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44화 (44/442)

44화 형장에 선 여인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부인께서 말하고 싶지 않으신데 제가 그 연유를 여쭈면 서로 난처할 뿐일 거예요. 그래서 묻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열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지만,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자매가 있나요?”

“아뇨.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몸조리를 제대로 못 하셔서 형제자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로 돌봐 줄 핏줄이 있는 사람들이 가끔은 부럽기도 해요.”

“언니와 저는 처음엔 가깝진 않았죠. 하지만 어릴 때 연못에 빠진 저를 언니가 구해 준 뒤로, 저는 언니를 믿고 따르며 지금껏 지켜 왔어요. 심지어 제 원래 성격까지 바꿔 가면서 말이죠.”

감정에 복받친 듯 정열람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련하고 처량하던지 옆에 있던 목운요조차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참 뒤 정열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죠. 다정했던 언니가, 정다웠던 부부가 한 줄기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렸어요. 그제야 진실과 거짓이 보이더군요…….”

목운요는 묵묵히 정열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찻잔을 건네받았다.

“부인, 차가 식었네요. 제가 가서 따뜻하게 데워 올게요. 가슴이 따뜻해야 가슴 시린 일들도 서서히 녹는 법이랍니다.”

목운요가 따뜻하게 데워 온 생강차를 손에 다시 들려 주자, 정열람의 표정이 빳빳하게 굳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찻잔의 온기, 그 위에 피어오르는 김……. 그 때문이었을까, 정열람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살짝 식은 생강차를 단숨에 들이켠 정열람은 긴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목운요는 얇은 이불을 덮어 준 뒤 조용히 뒤돌아 나갔다.

* * *

목운요가 방문을 나서자 금란이 잽싸게 달려왔다.

“소저,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내일도 정신없이 바쁠 테니 금란도 어서 가서 쉬도록 해요.”

“예, 소저. 무슨 일이 있거든 언제든 불러 주세요.”

목운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란이 물러간 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기억 속에 묻어 놨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회귀 전의 생에서 정열람을 처음 본 곳은 형장(刑場)이었다.

당시 자신은 막 진왕의 첩실이 된 터라 뜨거운 총애를 받고 있었다. 온종일 집 안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고 투정을 부리자, 그는 자신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에 나섰다. 그러다 정열람을 보았다.

머리가 산발이 된 데다 온몸이 피와 오물로 뒤덮인 여인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죄인이라고 하기엔 한 치의 부끄러움이나 죄책감도 없이 맑고 당당했다.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돌이나 썩은 채소를 던져도,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띤 채 고고한 눈빛을 유지했다.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목운요는 정열람이라는 여인이 제 손으로 직접 언니와 형부, 그리고 자신의 남편까지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두고 뒷말은 무성하게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은밀한 진실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열람에게는 외모나 성격 모두 부드러운 다정한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당시 경릉 동지와 선무사 모두 그녀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훗날 경릉 동지는 언니를 아내로 맞이했다.

한편 선무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 동생과 혼례를 올렸는데, 그 상대가 바로 정열람이었던 것이다.

선무사는 혼례를 올린 뒤, 언니와 오랫동안 사통한 것도 모자라 정열람에게 낙태약을 은밀히 먹였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정열람의 혼수품을 몽땅 빼돌렸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정열람은 배신과 절망에 몸부림쳤다. 언니와 자신의 남편이 사통하는 현장을 덮친 그녀는 결국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숨통을 끊어 버렸다. 상황을 살피러 온 경릉 동지 역시.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서릉이 오랫동안 떠들썩했었다.

발자국 소리에 문뜩 정신을 차리니,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정열람의 모습이 보였다. 죽음 앞에서도 결연했던 여인이라면, 잠시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무너져 내리진 않을 것이다.

“목 소저, 늦은 밤에 이런 소란을 피워서 미안해요. 젖은 옷은 버리지 말아 줘요. 목 소저가 지어 준 옷이 무척 마음에 들거든요. 며칠 뒤에 옷을 찾으러 다시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가 볼게요.”

목운요가 우산을 들고 배웅에 나섰다.

“부인, 조심히 가세요. 옷을 찾으러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한테는 작은 지푸라기조차 힘이 되는 법이다. 자신 역시 그러했다. 절망에 빠진 자신이 간절히 바란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알아채 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시운(時運)이 닿지 않아 자신의 손을 누구도 잡아 주진 않았지만…….

그때의 자신처럼 절망에 빠진 여인을 보자, 목운요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었다.

정열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목운요가 건넨 우산을 들고 빗속을 향해 나아갔다.

