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누가 더 무고한가?
“며칠 전에 정 부인께서 비 오는 밤 하운방에 오셨지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온몸이 젖어 있으셨어요. 무슨 일인지 물으니 친정에서 쫓겨나셨다고…….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오셨다 하길래, 정 부인을 하운방의 총관으로 고용했답니다. 지금껏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시는 부인께서 며칠 동안 감감무소식일 만큼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 말에 눈물을 닦던 정열심의 손이 멈칫했다. 어린애한테 허를 찔리긴 했지만, 다행히 ‘대본’을 다 써 둔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목 소저, 저도 일찍 동생을 만나고 싶었지만 동생 때문에 부모님이 쓰러지셔서 수발을 드느라 그만……. 다행히 차도가 있어서 이제야 온 거랍니다. 동생이 얼른 돌아가서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고 두 분을 위로해 드렸으면 좋겠네요.”
그에 목운요는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몇 마디 말로 정열람을 죄인으로 만들다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저 말을 듣고도 정열람이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녀를 불효녀라고 손가락질할 거다. 그렇다고 순순히 돌아간다면 그 후에는 이전 생에서 봤던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정 대신과 노부인께서 쓰러지셨다고요? 정 부인이 걱정되어 그러셨나 보네요. 하긴, 요 며칠 정 부인께서도 두 분 때문에 괴로워하셨답니다. 다만 자신이 돌아가면 나이 드신 부모님이 더 힘들어하실 것 같다며 내내 걱정이 많으셨는데……. 돌아오라고 하신 걸 보니 정 부인의 결정을 받아 주시기로 했나 보네요. 금란! 가서 정 부인을 모셔 와요. 선무사와의 이혼을 부모님께서도 허락해 주셨으니 안심하셔도 되겠네요.”
이혼? 그 말에 주변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국법에서는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실제로 이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터라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나 아내와 이혼한 관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열심은 밭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살며시 가로저었다. 눈물을 닦는 여린 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정열람 때문에 부모님이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목운요의 입을 거치니 딸에 대한 걱정으로 몸져누운 것으로 들렸다.
“목 소저, 부모님께선 동생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 말을 정확히…….”
그 말에 목운요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도 정 부인이 안됐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듣고 나선 얼마나 분통이 터지던지……. 외부인인 제가 봐도 이런데 친부모님이면 오죽하시겠어요? 마음이 아프셔서 병이 나신 줄 알고 그만……. 죄송해요, 동지 부인.”
이혼이라는 말에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목운요의 이야기에 머릿속으로 온갖 추측을 써 내려갔다.
정씨 가문은 경릉성에서도 꽤 유명한 집안이었다. 정열람이 여타 규수들과 좀 다르긴 했지만, 가문의 명예를 버리면서까지 이혼을 강행할 리 없다. 피치 못할 심각한 사정이라면 몰라도…….
그에 누군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목 소저, 선무사 부인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맞아, 자세히 좀 말해 봐.”
“이건 집안일이니 저 같은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금란, 정 부인을 모셔 와요.”
“예, 소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운방 안쪽으로 쏠렸다. 이내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금란과 금교가 정열람을 양쪽에서 부축한 채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정열람은 새하얀 비단옷을 걸친 채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었지만, 티 없이 투명한 옷 덕분에 정열심보다 훨씬 가녀리고 안타까워 보였다.
“언니가 절 보러 올 줄은 몰랐어요…….”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정열람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울기라도 한 것인지 잔뜩 잠긴 목소리가 참으로 애달팠다.
“아니, 선무사 부인께서 왜 저렇게 되신 거야?”
평소 말을 타고 채찍을 휘두르던 여장부가 하루아침에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변하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길래 사람이 저렇게 됐단 말인가?
화가 단단히 난 정씨 가문에서 정열람을 비 오는 밤에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열람이 그럴 만한 짓을 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정열람을 보니 필경 말 못 할 사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열람이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이리 관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혼을 승인하는 문서가 아직 내려오진 않았지만, 저는 선무사 대인과 결혼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지나간 일들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으니 모두들 제가 죽었다 여겨 주십시오. 언니, 내가 모자란 탓에 부모님도 화병으로 쓰러지시고 가문의 얼굴에도 먹칠을 했어. 하지만 주씨 가문으론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부모님께는 죄송하다고, 날 없는 자식으로 여겨 달라고 전해 줘.”
