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50화 (50/442)

50화 계약 체결

* * *

방으로 들어서자,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끈질긴 시선도 사라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자신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꼬옥 맞잡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언니라는 여인을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목운요가 금란 등에게 돌아가라는 눈짓을 한 뒤, 정열람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정열람이 얼굴에 난 눈물 자국을 힘겹게 닦아 냈다.

“금란이 준 손수건에 생강즙이 너무 많았어요. 덕분에 지금도 눈물이 멈추지 않네요.”

“다음에는 적당히 묻혀 두라고 할게요. 그보다 부인, 마음은 정하신 건가요?”

오늘 일로 경릉성은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정열람이 주고의 곁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리라.

“후후, 이젠 돌아갈 수도 없게 됐는걸요.”

온 마음을 바쳐 연모했던 남편이 마음에 품은 사람이 언니일 줄 누가 알았으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주지 못해서 여태껏 죄인처럼 지내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이 불임이었던 것이 아니라, 혼례 당일 마셨던 합환주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약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가장 절망시켰던 건, 이 모든 게 언니와 남편이 공모해서 저지른 일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님조차 그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에 그녀의 인생은 순식간에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처럼 송두리째 부서져 버렸다.

“마음을 정하셨다면 여기서 마음 편히 지내세요.”

“언니가 또 찾아올까 봐 무서워요.”

그동안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언니를 항상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자신을 대하는 언니의 태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진실이 드러나자 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보였다.

“또 오면 오라지, 겁낼 게 뭐랍니까? 국법에는 엄연히 이혼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는걸요. 정 총관님은 자신의 선택을 한 것뿐이잖아요? 게다가 못 할 짓을 한 이는 주 대인이고. 자꾸 괴롭히면 확 공개해 버리세요. 지금 겁먹어야 하는 건 정 총관님이 아니라 그쪽일 테니까요.”

목운요의 말에 정열람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알고 있는 거예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도 다 알지는 못해요. 다만 그날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도록 도와드릴 때 우연히 손목을 짚게 되었는데, 몸 안에 한기가 뭉쳐 있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잘못된 걸 드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정 총관님이 입고 계셨던 옷에도 사특한 기운이 잔뜩 배어 있어서…….”

“사특한 기운이라는 게 뭐죠?”

“주머니에서 정향(丁香) 향이 났는데, 살펴보니 사초(莎草)가 섞여 있었어요. 오랫동안 가까이하면 원기가 크게 상하게 되죠.”

입을 굳게 다문 정열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독한 사람들이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그 후로 정열람은 반 시진 동안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런 그녀의 곁을 목운요가 묵묵히 지켰다.

간신히 울음을 멈춘 정열람이 단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까 그 계약은 유효한가요?”

“물론이죠.”

목운요가 정열람 앞에 증서와 함께 붓과 먹을 내려놓았다.

“지장은 찍었으니 이름만 쓰면 돼요.”

눈물을 닦은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붓을 들어 지장 옆에 ‘정열람’이라는 이름 석 자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할 일이 산더미지만, 오늘은 좀 더 우셔도 돼요. 다시는 울지 않을 만큼 실컷 우신 뒤에 일을 시작하시죠.”

“후후, 하운방의 주인님이 참 똑 부러지기도 하네요. 덕분에 하운방이 금세 돈방석에 오르겠는데요?”

“그렇게 되면 정 총관님이 매일 새 옷을 입으실 수 있도록 옷을 백 벌 지어 드릴게요. 경릉성 최고의 미녀로 만들어 드리죠!”

“미리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그에 목운요는 눈가를 활짝 휘어뜨리더니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정열람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큰 상처를 입어서일까? 생각했던 것보다 배신의, 이별의 상처가 아프지 않았다. 이깟 상처 훌훌 털어 내면 그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열람이 마음을 다잡았다.

* * *

정열람과 선무사가 이혼했다는 소식은 경릉성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운방 문가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열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변의 반응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총관 일에만 부지런히 매달렸다.

심지어 목운요한테서 수놓는 법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의외로 그녀는 손재주가 대단했다. 머지않아 금란과 금교에 맞먹는 실력을 갖추게 될 정도였다.