참으로 기구한 여인이었지만, 그때의 일을 되풀이하진 않았으면 했다. 그따위 인간들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걸 그녀가 깨달았으면 했다.

정열람을 배웅한 뒤, 목운요는 방으로 돌아왔다. 옛일이 떠오른 탓인지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몸부림치는데, 난데없이 한 줄기 빛이 그녀의 몸을 비췄다.

깜짝 놀라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혼란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니 어느새 비가 그친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음울한 날씨 탓에 숨통을 조이던 먹먹한 기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 * *

금란과 금교는 아침 일찍부터 내려와 더러워진 양탄자를 갈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목운요를 발견한 두 사람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소저, 오늘은 올라가서 쉬세요. 얼굴이 안 좋으세요.”

“괜찮아요.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잠을 설쳤을 뿐이에요. 가뜩이나 일도 밀렸는데 조금이라도 도와야죠.”

목운요는 뻐근한 목을 만지작거리며 자수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 주변에 더 있느냐고 소녀들에게 물었다.

“주문이 점점 늘어나서 모두 날마다 고생이잖아요. 그래서 일손을 늘려 일을 좀 나누면 어떨까 해서요.”

그럼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소녀들에, 잠시 고민하던 목운요가 금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동생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예, 당시 너무 어려서 금 부인께서 데려가지 않으셨죠. 다행히 몸이 약해 다른 곳에도 팔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생을 데려오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어요.”

“올해 열두 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같이 일해 보면 어떨까요? 누가 알아요, 언니들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지녔을지.”

“가, 감사합니다. 소저!”

목운요는 머리를 조아린 금란과 금교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상황을 지켜보던 소녀들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도 좋아요. 누구를 추천하든 꼼꼼히 따져 보고 뽑을 테니, 추천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여러분을 탓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예, 소저. 감사합니다!”

* * *

오후가 되자, 대청 안에 서른 명 정도의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삼 층짜리 하운방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목운요는 근처에 있는 가옥을 구입했다. 다소 낡긴 했지만 비바람만 피할 수 있으면 됐다. 그녀는 소녀들을 새로 산 가옥에 들여보낸 뒤, 금란을 시켜 간단한 교육을 진행했다.

이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소청이 조용히 다가왔다.

“요아야, 그 사람들을 내가 가르쳐 보면 어떻겠니?”

“어머니께서요?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건강 관리하셔야 해요. 제가 가르치면 되니 어머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

“수놓는 법을 가르치는 것뿐이라면 말로 설명해도 되잖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무리하지는 않을 테니. 그러니 내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혹시 내가 잘못 가르치거든 네가 바로잡아다오.”

소청의 단호한 눈빛에 목운요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대신 어머니께서 힘들어하시면 사람들을 죄다 쫓아버릴 거예요!”

“그래그래, 네 말대로 하마.”

그들 대부분이 가난한 소녀들이었다.

지금과 같은 시절에 여인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특히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이라면 돈 몇 푼에 팔려 가곤 했다. 그 후 그녀들이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남편이 죽고 난 뒤 자신의 아이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눈물과 걱정으로 많은 밤을 지새우던 소청이었기에 더욱 마음이 갔다. 몸이야 조금 힘들겠지만, 그렇게 해서 여러 소녀들의 삶을 바꿔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고생을 자처할 만했다.

* * *

며칠 뒤, 경릉성이 하나의 화젯거리로 시끄러워졌다. 한 노부부가 채월각 총관인 담로를 관아에 고발한 것이다.

고발장에는 담로의 죄명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가 호의를 베푸는 척하며 고리대를 놓은 일부터, 다른 사람의 논밭을 빼돌린 일까지. 그 죄목이 십여 개에 이르렀다.

“소저, 채월각이 관아에 고발됐답니다.”

“후후, 그렇지 않아도 방금 금교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고발장이 접수됐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죠.”

“이번 사건을 진 부인의 부군께서 다루신다고 들었어요. 강직하신 분이니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주실 거예요!”

금란의 말대로 채월각에 관해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진 부인의 부군이 법도대로 처리한다면 채월각도 법망을 피하지 못할 터.

그보다 다관으로 쓸 만한 곳을 좀처럼 찾기가 어려워 목운요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차를 즐기는 강남의 문화 덕분에, 경릉성에는 다관만 수십 곳에 이르렀다. 눈에 띄지 않으면 다관을 여는 의미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목운요는 월왕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든든한 언덕이 있는데 무작정 땅만 파는 건 자신의 방식이 아니었다. 편히 갈 수 있는 큰 길이 있는데, 가시밭길을 고집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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