정열심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평소 어리숙했던 동생이 하루아침에 능구렁이처럼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목운요가 꾸민 짓일까? 하지만 고작 열세 살 먹은 계집애가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게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선무사 대인께서 평소 널 얼마나 총애하셨는데 이러니? 고작 뺨 한 대 맞았다고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뺨을 맞아서 저런 거라고? 부부 싸움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져서 손찌검하는 일이야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가 봐도 이혼이 과한 처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말에 목운요가 정열람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인, 주 대인께서 뺨도 때리셨어요? 왜 그동안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놓고 손찌검까지 하다니! 동지 부인은 정 부인께서 선무사 대인과 왜 이혼하시려는지 아시나요?”
“대충 듣긴 했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외부인인 제가 들어도 원통하던데, 부인의 친언니라면서 화도 나지 않으시던가요?”
“목 소저가 아직 어려 부부 사이의 일을 잘 몰라서 그래요. 평범한 부부라면 베갯머리 송사로 풀고도 남을 일인데, 뺨 한 대 맞았다고 양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정열심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목운요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동지 부인, 정 부인께서 왜 이혼하시려는지 그 이유를 정말 알고 계시나요?”
“그,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죠.”
그때, 정열람이 눈물을 왈칵 터트렸다.
“언니, 주고(周翱)의 말을 믿고 두둔하는 건가요?”
그러자 목운요가 한숨을 쉬더니 정열람의 손을 부여잡았다.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동지 부인께선 부인의 친언니이니 당연히 부인의 말을 믿으실 거예요.”
정열심은 빳빳하게 굳은 미소를 지으며 목운요를 노려봤다.
지금 상황에서 정열람에게 돌아가라고 권한다면, 자신은 친동생 말은 믿지 못하고 주고의 말만 믿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저리 내버려 두면 주고가 정열람에게 못 할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두 사람의 이혼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비칠 것이다.
둘 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언니, 돌아가서 주 대인에게 전해 줘. 이젠 남남이지만, 한때 부부였던 정을 생각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난 여기 있는 게 편해. 나나 하운방을 자꾸 귀찮게 하면 옛정이고 뭐고 더 이상 사정 봐주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정열람이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쯧, 하여간 부인께선 속도 좋으시지. 제가 아직 어리지만 옮고 그름을 분별할 수는 있어요. 이번 일은 정 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동지 부인, 그만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부모님께도 똑똑히 말씀드려 주세요. 자식이 소중하다면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가라고 억지로 등 떠밀지 마시라고요.”
말을 마친 목운요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재빨리 뒤돌아서서 정열람의 뒤를 쫓았다.
숨통이 턱 하니 막혀 왔다. 정열람과 목운요의 몇 마디로 이혼은 빼도 박도 못 하게 되었다. 게다가 정열람은 자신과 주고 사이의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 사람을 차마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놀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마차에 올라탄 그녀가 도망치듯 하운방을 빠져나왔다.
* * *
모든 것을 지켜보던 금 부인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더니, 마부에게 조부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보다 목운요를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혼자서 매끄럽게 일을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부인, 선무사 부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무슨 일이길래 사람이 며칠 새 변한 건지…….”
“후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니? 주 대인이 부인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여긴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선무사 주고는 조운년과 관계가 썩 좋지 않은 터라, 주고에 관한 일이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생을 위한다며 젠체하는 언니라는 인간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때가 무르익으면 터트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빨리 만천하에 드러나다니……. 뭐, 그래도 상관없다. 이번 일로 주고는 재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은홍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 대인께서 부인에게 못 할 짓을 했다고 했는데, 왜 이야기하지 않은 걸까요?”
“사람들은 어떤 사실이 드러나면 그 원인을 캐는 데만 매달리느라 정작 사건의 본질에 대해선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아. 이번 일도 그렇단다. 이혼했다는 사실보다도 두 사람이 왜 이혼하려는가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질 뿐이거든.”
그 말에 은홍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는 말씀이네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 대인이 부인한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만 생각나요. 이혼한다는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그래서 운요가 똑똑하다는 거란다. 옛말에 이르기를, ‘이치를 털끝만큼만 잘못 이해해도 그 결과는 천 리나 멀어지게 된다.’고 했다. 미묘한 차이가 사람을 쥐락펴락할 수 있으니까. 운요의 그런 재주는 나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구나. 네가 운요한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법을 조금이라도 배운다면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거다.”
“전 아둔해서 부인을 모시는 일이나 열심히 하렵니다. 제게 그런 재주는 없는 것 같아요.”
“후후, 어쨌든 하운방에서 소란을 피우려는 자가 있거든 몽땅 옥사에 집어넣거라. 그 누구도 운요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잘 지켜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