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
그러나 정열람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주고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슬픔과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주 대인, 이제부터 우린 남남입니다.”
목운요가 정열람을 부축하며 거들었다.
“주 대인,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리하셔도 정 총관님께선 돌아가지 않으실 거니까요.”
“네까짓 게 뭔데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서슬 퍼런 주고의 위협에 목운요는 냉소를 날리며 담담한 눈빛을 보였다.
“전 일개 평민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법도를 지키고 예절을 따르기에 있어선,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 누구 앞에서도 떳떳합니다.”
“잘한다, 잘해!”
목운요의 말에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동조하자, 주변 사람들도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목운요와 같은 평범한 백성이었다. 평소 관원만 보면 죄지은 것도 없이 몸을 사리던 사람들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어린 소저의 용기에 탄복한 눈치였다.
자신들 역시 국법을 어긴 적도 없고, 죄를 지은 적도 없는데, 어찌 평생을 굽신거리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자 주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더 이상 으름장을 놔 봤자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정열람을 바라보던 주고가 이내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가 하운방을 떠나는 것을 확인한 정열람이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이에 목운요는 금란, 금교와 함께 정열람을 부축해 위로 올라갔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선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고를 향한 욕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이 경릉성 전체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 * *
해 질 무렵, 금 부인이 하운방에 왔다는 소식에 목운요가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죄송해요. 제가 철이 없어서 부인을 또 걱정시키기만 하고…….”
금 부인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굽혀 절하는 목운요를 재빨리 일으켜 세웠다.
“편하게 있으래도.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송은 무슨. 그나저나 정 부인은 어떻게 하고 계시니?”
“의원이 다녀가셨어요. 혼절하신 것뿐, 몸을 잠시 추스르면 괜찮아지실 거라고 했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란다. 다행히 하운방과 인연을 맺었으니 네가 정성껏 대하거라.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삶이 평탄치 않았을 터인데, 이혼까지 했으니 그 처치가 오죽 외롭고 쓸쓸하겠니……. 어려운 일이 있거든 사람을 시켜 내게 알려다오.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부인. 그래도 오늘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오늘 하운방에서 일어난 일로 주고의 죄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게다가 정열람은 얼굴이 상하고 말았다. 여인에게 이것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금 부인은 정열람의 처지를 동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깔끔하게 정리된 책자 한 권을 내밀었다.
“이건 자수법을 배우고 싶다고 신청한 여인의 명단이란다. 문제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려무나.”
“부인께서 정리한 것이니 분명 아무 문제도 없겠죠. 당장 내일부터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운요의 입가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나긋한 말투 역시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생각들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주고의 악행이 어떻게 드러나든, 그 죗값을 치르는 것은 그가 될 터. 이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터이니 주고가 하운방에 헛된 수작을 부릴 여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연말이 되면 관리들의 한 해 성과를 조정에서 평가한다. 주고 스스로 이혼에 따른 부정적인 여론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승진은커녕 현재의 자리를 지키기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 * *
급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소청이 미음이 든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저녁까지 일이 끊이지 않아 지금껏 아무것도 못 먹었잖니. 미음을 끓여 왔으니 이거라도 마시고 쉬렴.”
“감사해요. 어머니도 여기 앉아서 쉬세요.”
“하아, 방금 정 총관을 살피고 왔단다. 의원이 지어 준 약을 먹고 잠이 들었더구나. 잠에서 깨면 상심이 크지 않을까 걱정이야. 그리 곱던 얼굴이 상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할지…….”
“어머니, 얼굴은 한낱 거죽에 불과할 뿐이니 정 총관님은 분명 잘 견뎌 내실 거예요.”
사실 처음에는 얼굴에 상처를 낸 게 주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제 손으로 정열람을 해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정열람 스스로 상처를 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주고와의 관계를 확실히 끊기 위해 일부러 일을 저지른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자, 소청이 고개를 끄떡이며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꾸했다.
* * *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나 단장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금란 등과 나란히 앉아 있는 정열람의 모습이 보였다.
“정 총관님, 왜 더 쉬지 않고 내려오신 거예요?”
얼굴에 상처는 났지만, 오랜 미로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정열람의 눈빛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에요.”
“열심히 일하시려면 일단 건강부터 얼른 회복하셔야죠.”
