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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43화 (43/442)

43화 비 오는 밤의 붉은 그림자

* * *

하운방으로 돌아오자, 초조한 표정의 금란이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목운요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본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 오늘 왜 이리 늦으셨어요!”

“아아, 미안해요. 사람을 시켜서 조금 늦는다고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아침에 금 부인의 부름을 받고 조부에 가서 금추와 금국을 보고 왔거든요.”

안에 있던 소녀들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금란에게 계속 물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저…… 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금 부인께서 워낙 사려 깊으신 분이라, 제가 무서워할까 봐 제 앞에서 벌을 주진 않으셨어요. 하지만 비명을 들었죠. 두 사람이 다시는 실과 바늘을 쥐지 못할 거라고 하신 걸 보면 역시 손을…….”

목운요는 일부러 뒷말을 흐렸다. 자신의 이야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소녀들을 향해 목운요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돈을 벌고 싶거든 스스로의 손으로 벌면 돼요. 제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 기회를 줄게요. 지금은 하운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을 뿐이지만, 나중엔 가게를 운영하는 총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 절 배신하진 말았으면 해요.”

할 수만 있다면 목운요는 소녀들을 유능한 인재로 키우고 싶었다. 각지에 하운방의 분점을 세우고, 그녀들에게 그곳을 맡긴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소녀들이 하루빨리 홀로서기에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저희 모두는 소저를 한마음으로 따르기로 했습니다.”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찍을 줬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였다.

“조금 있다가 금란을 통해 은자를 내려보낼 테니, 한 사람당 열 냥을 갖도록 해요. 이번 달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힘내라고 주는 상금이랍니다. 그러니까 이 돈으로 마음껏 먹고 마셔요. 실컷 즐기도록 해요.”

예상치도 못한 상금에 소녀들은 기뻐하며 목운요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소저!”

금란에게 은자를 건네고 난 뒤, 육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사람을 빌리셨습니까?”

육냥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응, 오십 명. 꽤 쓸 만할 거야.”

“믿을 만합니까?”

“지금으로서는.”

월왕은 다관을 통해 첩자를 심으려 할 거다. 그 목적을 이루기 전엔,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우리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그건 너무 오래 걸려. 쓸 만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이삼 년은 족히 걸릴 거야. 나한테 그럴 시간이 없어.”

할 수만 있다면 목운요도 믿을 만한 심복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 역시 촉박한 터라 꼼수를 부릴 수밖에.

육냥은 어린 소녀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돈도 충분하고 안락한 집도 있다. 게다가 침방도 열었으니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를 볼 때마다 뭔가에 쫓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도 은자가 필요합니다.”

그 말에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의 육냥을 바라봤다.

“얼마나?”

“일단 이천 냥 정도.”

목운요가 불안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이런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녀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목운요는 자세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침방에는 그리 큰돈이 없으니까 이따 저녁때 집에 가서 줄게.”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말하지 않아도 돼. 난 널 믿으니까. 필요하면 어음이라도 내주지.”

목숨을 걸고 월왕과 손을 잡기로 한 마당에 육냥한테 은자를 내주는 게 무슨 대수랴? 설사 자신이 패착을 뒀다고 해도 기껏해야 돈 몇 푼 잃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 말에 육냥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육냥이 돌아가고 난 뒤에 목운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왕 옆에 서서 항상 한기를 폴폴 풍기던 자였다. 누구도 그가 말하는 것을 본 적 없다고 했다. 그런 자가 자신 앞에서는 이리 많은 말을 하다니.

육냥의 변화를 보며 목운요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과 어머니의 운명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 * *

앞으로 한 달 동안 하운방 문을 닫을 거라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미리 옷을 맞추지 못한 부인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옷값이 너무 비싼 터라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한 게 원통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한 달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반면 미리 옷을 지은 부인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특히 옷을 미리 받고 싶다며 이백 냥을 더 낸 양 부인은, 옷을 맞춘 지 닷새째 되던 날에 주문한 옷과 장신구를 받아 볼 수 있었다.

붉은색과 백옥색으로 지어진 치맛자락을 펼치자 은은한 꽃향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옷소매와 옷깃에는 화려한 나비가 수놓아져 있고, 치맛자락에는 꽃이 수놓아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

옷을 입고 오후 연회에 참석하니, 조 부인 등이 먼저 말을 걸어와 친절을 베풀었다. 그 모습에 하운방에서 옷을 짓지 않은 사람들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 후, 십여 일이 지나도록 가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여전히 줄지 않자, 목운요는 간판을 아예 떼어 버렸다. 이에 기다리던 사람들은 더욱 몸이 달았다.

