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보답 혹은 복수
“이전에 말했던 책자는 다 준비됐나요?”
“예, 모두 준비해 뒀습니다.”
“그럼 그걸 탁자 위에 펴 두세요. 누군가가 옷에 대해 물어보면 앞으로 이 책자를 보여 주면 될 거예요.”
지금의 여세를 몰아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벌어야 한다. 정열심과 정열람의 일은 앞으로 찬찬히 지켜보면 될 것이다.
* * *
두 자매가 가게 문을 나선 뒤, 가게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그 모습에 금란은 손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지만, 이내 목운요가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손님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존함은 무슨. 그냥 양(楊) 부인이라고 불러요.”
양 부인이라고 불러 달라는 여인은 서른 남짓으로 보였다. 날카로운 미간, 기운 넘치는 눈빛을 볼 때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철부지 규수는 아닌 듯했다.
사실 양 부인이 누구인지는 금란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을 여의고 양씨 가문의 점포 여러 곳을 혼자 운영하는 여장부라고 들었다. 그 때문에 경릉성에서도 알아주는 재력가로 알려져 있었다.
“양 부인, 옷을 맞추러 오신 건가요?”
“당연하죠. 그런데 하운방에서 우리 같은 평민에게도 옷을 파나 모르겠네요.”
양 부인은 하운방을 쓰윽 돌아보느라, 정작 목운요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장사꾼이 어디 신분 따져서 장사하던가요? 그리고 부인 같으신 분이라면 저희 하운방은 언제나 환영이랍니다.”
차와 다과를 올린 금란이 양 부인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부인, 이 책자는 저희 하운방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미인도를 고르시면 됩니다.”
그 말에 양 부인의 눈이 번쩍하더니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기 시작했다.
아까 전 가게 문을 나섰던 선무사 부인의 빼어난 자태를 떠올리니 붉은 옷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여러 장을 살핀 끝에 그녀는 꽃밭 한가운데서 웃고 있는 미인도를 골랐다.
“이 옷이 마음에 드네요.”
“장신구도 같은 색상과 주제로 맞추시겠습니까?”
금란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하운방에 들어온 이래, 자신이 맡은 첫 손님이었다. 이번 거래가 성사된다면 자신으로서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셈이었다.
“물론이죠.”
“의상과 장신구를 합치면 총 천팔백 냥이 됩니다.”
가격을 들은 양 부인은 속으로 꽤나 놀랐다. 이 돈이면 좋은 집을 한 채 살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런 거금이 하운방에서는 옷 한 벌과 장신구를 합친 값이라니…….
양 부인의 반응에 금란은 속이 더더욱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목운요가 가격을 정해 주었을 때도 자신 역시 크게 놀랐기 때문이다.
예전에 금 부인 등이 한 벌당 천 냥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소녀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보다도 높은 가격으로 일반 평민에게 옷을 팔다니…….
생각보다 비싼 금액에 양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옷과 돈을 머릿속으로 연신 저울질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말에 탄 채 붉은 치맛자락을 흩날리던 정열람의 모습뿐이었다.
“좋아요, 이걸로 할게요. 언제쯤 옷을 받아 볼 수 있죠?”
시원스레 대답하는 양 부인의 모습에 당황한 이는 오히려 금란이었다. 정말 이천 냥을 주고 이걸 사겠다고?
“부인께서 고르신 옷은 손으로 일일이 수를 놓아야 한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자수법을 쓰기 때문에 저희 아가씨만 지으실 수 있어요. 그래서 좀 오래 기다리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 처음 저희 가게를 찾아 주셨으니 이백 냥만 더 내시면 일주일 안에 댁으로 옷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목운요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금란은 이 말을 절대로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격에 놀란 손님이 그냥 가 버릴까 봐 가슴이 계속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양 부인은 이번에도 속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백 냥 더 낼 테니 일주일 안에 옷을 받아 봤으면 좋겠네요.”
“예, 알겠습니다. 치수 재는 것을 도와드릴 테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치수를 재고 양 부인을 가게 밖까지 공손히 배웅한 금란이 흥분에 겨워 붉게 달아오른 뺨을 한 채 삼 층으로 잽싸게 뛰어 올라왔다.
“소저, 소저! 옷을 팔았어요. 꽃밭에 웃고 있는 그 미인도 말이에요! 천팔백 냥이라고요, 천팔백 냥!”