정열람이 손을 내저으려고 하자, 목운요가 재빨리 손목을 쥐었다.
“절대로 사양하지 마세요. 상처가 제대로 낫지 않으면 절대로 일을 맡기지 않을 거니까요. 방 안에만 계시는 게 지루하시면 대청에 의자를 가져다 놓을게요. 의자에 누워서 구경만 해도 덜 답답하실 거예요.”
단호한 목운요의 말에 정열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때문에 하운방에 피해를 준 것 같아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급했던 것 같다. 상처 입은 몸으로 돕겠다고 나서 봤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계속 돌봐야 할 것이다.
정열람이 수긍하니 목운요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식사를 시작할까요? 오늘도 정신없이 바쁠 거예요. 밥을 먹은 후엔 각자 열 냥씩 받아 가도록 해요. 부족하거든 내게 더 달라고 하고요.”
“감사합니다, 소저!”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 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직접 하운방을 찾았다. 목운요는 최대한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금란을 비롯한 소녀들을 전부 수업에 투입시켰다.
다들 손재주가 있어, 빠른 시일 내에 쓸 만한 일손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금 부인은 거의 매일같이 하운방을 찾았다. 그사이 정열람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첫 번째 교육생들은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게 됐다.
“부인, 이제 교육생들을 실무에 투입시켜도 될 것 같아요. 다음 교육생을 데려와도 될 듯합니다.”
목운요는 소수 정예 방식을 고수했다. 그렇지 않고 대충 가르쳤다가는 예상했던 결과를 결코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잘됐구나. 이제는 그 아이들에게 경릉성의 다른 여인들을 가르치도록 해야…….”
금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운요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전 그런 일은 잘 몰라서.”
그 말을 금 부인이 믿을 리 없었다. 목운요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직접 보고 겪어, 그녀에 대해선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목운요에게 모르는 일 따위는 없다는 걸 말이다.
“운요야,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네가 잘 관리해야 하지 않겠니?”
“후후, 부인께서 알아서 일을 봐주고 계시니 전 이제 슬슬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하여간 너란 아이는……. 그 자리를 잡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혈안이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리야?”
자신을 대하는 순무 부인의 태도에서도 부러움과 시기가 느껴졌는데, 다른 부인이야 오죽하랴?
“부인. 옛말에 이르기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전 그저 어머니와 오순도순 살고 싶을 뿐인걸요.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다른 건 나설 엄두도 나지 않는답니다.”
“다른 사람보다 똑똑해도 한참 똑똑한 네가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다니, 내 속이 다 타는구나. 경릉성 여인들에게 자수법을 전수하는 일은 분명 큰 업적으로 이어질 게다. 성상께서 그 공을 치하하실 때 단단히 한몫 챙겨야지 않겠니?”
“그렇다면 더더욱 관여하고 싶지 않은걸요? 지금 모두들 하운방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습니까? 어머니와 둘이서 의지한 채 살고 있는데, 주제넘게 나섰다가 험한 꼴 당한 바에야, 상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 편이 나아요. 이 문제에 대해서 부인께서도 그만 말씀해 주세요. 이야기만 들으면 마음만 복잡해지니…….”
목운요는 정말 답답한 듯 말하는 내내 가슴을 팡팡 두드려 댔다.
“알았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으마. 앞으로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렴.”
그리 말했지만, 금 부인은 아이가 받아야 할 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줄 생각이었다.
* * *
금 부인을 떠난 보낸 뒤,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목운요는 탁자에 기대 자신도 모르게 연신 하품을 했다
“후우…….”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뱉은 뒤 손에 붓을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월왕에 관한 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제 진 총관이 사람을 시켜 신선한 과일을 보내 주고 나서야, 월왕에게 서신을 써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붓을 들기는 했는데, 뭘 써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해도 여전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자, 아예 고민이라는 걸 하지 않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마구잡이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다 보니 어느새 몇 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서신을 단단히 봉한 뒤, 육냥에게 건네줬다.
“이걸 금수원 진 총관님께 가져다드려.”
“예.”
그 후 목운요는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옷을 맞췄던 부인들의 옷도 모두 완성되어 사람들 앞에 첫선을 보였고, 금수원의 보수 작업도 거의 다 끝나 편액을 달기만 하면 지금 당장 가게 문을 연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 목운요가 쓴 두툼한 서한은 보름 뒤 월왕부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