야에게 드리는 서신이 따로 하나 더 있던데…….”

서신을 받아 본 월왕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평소 부하들과의 서신에는 용건만 간단히 작성하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서신은 꽤나 묵직했다. 봉투를 찢고 펼쳐 든 서신의 필적을 보자, 방금 전보다 미간이 한껏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성 공공은 남몰래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다. 진가 놈, 드디어 제대로 된 일을 하는구나. 주인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확실한 것 같았다!

서신은 사소한 일들로 채워져 있었다. 하운방이 몇 건의 예약을 받아 냈는가를 시작으로, 어떤 옷을 지었는지, 왜 경릉성에서 인기를 누리게 됐는지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금수원의 보수 작업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곳을 수리했고, 또 거기에 어떤 조경을 꾸몄는지, 심지어 진 총관이 가져다준 다과의 종류도 다 적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던져 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월왕은 목운요가 자신의 필체로 쓴 서신을 묵묵히, 그리고 꼼꼼히 읽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목운요와 함께 긴 시간이라도 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숨에 서신을 읽어 내려간 월왕의 시선이 서신의 말미에 한참을 머물렀다. 경릉성의 여인들에게 자수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구절을 보니 호기심이 점점 더해졌다.

그렇게 가르치고 나면 그 결과는 어떠려나? 그리하면 위험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다관까지 연다면 많이 바쁠 테데? 정열람이라는 여인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그 주고라는 자는 진왕이 포섭한 사람일 텐데…….

온갖 궁금증이 한꺼번에 떠오르자, 월왕은 낯선 자신의 모습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에 성 공공은 애써 웃음을 억누르며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왕야, 내일 경릉성으로 회신을 보낼 예정입니다. 답장을 주시면 내일 같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월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확실히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쓴 답장이 도착했을 때쯤이면 경릉성의 상황도 어느 정도 진정됐을 것이다.

성 공공이 어울리지 않게 벙글벙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신을 다 쓰시거든 불러 주십시오.”

“그래.”

* * *

목운요는 생각나는 대로 쓴 자신의 서신에 월왕이 관심을 기울이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채, 다관에서 팔 차를 확인하고 있었다.

조제된 차를 한 주먹 쥐고 향을 맡자, 맑고 청량한 차향이 그윽하게 밀려들었다.

그 모습을 진 총관은 흡족하게 바라봤다. 평소 차를 즐겨 마시는 그는 찻잎의 품질만 보고도 그 맛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마셨던 그 어떤 차보다 목운요가 조제한 차에서 이처럼 그윽한 향기가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향은 물론, 찻잎의 색 또한 오묘한 옥빛을 띠는 것이 보기만 해도 마셔 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목운요는 특별히 조제한 찻잎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진 총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 총관님, 앞으로 일할 사람들을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진 총관의 부름에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정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인(木人)처럼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내심 탄복을 금치 못했다. 과연 월왕의 사람들다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순간 진 총관은 아뿔싸 하며 빠르게 입을 열려 했다. 그동안 금수원을 단장하느라,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웃음기를 머금은 목운요가 슬며시 고개를 가로젓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선발된 일꾼들은 다관에서 일하며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목운요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계단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시간이 갈수록 집요해졌다.

그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맨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듯,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목운요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위일(衛一), 목 소저를 뵙습니다.”

“운춘(雲春), 목 소저를 뵙습니다.”

그제야 목운요가 시선을 거뒀다.

“두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뽑힌 자들인가요?”

“예.”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저지른 결례를 어떻게 바로잡을 생각이죠?”

위일과 운춘은 무의식으로 진 총관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눈을 내리깐 채 목운요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곤 이 일에 관여할 의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소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위일과 운춘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 했다.

“모두 일어나세요.”

그들이 무릎을 꿇으려는 것을 본 목운요는 당장 일어나라고 명했다.

“여러분은 모두 사야의 사람들이었죠. 그러다가 갑자기 날 따르게 돼서 익숙하지 않다는 건 저도 이해해요.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지낼 생각은 없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주인은 저예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그래야 다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다관을 이끌 사람은 자신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확실히 못 박지 않는다면 다관을 운영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위일과 운춘은 또다시 진 총관을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잠깐 동안 침묵했던 두 사람이 목운요를 향해 다시금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목 소저를 뵙습니다.”

“좋아요. 방금 저지른 결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겠어요. 위일과 운춘, 두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세요. 내일부터 여러분에게 차를 끓이는 법을 가르칠 거예요.”

“예.”

사람들이 사라지자, 목운요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진 총관님, 죄송해요. 도와주시려 했는데 제멋대로 행동해서…….”

“아닙니다, 목 소저. 잘하셨어요. 사람을 부릴 때는 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죠.”

목운요의 행동에 진 총관은 진심으로 탄복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어린 소녀가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담담한 눈빛 하나로 제압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목운요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드리워졌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잎을 보며 목운요가 싱긋 웃었다.

“예전에 금수원 보수가 끝나면 진 총관님께 차 한잔 대접해 드린다고 했었는데, 오늘이 그 약조를 지킬 기회인 것 같네요. 육냥, 마차에 가서 다구를 가져다줘.”

“오호,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진 총관님께서 열심히 도와주신 덕분에 큰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일찌감치 대접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세요, 진 총관님.”

“어이쿠,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사이 육냥이 다구를 내왔다. 다구가 단정하게 차려지는 모습에, 꽤나 박학다식하다고 알려진 진 총관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게 다구란 말입니까?”

탁자 위에는 십여 개의 물건이 있었다. 다호(茶壺), 다완(茶碗), 다반(茶盤), 다로(茶爐) 외에 나머지는 진 총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목운요는 그런 진 총관을 향해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하찮은 재주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그녀는 가장 먼저 대야에 깨끗이 손을 씻었다. 새하얀 손가락에 물방울이 맺히자 옥구슬 못지않게 영롱한 빛을 뽐냈다.

하얀 다건(茶巾)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 낸 목운요가 수발(水鉢)을 들어 화로 위에 올려져 있던 백자(白瓷)에 넣었다. 다완을 은은한 온도의 물에 담가 미리 달궈 놓는 것이다.

차분히 손을 놀리는 목운요를 바라보는 진 총관의 눈빛이 점점 밝아졌다. 그제야 목운요가 다관을 열겠다고 한 자신감의 근거를 알 수 있었다.

얼마 뒤 백자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열기가 솟아올랐다. 목운요는 다시(茶匙)로 적당량의 찻잎을 덜어, 조용히 끓고 있는 청화박태자기(靑花薄胎瓷器)에 넣었다. 물 끓는 소리에 탕관(湯罐)을 들고 탕수(湯水)를 붓자, 찻잎이 휘돌면서 은은한 향을 뿜어냈다.

진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슬쩍 내밀어 그 향을 맡았다. 다완을 슬쩍 내밀자, 목운요가 탕관을 들고는 그 안에 담긴 것을 다우(茶盂)에 쏟아부었다.

그 모습에 진 총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따라 주려던 게 아니었나?

목운요는 다시 탕관을 들고는 다완을 향해 차탕을 쪼르륵 따랐다. 그런 뒤에 다완의 뚜껑을 닫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탁(茶托)에 올려 두 손으로 건넸다.

“차 본연의 맛을 품평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번잡한 과정을 생략했어요. 그저 겉모습만 따라 했다고 흉보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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