그동안 목운요는 소녀들에게 자수법을 가르치거나, 다관을 준비하는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운방에서 늦게까지 홀로 수를 놓던 목운요가 뻐근한 손목을 주물렀다. 지난 며칠 동안 날씨가 후덥지근했던 터라 더욱 지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비나 확 내렸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바람을 누가 알아채기라도 한 듯,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운요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들어 뭐가 땅이고 하늘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투둑거리며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빗줄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그에 목운요가 창문을 닫으려던 순간, 붉은 그림자가 거리를 지나는 게 보였다.

거센 빗줄기에 가려 상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뚫어지게 보던 목운요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붉은 그림자는 거센 빗줄기 속을 무작정 헤매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던 빗줄기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리니,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목운요의 모습이 보였다.

“부인, 비가 많이 오니 일단 하운방으로 잠시 몸을 피하세요.”

비에 젖은 상대는, 지난번에 만났던 선무사 부인 정열람이었다.

넋이 나간 정열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목운요의 손에 이끌려 하운방으로 들어온 뒤였다.

목운요는 커다란 수건을 정열람에게 덮어 주며 이 층으로 이끌었다.

소리를 듣고 나온 금란은 비에 홀딱 젖은 목운요와 정열람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금란, 생강차를 뜨겁게 타 오세요.”

“예, 소저.”

금란은 생강차를 준비하기 위해 곧장 몸을 돌렸다.

목운요는 정열람의 젖은 옷을 벗기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리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리실 수 있어요. 일단 뜨거운 물로 목욕한 뒤에 옷을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부인.”

정열람은 엉망이 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한번 만났던 낯선 사람이 같은 이불을 덮는 사람보다 낫네요.”

하지만 목운요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눈을 내리깐 채 그녀를 욕실 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목욕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제대로 갖춰졌는지 확인한 후에야 방문을 나섰다.

금란이 문 앞에 서 있다가 방문을 나서는 목운요를 보곤 잽싸게 달려왔다.

“소저,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세상에, 홀딱 다 젖으셨잖아요?”

“고마워요. 먹을 것도 좀 준비해 줘요.”

“예, 소저.”

* * *

약 삼십 분이 흐른 뒤, 정열람이 옷을 갈아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목욕한 탓에 뺨이 붉게 달아올라 평소보다 온화해 보였다.

목운요는 정열람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젖은 머리를 감쌌다.

“부인, 한기를 쫓는 데는 생강차만 한 게 없답니다.”

생강 특유의 쌉쌀하면서도 달큼한 맛이 느껴졌다. 뜨끈한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몸속의 한기가 조금은 사라진 듯했다.

“고마워요, 목 소저.”

“불편하신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때마침 금란이 요기할 것을 가져오자, 목운요가 두고 나가라는 눈짓을 하더니 정열람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저녁은 드셨나요? 제가 아직 식사 전이라서……. 시간이 늦어서 더 허기가 지네요. 배고프고 추운 것보다 힘든 건 없죠. 부인께서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면 저랑 같이 들지 않으시겠어요?”

“전 괜찮아요.”

“어머니께서는 배가 고플 때는 괜한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마음만 괴롭다면서 말이죠. 대신 이튿날 환하게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면, 전날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일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을 수 있을 거라 하셨답니다.”

그럼에도 정열람이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자, 더 이상 권하지 않고 혼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평소 목운요는 밥을 먹을 때마다 도토리를 입에 문 다람쥐처럼 양 볼이 빵빵해지도록 먹곤 했다. 오물거리며 먹는 그 모습은 없던 입맛도 돌게 할 정도였다.

따끈따끈한 갓 지은 밥에, 향긋한 음식 냄새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앞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상대를 보자니 절로 입맛이 돌았다. 어느새 정열람은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을 쥐곤 밥을 반 공기나 비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식사를 마친 목운요는 정열람과 함께 찻잔을 쥔 채로 의자에 기대 휴식을 취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생강차, 부드럽고 따뜻한 의복, 푹신한 의자에 기대고 있으니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음장보다도 더 차가웠던 마음도…….

침묵을 깨고 정열람이 목운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몰골을 보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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