사실 목운요는 아래층의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금란이 치맛자락을 쥐고 한걸음에 삼 층까지 뛰어 올라온 걸 보면 꽤나 큰 금액인가 보다. 기뻐하는 금란을 보니 자신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이 하운방을 찾아왔다. 하지만 손님 대부분이 옷값을 듣고 난 뒤에는 온갖 이유를 대며 가게를 나갔다.
그 모습에 금란 등은 무척 실망했지만 목운요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망할 것 없어요. 경릉성에서 가장 유명한 채월각의 하루 매상도 수천 냥이 되지 않는답니다. 양 부인께서 옷을 맞추셨으니 재료부터 준비하세요.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할 거니까요.”
“예, 소저.”
* * *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하운방 이 층에서 발견했던 발자국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저녁을 먹을 때도 좀처럼 마음을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에 소청이 일하느라 바빠서 힘들어한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가서 쉬라며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 그럼 저 먼저 쉴게요. 어머니도 얼른 가서 쉬세요.”
“그래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침상에 누운 뒤로도 목운요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운방에 침입했던 자들의 목적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쓴 시구만 훔쳐 갈 리 없었다.
그때, 방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밤바람에 촛불이 깜빡였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러 왔다는 생각에 목운요는 침상에 여전히 누워 있었다.
한데 그 순간, 기다란 검이 그녀의 목덜미에 드리워졌다!
예리한 검날에 목덜미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등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목운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침상 위에서 얼어붙었다.
“잘도 숨었구나.”
한겨울 뼈를 파고드는 찬 바람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당신은!”
월왕.
월왕이었다!
그를 다시 볼 거라고 목운요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가 먼저 자신을 찾아올 줄이야…….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하려 그녀가 숨을 천천히 골랐다.
“지난번 목숨을 구해 드린 건 별것 아니었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훗…….”
가느다랗게 뜬 그의 두 눈에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장검이 목운요의 목덜미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목덜미에서 뭔가 뜨끈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사실 월왕의 비수로 정산의 숨통을 끊을 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의 비수를 쓴 일을 가지고 월왕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수에 별다른 무늬는 보이지 않아 안심하고 ‘대사’를 행했던 것이건만…….
“제가 목숨을 구해 드렸는데 절 죽이려 하시다니,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또 어디 있답니까.”
목운요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면 월왕은 그녀의 말에 깜빡 넘어갔을 것이다.
“나의 비수를 가지고 사람을 해친 것도 모자라, 나의 필적을 흉내 내 편액을 내걸고 시구를 썼다.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셈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좋아하던 필체가 월왕의 것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진즉 알았다면 십만 냥을 줘도 그 필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말할수록 불리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시치미 떼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월왕의 시선이 검날에 맞닿은 상대의 피부로 쏠렸다. 자그마한 상처에서 서서히 흘러내린 핏물이 백옥처럼 새하얀 목덜미를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찔한 감각에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장검을 슬쩍 치웠다.
“내게 증거가 있는데 계속 발뺌할 테냐?”
월왕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목운요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회귀 전에도 월왕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큰 업적을 세웠으나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무자비하고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 외엔…….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아무 말 없이 단칼에 숨통을 끊었어야 옳다. 그런데 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상대의 의중을 슬쩍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하운방 이 층에서 두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가 당신이죠?”
입을 꾹 다문 채 월왕이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발자국이 찍힌 양탄자는 제 것이 아니라, 부탁을 받고 보관 중인 거였어요. 게다가 하운방의 재물을 훔치러 가택에 침입한 것이 분명하니 제게도 증거가 있다고요.”
월왕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눈앞의 계집은 보면 볼수록 맹랑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억지로 센 척하는 모양새라니…….
하는 짓이 꼭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 같았다. 발톱을 세운 발을 휘두를 줄이나 알지, 그 솜뭉치 같은 발로는 자신에게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이야기해 볼 만하겠군.”
볼수록 흥미로운 계집이다. 소씨 가문의 일과도 어느 정도 관련 있는 듯하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데리고 강남으로 거처를 옮길 담력과 배포라니. 또래 계집아이한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백이라 살심(殺心)은 들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지자, 목운요는 가까스로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눈앞의 ‘살인귀’가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는 건 아닌지 내심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내 필체를 사용해 하운방을 열었으니, 그곳에서 얻는 수익의 절반을 내게 넘겨라. 은자로 줘도 좋고, 이 집의 절반을 넘겨도 좋다.”
절반이라니? 월왕의 제의에 목운요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