정열람의 손에 쥐어진 옷을 보며 목운요가 탄성을 질렀다.

“정 총관님한테 이런 손재주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미인도 속의 옷을 절대로 팔지 않았을 거예요!”

“하여간, 아가씨는 항상 칭찬만 하신다니까요. 전 그저 수를 놓을 줄이나 알지, 도안 같은 건 만들 줄도 모르는걸요. 제가 도안을 그리면 나비가 게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정열람의 얼굴에서는 환한 미소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 덕분에, 옆에 있던 금란과 금교도 웃음을 터뜨렸다.

목운요는 진심으로 정열람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하면서도 다정한 그녀의 등장으로, 조용했던 하운방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문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예감이라도 한 듯, 순간 정열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목운요의 눈짓에 육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대문을 열었다.

문을 거칠게 두드린 이는 다름 아닌 선무사 주고였다. 감색 옷과 옥관(玉冠, 옥으로 장식한 관)을 걸친 그는 무관 출신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끈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열람이 옷매무새를 살피더니 목운요에게 걸어갔다.

“아가씨, 제가 만나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예, 저희는 위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거든 바로 불러 주세요.”

“감사합니다.”

목운요는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육냥에게 눈짓을 보냈다.

육냥은 장검을 쥔 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서서 상황을 지켜봤다. 여의치 않은 일이 생기면 당장 달려갈 준비를 했다.

목운요가 위층으로 올라온 것을 본 소청이 얼굴을 굳혔다.

* * *

“요아야, 아래층에 무슨 일이 있니?”

“선무사 대인께서 오셔서, 정 총관님과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모두 올라왔어요.”

“이런……. 주 대인이 정 총관을 못살게 구는 건 아니겠지?”

소청에게 있어 정열람은 낯선 경릉성에서 처음 사귄,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하언촌의 양 씨 역시 자신을 친근히 대해 주기는 했지만, 이야기가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열람과 같이 있으면 딱히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게다가 허물없이 사람을 대하는 정열람의 밝은 성격 덕분에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심을 품기도 했다.

“걱정 마세요. 정 총관님만큼 사리 분별이 뛰어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요?”

“그래, 저렇게 멋진 여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주 대인도 참…….”

그 말에 목운요는 아무 말 없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열람과 주 대인이 반 시진 가깝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목운요도 슬슬 아래층의 상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때, 쨍그랑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놀란 마음에 그녀는 방문을 박차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아래층에 가 보니, 바닥에 주저앉은 정열람과 그 옆으로 깨진 도자기 조각이 보였다. 어디를 베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노란 양탄자 위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붉은 선혈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정열람에 앞에 선 선무사 주고는 놀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입을 쩍 하니 벌린 채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운요는 곧장 육냥을 향해 소리쳤다.

“가서 대문을 열어!”

그 소리에 주고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목운요를 매섭게 째려봤다.

하지만 목운요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달려가 정열람을 부축했다.

“부인, 어찌 된 일이에요?”

하운방 대문이 활짝 열리고 그 안에 펼쳐진 상황에, 몰려든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정 부인?! 어찌 된 일이지?”

“헉! 저기 봐, 저기! 핏자국 아냐?”

“설마 해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서, 설마…….”

정열람을 부축한 목운요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에, 처음에는 손을 다쳤다고 생각했다. 한데 자세히 살펴보니 피가 흐르는 쪽은 손이 아닌 얼굴이었다!

정열람의 고운 얼굴이 깊은 상흔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자, 눈앞이 순간 아찔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분노, 의심, 경악…….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주고가 서 있었다.

선무사 대인은 평소에도 인품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탓에 자신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정열람의 주장에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주변의 의혹을 단번에 날려 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주고가 정열람에게 손찌검을 한 일은 둘째 치고, 깨진 도자기로 얼굴을 망가뜨렸다. 하물며 일반 평민도 아닌 명문가 규수가 이런 괄시와 핍박을 받고 어찌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부인, 부인!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몇 번이나 부른 끝에 정열람이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전…….”

그녀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뺨의 상처에서 선혈이 투두둑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에 몰려든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아파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